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는 실은 가습기 살균제가 아니었다. 가습기 살균제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물통에 넣은 살균제가 외부로 오랫동안 빠져나가지 않고 상당 시간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습기 내부의 세균이 살균된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 기업은 한결같이 가습기 물에 넣어 희석하고 나서, 이를 초음파 진동 또는 가열 방식으로 공기 중으로 바로 내뿜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농약 분무기에 살균 성분의 농약을 넣고 들판이 아닌 방안에서 마구 뿌리는 격이다. 한마디로 가습기 살균제는 가습기 내부를 살균하는 것이 아니라 살균 성분이 포함된 미세 수중기가 공기 중으로 뿜어져 나와 공기 중 떠다니는 미생물과 만나 이들을 죽이는 실내 공기 살균제였다.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유공이 개발해 시판했다. 유공은 당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시판 직전 보도 자료를 언론사에 뿌렸다. 이는 신문 기사에 그대로 반영됐다. 당시 언론사들은 유공이 배포한 보도 자료를 가지고 그대로 기사화했다. <매일경제> <중앙일보> 등 여러 신문이 이를 다루었다.
<매일경제> 1994년 11월 16일자는 "유공(대표 조규향) 바이오텍 사업팀(팀장 노승권)이 1년 동안 18억 원을 투자해 가습기의 물에 첨가하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완전 살균해주는" 가습기 메이트를 개발했다고 보도하며 "인체 무해"를 제목으로 뽑아 강조했다. 이 신문은 또 "유공 부설 대덕연구소에서 이 살균제를 콜레라균과 포도상구균 등과 내부의 물때를 형성하는 물때균이 들어있는 물에 0.5% 농도로 첨가, 살균력을 실험한 결과 약 3시간 경과 시 99% 정도를, 만 하루가 지났을 때는 100%의 살균력을 나타냈다"고 덧붙였다. 이어 "'가습기 메이트'란 제품명으로 판매될 이 살균제의 효력은 약 15일 이상 지속되며 독성 시험 결과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는 같은 날 이런 내용과 함께 "선진국에도 (가습기) 물때를 제거하는 제품은 있으나 살균용 제품은 없는 점에 착안, 내년 중 북미 지역에 수출키로 했다"라고 보도했다. 유공은 국내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 가습기 살균제 출시를 강조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유공(SK케미칼)의 무모한 용기,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
① '악마의 변호사' 김앤장, 이렇게 움직였다
② 나는 악마와 거래한 '청부 과학자'입니다!
③ 가습기 연쇄 살인범, 환경부 탓에 놓칠 뻔!
④ 가습기 살균제, SK 책임은 없나
⑤ 가습기 연쇄 살인, 일본에서 일어났다면…
⑥ 가습기 연쇄 살인, 왜 한국만 당했나?
⑦ 의사들은 왜 가습기 연쇄 살인을 못 막았나?
⑧ 옥시와 합의를 권한 판사는 누구인가?
⑨ 가습기 살균제, 산자부가 웃는 이유는?
⑩ 또 기레기, "홍수종은 '가습기 의인' 아니다!"
⑪ 폐를 들어낸 국가 대표 배구 선수, 보상은 '0원'
⑫ 검찰, 김앤장-SK-이마트를 살렸다
⑬ <조선일보>, 누구 욕할 처지인가?
⑭ 검찰, 왜 산자부와 환경부는 봐 주나?
⑮ 여배우 불륜 스캔들과 가습기 살균제
미국은 살균제 성분을 가습기 물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제품을 만드는 것 자체를 꿈도 꾸지 않은 반면, 대한민국 기업은 어처구니없는 살인 제품을 만들고선 너무나 용감하게 국내 최초, 세계 최초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 무모한 용기는 세계 최초로 살균제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는 재앙을 불러왔다.
당시 유공은 독성 시험을 했다고 분명 밝혔다. 이는 완벽한 거짓임이 분명하다. 화학 물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유공이 당시 가습기 살균제 성분으로 사용한 화학 물질은 CMIT/MIT로 최근 알려졌다. 이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현재까지만 해도 사망 1명을 포함해 모두 3명이 중증 피해를 입었다고 정부가 공식 등급 판정했다.
이 성분은 미국에서 유독 농약 성분으로 등록돼 있다. 유럽연합(EU)의 소비자안전과학위원회 자료를 보면 실험 생쥐, 실험 쥐. 토끼, 기니피그 등을 대상으로 독성 시험을 한 결과 흡입의 경우 소량으로도 죽을 수 있고 피부, 안구 등에 다양한 독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4년 독성 시험 결과 안전 발표, 실은 거짓말일 가능성 높아
선진국의 이런 독성 시험 자료로 미루어 1994년 유공이 가습기 메이트란 살균제를 시판하면서 독성 시험을 제대로 하지 않고 무해하다고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엉터리 독성 시험을 하고선 마치 독성 시험을 제대로 한 것처럼 속였을 가능성 둘 중 하나임이 분명해졌다. 이는 검찰 수사로 반드시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도 철저한 심문이 필요하다.
유공은 콜레라균에 대한 살균력 테스트도 하였다고 했다. 콜레라는 당시 전파력이 강한 1군 전염병을 일으키는 치명적 병원균이었다. 만약 콜레라 환자가 한 명이라도 생기면 방역 당국은 즉각 비상사태에 들어간다. 집단 발병 가능성이 매우 높은 수인성 전염병균이기 때문이다. 콜레라균은 민간 연구소가 그렇게 쉽게 배양 및 실험할 수 있는 세균이 아니다. 콜레라균에 대해 어떻게 살균력 실험을 했다는 것인지 앞으로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
1994년 유공이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석유 에너지 기업이 이런 가정용 화학 제품까지 손을 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 이후 유공은 해외 유전 탐사에 도전했으나 별 소득이 없어 포기를 하고 만다. 그래서 1980년 석유 에너지 부문은 선경(현 SK)으로 경영권을 넘기게 된다. 유공은 주력 사업을 에너지와 석유 화학 분야로 크게 갈래를 지우고 특히 정밀 화학 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이 때 구조 조정 대상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을 모두 내쫓을 수 없어 각자도생을 꾀하도록 했다. 화학, 생물 전공자로 이루어진 생물공학연구팀이 연구소 설립과 함께 1985년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를 나온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 학위를 갓 취득한 노승권 씨가 연구소에 선임연구원으로 합류한다. 이들은 당시 조직에서 잘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사업 아이디어를 짜냈다고 한다.
생물공학연구팀은 석유를 장기간 보관할 때 곰팡이에 오염되면 석유의 품질이 나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진균제 개발 연구를 1988년 시작했다. 첫 결실은 1990년 해조류에서 곰팡이 제거 물질을 추출해 1993년 '팡이제로'란 상품명으로 내놓는 성과로 나타났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노승권 팀은 1994년 가습기 메이트 가습기용 살균제 개발이라는 두 번째 성과물을 내놓는다.
그 성과는 17년의 세월이 지나 비극의 씨앗으로 바뀌었다. 가습기 살균제에 살균제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물 때 걱정 끝', '청소 끝'이란 생각은 무척 매력적이다. 하지만 세균을 모두 죽일 정도의 강한 살균력이라면 당연히 이것이 공기 중으로 나왔을 때는 사람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문가라면 당연히 해보았을 것이다. 유공의 당시 노승권 팀장은 왜 그런 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최초 개발 당시 시판 반대 목소리도 있었으나 묵살 당해
실은 당시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내부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전성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시판했을 때의 위험과 아직 가습기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아 사업성이 낮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유공이 1993년 '팡이제로'를 시장에 내놓자 몇 달 뒤 LG화학도 경쟁 상품으로 '곰팡이 아웃'을 내놓는다. 유공 쪽이 이를 보고 혹 LG화학이 자신보다 먼저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충분한 독성 시험을 하지 않고 제품 출시를 서둘렀을 가능성이 있다.
유공은 1993년 '소비자용 살균 조성물'에 대한 특허를 신청(등록은 1996년에 이루어짐)했다. 여기에는 CMIT/MIT 계열의 이소티아졸리논 성분 등 외국의 기존 살균제를 에어로졸이나 스프레이 형태의 소비자용 제품으로 만드는 것이 포함돼 있다. 매우 위험한 특허라 할 수 있다.
가습기용 물에 타서 사용하는 가습기 살균제란 아이디어를 유공이 1994년 내놓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이런 제품이 선진국에서처럼 시장에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 나왔다 하더라도 그 시기가 많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제품이 나오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가습기 살균제는 여기저기서 마구 내놓았다.
CMIT/MIT 성분을 특허 때문에 쓸 수 없게 된 다른 기업들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올리고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이란 전혀 다른, 더 강력한 살균력을 지닌 유독 성분을 넣은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 비극이 재앙 수준으로 가는 일등공신 노릇을 '악마의 특허'가 한 것이다.
유공에서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한 주역인 노승권 팀장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이름은 1994년 '유공, 세계 최초 가습기 살균제 개발'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와 <가습기 살균제 건강피해 사건 백서>에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뒤 그가 어떤 일을 해왔고 최근에는 무엇을 하는지는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바이오 벤처 사업가로 변신, 최근 언론 활동 활발
인터넷에서 노승권이란 이름을 치면 그가 1996년 유공을 나와 1997년 바이오 벤처 기업 '유진사이언스'를 창업한 뒤 지금은 메타사이언스 대표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 더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생물공학회 부회장, <미생물과 산업> 편집간사, 한국바이오벤처협회 이사 등을 지내는 등 학술 활동과 기업 경영을 활발하게 병행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네이버 블로그 '출장 발명가의 행복이야기'를 운영하며 재미있는 생물학, 맛과 음식의 과학, 건강 정보 등에 대한 글을 실으며 동시에 <스포츠경향>에는 '출장 발명가 노승권의 알면 힘이 되는 생물학'이라는 칼럼을 맡아 매주 연재하고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지난 4월부터 우리 사회에 엄청난 지진을 일으켰고 그 여진이 남아 있는 가운데 지난 15일자 <스포츠경향> 연재 코너에 '세균과 친해져야 하는 두 가지 새로운 이유'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부정적 이미지로만 인식돼 왔던 세균은 사실 정신 건강 회복, 기억력 유지, 면역기능 향상 등에 긍정적 모습으로 우리 몸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세균을 이용해 스트레스 회복 탄력성을 높이고 기억력 감퇴 같은 퇴행성 질환을 치료하는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해 봅니다.
세균이라는 단어는 우리 머리에 '감염' '위험' '죽음' 같은 부정적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세균과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공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장에 살고 있는 장내 세균은 음식물의 소화, 흡수를 돕고 식욕 조절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면역 기능에도 관여합니다. 그런데 최근 세균이 정신 건강과 기억력 유지에도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런 영향을 주는 미생물에는 장내세균뿐 아니라 환경 미생물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감염, 위험, 죽음 등의 부정적 모습을 소비자들이 떠올리게 만들어 세균은 깡그리 죽여야 한다며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 판매한 주역이 이제 와서는 이보다는 세균의 긍정적 모습을 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병 주고 약주는 격'의 글이다.
그가 과거의 판단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치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언론과 피해자 및 가족 앞에 나서서 당시 유공에서 독성 시험을 제대로 했는지, CMIT/MIT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등에 대해 진솔하게 증언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의 정직한 증언을 토대로 해 유공의 가습기 살균제 사업을 고스란히 인수한 SK케미칼에 대한 추궁과 사법 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2011년부터 피해자 실태와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한 수십 편의 글을 6년째 기고해왔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백서> 총괄편집인을 맡았으며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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