박근혜 대통령이 '포켓몬고(Go)' 이야기를 했습니다.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차 과학기술전략회의에서죠. 오싹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신문 보고 '우리도 이런 것 해봐'라는 대통령?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는 왜 닌텐도 같은 걸 못 만드느냐"라고 한 적이 있죠. '명텐도'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 뒤, 닌텐도의 실적이 곤두박질쳤어요. 포켓몬고 개발에도 닌텐도가 참가했죠. 닌텐도 입장에선, 박 대통령의 말이 불길할 수 있겠네요.
닌텐도의 실적이야 결국 남의 일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제대로 된 혁신 모델을 찾는 거겠죠. 윗사람이 언론을 통해 요즘 유행을 접한 뒤, '우리도 이런 것 해봐'라고 하는 모습. 정말 익숙합니다. 대통령만이 아니죠. 기업 경영자도 흔히 그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듣기 힘들죠. 이명박 정부 시절 벌어진 '명텐도' 논란, 로봇 물고기 개발 등은 오히려 사소한 사례일 겁니다.
박 대통령은 10일 "우리에게 알파고 충격을 안겨줬던 인공지능(AI)이나 최근의 포켓몬고 열풍으로 대변되는 가상 증강 현실 기술은 ICT 기술(정보통신 기술)이 가져올 경제·사회의 큰 변화와 혁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가상 증강 현실 기술"이란 표현이 눈에 띕니다.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VR)' 기술이란, 말 그대로 가짜 체험을 제공하는 거죠.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AR)' 기술이란, 현실의 이미지 위에 다른 정보를 겹쳐 보이게 하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말한 포켓몬고는 증강 현실 기술을 이용한 게임이죠.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은 각각 다른 경로로 연구돼 왔어요. 그래서 이 둘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가상 증강 현실 기술"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했죠. 왜 그랬을까요.
학계와 산업계의 최근 연구 동향은 가상 현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죠. 그런데 포켓몬고 열풍으로 증강 현실 기술이 부각되니까, 둘을 묶어서 이야기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창조적이죠.
'일본→한국→중국'이 아니라 '일본→중국'!
어찌 됐건, 가상 현실이 주목받는 건 사실입니다. 차이나조이 2016, CES 2016, 바르셀로나 MWC 2016, 베이징 MWC 2016, 컴퓨텍스 2016…. 모두 올해 열린 전자 및 컴퓨터 분야 국제 박람회인데요. 이들 행사에는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바로 가상 현실이죠.
차이나조이는 중국 상하이에서 매년 열리는 게임 박람회인데요. 규모가 엄청납니다. 올해 행사에선 가상 현실 기술을 활용한 게임이 대거 발표됐어요. 한국에선 아직 가상 현실이 낯선 느낌인데요. 중국은 분위기가 다른 모양입니다.
세상이 참 빨리 바뀌지요. 얼마 전까지 중국은 짝퉁이나 만드는 나라였죠. 정보기술(IT) 분야에선 한국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고요. 한국의 게임 개발자가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하면, 중국 게임 유통 업체 간부가 극진하게 영접했다고 하죠. 마치 예전에 삼성전자 임원들이 일본 기업에서 퇴직한 엔지니어들을 깍듯이 모셨던 것처럼요.
이제 다 옛 말입니다. 국내 IT 업체들은 중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중국 대기업의 눈높이가 예전같지 않아요. 어지간해선 거기에 맞추기가 힘들죠.
모바일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 아시죠. 직접 즐기진 않았더라도, 옆에서 하는 모습은 많이 봤을 겁니다. 핀란드 업체 슈퍼셀이 개발했어요. 그런데 이 회사 지분 73%를 가진 대주주는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이었죠. 그걸 중국 기업 텐센트가 사기로 했습니다. 슈퍼셀 대주주 지위가 일본 자본에서 중국 자본으로 넘어간 건 상징성이 큽니다.
이 분야의 패권이 일본, 한국, 중국 순으로 건너가리라는 게 흔한 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한국 IT 기업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듭니다.
이른바 모바일 시대가 열린 뒤엔 이런 흐름이 확실히 굳어졌습니다. 예전엔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인터넷이 잘 안 돼서 불편하다고들 했습니다.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일찍 도입한 덕분이죠. 지금은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모바일 환경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선 최근에야 콜택시 앱이 도입됐습니다. 카카오가 이런 서비스를 하죠. 중국에선 디디다처라는 회사가 먼저 도입했습니다. 대리기사 서비스 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에서 먼저 활성화됐어요. 실제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그랬죠.
"중국의 모바일 분야가 한국보다 2년은 앞서있는 것 같다."
'평소엔 기초 과학 홀대하더니…'
앞서 언급한 가상 현실도 그래요. 서울에는 가상 현실 체험 공간이 강남역 근처에 딱 한 곳 있습니다. 중국엔 2200곳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의 조바심도 이해가 됩니다. 인공지능, 가상 현실, 증강 현실 등 최근 주목받는 분야에서 한국이 뒤처지는 기미가 뚜렷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요. 올해 3월 '알파고 충격'이 있었죠. 정부는 곧장 '한국형 알파고' 개발 계획을 내놨습니다. 인공지능을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쯤으로 여기던 관료들이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한 거죠. 딸려 나온 계획이 많아요. 알파고를 가능하게 한 이론이 '딥러닝(Deep Learning)'입니다. '머신러닝(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의 한 분야죠. 이 분야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수학 실력이 탄탄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쪽 연구자들은 수학 및 통계학계와 활발히 교류하죠.
그러니까 정부가 산업 수학을 육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산업 수학 관련 학위 과정도 개설하도록 유도한다고 하고요.
'그냥 평소에 잘하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평소 수학 등 기초 학문에 대해 정부가 진작부터 관심을 뒀어야 한다는 거죠. 언론이 주목하는 분야는 굳이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투자가 활발합니다. 정부가 할 일은, 민간 분야에선 잘 투자 하지 않지만, 길게 보면 중요한 분야를 지원하는 거죠.
유행따라 바뀌는 국가 전략…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 거부했다면?
사실 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늘 무시당하죠. 박 대통령이 포켓몬고 이야기를 했던 날, 정부는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를 발표했어요. 미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9가지 기술을 골라서 지원한다는 건데요. 박 대통령이 언급한 인공지능과 가상 증강 현실 기술이 맨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별 관심이 없죠. 당연합니다. 정부는 2년 전에 13대 미래 성장 동력 프로젝트를 발표했어요. 지난해에는 앞에 붙은 숫자가 '19대'로 바뀌었죠. 그리 올해는 다시 '9대'가 됐습니다. 지능형 로봇과 빅데이터 등이 빠지고 자율주행차, 인공지능, 가상 증강 현실 등이 포함된 거죠.
만약 포켓몬고 열풍이 없었다면,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거부했다면, 정부가 발표한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 내용이 지금과 같을까요. 그럴 리 없을 겁니다.
이렇게 해마다, 유행따라 바뀌는 국가 전략 프로젝트, 의미가 있을까요?
흔히 이야기합니다. 중국 같은 일당 독재 국가는 멀리 내다보면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데, 한국처럼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구조에선 그게 불가능하다고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언급한, 최근 뜨는 분야만 놓고 보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파격적인 기술 혁신을 주도한 이들의 면면이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이는 정부가 지원해야 할 대상 역시 달라졌다는 뜻이죠. 국가가 목표를 설정하고, 엘리트 관료들과 비슷한 우등생 출신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게 꼭 유일한 방법인지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시장이 외면했던 '가상 현실' 기술
가상 현실부터 이야기해보죠. 이 분야 역시 정부와 대기업이 진지한 관심을 둔 건 아주 최근입니다. SF(과학 소설) 소재로만 쓰였죠. 지금 우리가 쓰는 가상 현실 개념, 즉 컴퓨터로 구현하는 가상 체험은 1982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트론(Tron)>에서 소개됐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85년, 재런 래니어가 등장하죠. 공학자, 철학자, 음악가, 작가를 겸하는 사람인데요. 그가 VPL연구소를 설립한 뒤 가상 현실 안경과 장갑을 개발해서 팔았어요. 가상 현실 관련 기기를 처음으로 판매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론 실패했어요. 연구소는 문을 닫았고요. 나중에 선마이크로시스템에 인수됩니다.
하지만 재런 래니어는 포기하지 않았고요. IT 벤처 열풍이 뜨겁던 2000년대 초반에 비슷한 시도를 합니다. '세컨드라이프'라는 온라인 서비스를 내놨죠. 당시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어요. 하지만 실패합니다. 불과 10여 년 전이죠.
그러니까 가상 현실이 상용화 되는 건 당분간 어렵겠다고들 했어요. 이 분야 연구는 꾸준히 진행됐지만, 실제 활용까진 거리가 있었죠. 가장 큰 이유는 가상 체험을 위해 머리에 쓰는 장치, 즉 헤드셋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너무 무겁고 불편했거든요. 조금만 쓰고 있어도 눈과 머리가 아파왔고요.
스무살 청년이 찾아낸 돌파구
그런데 아주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불과 4년 전이에요. 그러니까 IT 분야 종사자들 역시 어리둥절해 합니다. 팔머 럭키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1992년생이에요. 올해 나이 24살이네요. 그가 20살이던 2012년, '오큘러스 리프트'라는 기계를 개발합니다. 기존 가상 현실 헤드셋의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한 기계죠. 예전의 방식은 시야가 고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머 럭키가 만든 건, 헤드셋을 쓰고 머리를 돌리면 그 방향의 영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훨씬 자연스럽죠. 이 대목이 파격적인 혁신입니다. 아울러 오래 쓰고 있으면 두통이 생기는 현상도 줄어들었습니다.
팔머 럭키는 평소 자주 들르던 웹사이트 게시판에 제작 방법을 소개하는 글을 썼어요. 조회 수가 무척 낮았습니다. 그런데 게임 개발자 존 카맥이 우연히 그 글을 봅니다. 존 카맥은 유명 게임 '둠'을 만든 스타 개발자죠. 그리고 팔머 럭키에게 연락합니다. 팔머 럭키는 반가운 마음에 '오큘러스 리프트'를 존 카맥에게 보냈어요. 물론 돈도 안 받고요.
존 카맥은 '오큘러스 리프트'를 써본 뒤에 충격을 받죠. 이후 그걸 활용한 게임을 만들어서 대박을 칩니다. 가상 현실이 게임과 만나면 엄청난 효과가 있으리라는 건, 누구나 하던 생각이었어요. 그게 실현된 겁니다. 이후 상황 전개는 뉴스에 나오는 대로입니다. 팔머 럭키와 존 카맥은 서로 손 잡고 창업을 하죠. 그리고 2014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가 23억 달러(약 2조5000억 원)에 그 회사를 인수합니다. 페이스북이 꼽은 향후 성장 동력이 바로 가상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가상 현실 기술은 전 세계 주요 IT 기업의 주목을 받습니다. 팔머 럭키는 "죽었던 가상 현실을 살려냈다"라는 평가를 받죠. <타임>, <포브스> 등의 표지 기사로도 소개됩니다. 삼성전자 역시 오큘러스와 제휴합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2년 사이에 벌어졌어요.
'홈스쿨링' 청년의 기술 혁신
그런데 팔머 럭키의 이력이 특이합니다. 그는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요. 그의 부모가 지닌 교육관 때문인데요. 자동차 영업 사원이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네 자녀를 모두 '홈스쿨링'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학교에 안 보내고 집에서 교육을 한 거죠.
그 덕분에 팔머 럭키는 자신의 열정이 향하는 방향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조금 깊이 있는 지식이 필요하면, 대학의 공개 강의를 들었죠. 미국은 이런 식의 공개 강의가 활성화 돼 있습니다. 이른바 '무크(MOOC)' 방식이죠. 대규모(Massive) 공개(Open) 온라인(Online) 수업(Course)의 첫 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정규 교육을 안 받았거나 중간에 관둔 이들이 IT 벤처 기업을 차려서 성공한 사례는 전에도 많았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기술이 아니라 사업으로 성공한 겁니다. 페이스북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창업 초기엔 새로운 기술을 내놓은 게 아니었습니다. 기존 기술을 잘 활용해서 사업 기회를 잡는데 탁월했던 거죠.
선배 연구자들의 발목을 잡았던 문제를 푸는 것, 파격적인 기술 혁신 등은 여전히 고학력 전문가의 몫이었어요. 예컨대 구글 창업자들이 이런 경우죠. 구글을 창업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검색 분야에서 기존 수준을 확 뛰어넘는 기술을 실현했죠. 그들이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박사 과정에 다닐 때 쓴 검색 관련 논문은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구글 창업자들은 정규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잘 이수한, 우등생 출신이었어요. 그런데 팔머 럭키는 달라요. '홈스쿨링'으로 자란 청년이 전문 연구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푼 겁니다.
인공지능 의사, 인간 의사를 뛰어넘다
특이한 사례를 일반화 한 것 아니냐고요. 다른 예도 있습니다. 이번엔 인공지능인데요. 잠시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이 얼마 전에 큰 화제가 됐죠.
일본 도쿄대학교 의과학연구소 소속 의료진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여성 환자가 있었습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한 환자였죠. 의료진은 이 환자에게 6개월 동안 항암제를 투여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패혈증 등 부작용이 생겼어요. 그런데 인공지능 왓슨이 불과 10분 간 환자 정보를 분석하더니 새로운 결과를 내놨습니다. 이 환자는 급성골수성백혈병 중에서도 '2차성 백혈병'이라는 특수한 유형이며, 따라서 항암제 종류를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왓슨의 처방대로 항암제를 투여하자 환자는 곧 회복해서 퇴원했죠. 인간 전문가의 실력을 인공지능이 넘어선 사례가 추가됐습니다.
호기심에 몸을 맡겼다, 인공지능 변호사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례가 나타났어요. 이번엔 1996년 생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올해 나이 스무 살, 영국 출신으로 지금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죠슈아 브로더입니다. 갓 운전을 시작한 그는 종종 주차 위반 단속에 걸렸어요. 처음에는 부모가 벌금을 대신 내줬죠. 그러다 얼마 뒤엔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합니다.
죠슈아 브로더가 연구를 시작했어요. 주차 위반 판정 가운데 일부는 부당하다고 봤습니다. 관련 법령을 살피고 정보 공개 청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차 위반 판정을 취소하는데 성공했죠. 경찰이 부당한 조치를 했다는 걸 입증한 겁니다.
그러다 슬슬 주변 사람들이 겪는 비슷한 문제를 해결해주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건, 변호사가 하는 일이잖아요. 법령을 뒤지고, 근거 자료를 확보하고, 반박 논리를 세우는 일이니까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던 죠슈아 브로더는 거창한 목표를 세웁니다. '인공지능으로 변호사 업무를 대신하게끔 하자'. 스무 살 학부생인 죠슈아 브로더가 박사 수준인 인공지능 이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죠. 그래도 독학을 합니다.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된 공개 강의를 듣고요. 궁금한 게 있으면,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서 물어보죠. 그렇게 해서 주차 위반에 대해 변호사 업무를 대신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성공합니다.
"donotpay.co.uk"라는 주소의 웹 사이트로 서비스가 됩니다. 회원 가입을 한 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와 대화를 합니다. 그게 끝나면, 소프트웨어가 관공서에 보내는 항의 편지를 대신 써줍니다. 실제 변호사가 쓴 편지와 구별하기 어렵다고 해요.
IBM의 인공지능 '왓슨'을 개발한 건, 박사 급 전문가들입니다. 이 분야 권위자들이 설계한 교육 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사람들이죠.
죠슈아 브로더는 이런 과정을 생략했습니다. 전문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에선 '왓슨' 사례와 닮았지만, 이 대목에선 다르죠. 조슈아 브로더는 주어진 교육 과정을 따라가며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호기심이 흐르는 회로를 따라가며 공부해서 성과를 냈어요.
물론, 죠슈아 브로더는 머리가 아주 좋은 청년일 겁니다. 하지만 똑똑한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죠. 그들 모두 죠슈아 브로더와 같은 성과를 낸 건 아닙니다. 죠슈아 브로더의 사례는 고급 지식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식에 접근하기, 그걸 활용하기, 그 성과를 인정받기. 모두 전보다 쉬워졌죠.
가상 현실 연구에서 돌파구를 찾아낸 팔머 럭키, 인공지능 변호사를 구현한 죠슈아 브로더…. 그래도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가 부족하다고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올린공대, 신설 대학의 성공 비결
미국에 올린공과 대학(Olin College of Engineering)이라는 곳이 있어요. 지난 2002년에 문을 연 신설 학교입니다. 학부 과정만 있죠. 대학원 과정이 있어야 새로운 연구를 통해서 언론에 소개될 일이 많은데요. 이 대학은 그럴 일이 없어요. 그런데도 대단히 인기가 높습니다. 미국 역시 학벌주의가 심한 사회인데요. 하버드 대학교 대신 이 학교를 택한 학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올린공대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죠.
이유는 교육 과정입니다. 전통적인 공과 대학 교육 과정은 이런 식이죠. 1학년 때 미적분학과 물리학 개론을 배웁니다. 2학년 때 공학수학과 전공 분야의 기초 이론을 배우죠.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구체적인 분야를 배웁니다. 요컨대 기초에서 응용으로, 이론에서 실습으로 향하는 구조입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역시 비슷합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을 먼저 배운 뒤, 구체적인 분야를 익히죠.
올린공대는 이런 식의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습니다. 보편, 추상, 이론, 기초에서 출발하는 교육 과정이 지닌 장점이 분명히 있죠.
하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학생의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거죠. 나는 지금 당장 로봇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학교에선 물리학 개론부터 배우라고 합니다. 당장의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는 기초 과정을 견뎌낸 사람만이 구체적인 분야를 배울 수 있어요.
문제는, 기초 과정을 다 이수한 뒤엔 '내가 원래 뭘 하고 싶었는지'를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관성으로 연구를 할 뿐이죠. 그러다 보니, 이론을 위한 이론에 치중하는 경향도 생깁니다.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공부한 이론을 적용할 대상을 찾기 위해 현실을 살피게 되는 거죠. 현실을 억지로 이론에 꿰어 맞추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 다른 문제는, 정말 꼭 하고 싶은 게 있는, 열정적인 학생들은 초기 과정에서 탈락하기 쉽다는 겁니다. 길게 보면, 그런 학생들이 더 뛰어난 잠재력이 있는데 말이지요.
열정을 따라 흐르는 교육 과정
올린공대 방식은 학생이 원하는 목표를 먼저 설정하게 합니다. 앞서 소개한 팔머 럭키, 죠슈아 브로더 등의 학습 방식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거죠. 자신의 열정이 향하는 목표를 향해 일단 맨땅에 헤딩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이론을 찾아서 익히게끔 합니다. 교수들은 그걸 지원하고요. 이렇게 공부한 지식은 아무래도 체계가 없겠죠. 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간 부분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이해하겠죠.
그러니까 고정된 교육 과정이 없고요. 수시로 교육 과정이 바뀝니다. 이 학교 신입생들이 자주 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바로 '장난감 만들기'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장난감에 몰입한 기억이 있죠. 그런 열정을 끌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을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평가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이 갖는 장점은 또 있어요. 엔지니어의 자기 만족을 위한 연구개발이 지닌 위험을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만든, 정말 뛰어난 기능을 구현한 장난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걸 시시해 할 수 있어요. 장난감의 본래 가치와 동떨어져 있다면 그렇겠죠. 만드는 행위의 본래 목적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기업이 올린공대 학생들을 선호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합니다. 제품을 만드는 본래 목적을 늘 의식한다는 거죠. 또 기존 이론에 덜 얽매이는 탓에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도 좋은 편이고요. 물론, '기업이 좋아하니까 훌륭한 교육'이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쯤 생각할 거리는 된다고 여겨서 소개합니다.
한국, 중국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면 희망 없다
이 코너의 이름이 '토이 스토리'죠. 바로 '장난감 이야기'인데요. 놀이, 장난감 등이 지닌 의미 중 하나가 이 대목이라고 봅니다. 돈이나 성적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열정이죠.
예전에는 이런 열정을 죽이는 게, 혹은 특정한 방향으로 길들이는 게 학교의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내면의 열정을 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더니, 더 좋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이런 사례가 쌓이고 있습니다. 가상 현실 기기를 만든 팔머 럭키가 대표적이죠. 그렇다면, 아이들의 놀이와 장난감에 대해서도 다른 태도를 가질 때라고 봅니다.
글머리에서 박 대통령이 주재한 과학기술전략회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공지능처럼 새로 뜨는 분야에서 한국이 뒤처지는 상황에 대해 불안해하는 게 박 대통령만은 아닐 겁니다.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라는 이들은 누구나 느끼는 정서죠. 마음이 초조하니까, 과제를 남발합니다. 한국형 알파고, 로봇 물고기, 이와 비슷한 무엇…. 계속 나오겠죠. 그때마다 연구 예산이 책정될 테고, 이런저런 연고로 묶인 주류 엘리트 연구자들에게 조금씩 쪼개져서 돌아갈 겁니다. 대개는 약간의 인건비, 장비 구입 비용으로 쓰이고 사라지겠죠.
이런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선진국이 100점, 한국은 50점을 받은 분야에서 점수를 70점 정도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면, 도움이 되겠죠. 그런데 이런 방식은 중국이 한국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70점으로 올리는 동안, 중국은 더 많은 돈과 인력을 써서 90점이 될 겁니다. 같은 목표, 같은 방식의 경쟁이라면, 한계가 분명하죠.
'흙수저' 패러데이와 '지식 민주화'
그렇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규 교육 과정을 끝까지 모범적으로 이수한 이들에게만 의지하는 게 아닌, 다른 길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팔머 럭키, 죠슈아 브로더 등이 개척한 길입니다.
돌아보면, 과학의 진보 역시 그랬습니다.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갔던 엘리트만 주인공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 '패러데이의 법칙'을 배웠죠.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입니다. '가난한 수재' 유형도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 읽기와 쓰기, 산수를 조금 배웠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냥 평범한 아이였던 거죠. 13살에 문구점에 취업했고요. 그 이듬해에는 제본소 견습생이 됩니다. 책을 제본하는 일을 하면서 과학에 눈을 뜨죠. 일하면서 틈틈이 엿본 과학 책에 흥미를 느낍니다.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개설한 공개 강의를 듣습니다. 거기서 만난 과학자 데이비가 평생의 후원자가 됩니다. 나중에는 데이비가 패러데이의 성장을 질투해서 발목을 잡기도 하죠. 어찌 됐건, 과학자 패러데이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크게 보면 '지식 민주화'와 관계가 있죠. 패러데이의 성공은 영국 대중의 언어, 즉 영어로 과학 강의가 이뤄졌기에 가능했습니다. 소수 전문가, 상류층만 이해하는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아니었던 거죠. '흙수저 제본공' 패러데이가 교과서에 실리는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윗사람은 '권위자'만 상대하면 된다?
기술의 진보 역시 그 방향입니다. 앞에서 인공지능 왓슨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 의사가 지닌 권위가 흔들립니다. 정규 교육 과정을 충실히 따라갔던 전문가의 역할이 전보다는 덜 중요해집니다.
한편으론 위기지만, 다른 편으론 기회입니다. 지식 세계가 평평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덕후'들에게 날개가 달렸죠. '덕후'가 아마추어, 비제도권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도 잦아졌어요. 제도권 전문가의 지식에 접근해서 활용하기가 전보다 훨씬 쉬워졌으니까요. 체계 없이, 그저 열정이 흐르는 방향으로 쌓아 올린 지식으로 성과를 낸 사례는 더 많아질 겁니다. 가상 현실 연구에서 돌파구를 찾아낸 팔머 럭키가 대표적이죠.
이런 구조에서 혁신을 일궈내려면, 윗사람부터 권위를 내려놔야 할 겁니다. 권위적인 윗사람의 특징이 있죠. 단계를 차근차근 밟고 올라온 최고 엘리트, 이른바 '권위자'만 상대하려는 거요.
윗사람이 목표를 정하고, 그 분야 '권위자'에게 그걸 맡기는 예전의 방식은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대통령이 주재한 과학기술전략회의에 기대를 걸기 힘든 것도 그래서죠.
'권위자'와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던, 평범한 '덕후'들이 주도한 혁신이 늘어납니다. '홈스쿨링'으로 성장해서 가상 현실 연구의 돌파구를 찾아낸 팔머 럭키가 딱 이런 경우입니다.
윗사람은 '권위자'만 상대하면 된다는 태도로는, 새로운 유형의 혁신이 지닌 가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형 알파고', '로봇 물고기'가 될 건가?
팔머 럭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앞서 소개한 성공 신화를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겠죠. 박 대통령이 '한국형 알파고', '한국형 포켓몬고'를 원한다면,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겁니다. '한국의 팔머 럭키'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죠.
그걸 못하면, 이명박 정권과 다를 게 없겠죠. '한국형 알파고'는 다음 정권에서 '명텐도', '로봇 물고기' 취급을 받게 될 겁니다. 4대강을 헤엄치게 한다던, 그 '로봇 물고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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