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민간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결과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민사상 배상의 경우 일부 회사 쪽(피고)과 피해자 쪽(원고) 간 화해가 이루어져 회사 쪽이 그 책임을 인정한 사례가 몇 건 있어 소송 중 화해가 아니고 판결까지 가더라도 피해자쪽이 승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과연 회사 쪽에 형사 책임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법률 전문가가 아니어서 이와 관련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는 곤란하지만 먼저 회사가 살균제 성분이 인체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해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상품을 출시했느냐이다. 즉 고의성 여부이다.
이 부분은 내부 고발이나 상품 출시 전 위해성 평가나 독성 평가와 관련한 자료(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 유일한 관련 증거는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 가습기 살균제 성분 PHMG를 수출하면서 제출한 위해성 평가 결과이다.
이 연구 결과는 성분을 미세 분진 형식으로 직접 흡입할 경우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살균제 성분을 물에 타서 이를 미세 수증기 에어로졸 형태로 흡입해 일어났기 때문에 호주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호주 사례를 근거로 회사 쪽의 고의성 내지는 직무 태만성을 다퉈볼 여지가 있다.
만약 회사의 고의성 또는 고의성에 준하는 행위에 의해 가습기 실균제 피해가 일어났다면 가해자기 있기는 하지만 가해자가 배상 능력이 없는 경우(세퓨) 헌법 제30조 "타인의 범죄 행위로 인하여 생명, 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란 조항에 따라 국가의 구조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여기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과연 국가가 책임이 있는가 여부이며 있다면 어디까지 있느냐 하는 문제다. 지금까지 민간이 관련된 인명 피해와 건강 피해와 관련해 국가의 책임을 물은 판결은 없다. 베이비파우더 석면탈크 사건과 환경성 석면 피해, 시멘트 공장 주변 주민들의 건강 피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책임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① '악마의 변호사' 김앤장, 이렇게 움직였다
② 나는 악마와 거래한 '청부 과학자'입니다!
③ 가습기 연쇄 살인범, 환경부 탓에 놓칠 뻔!
④ 가습기 살균제, SK 책임은 없나
우리나라 헌법 34조 6항은 분명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돼있지만 재해가 자연적인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국가 또는 정부(중앙 정부, 지방 정부) 책임을 물은 사례를 매우 드물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우면산 산사태'로 피해 주민들이 서초구 등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와 서울시의 예방 조치 소홀에 의한 인재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매우 좁은 범위에서 기초자치단체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 즉, 위해 예방 조항은 국내 법률 어디에도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았다. 환경부. 보건복지부(식약청), 지식경제부 등 어느 정부 부처와 관련 법률에 관련 조항이 없다. 법률 조항에 가습기 살균제 성분과 같은 경우 사전 흡입 독성을 포함한 독성 시험과 위해성 평가를 거치도록 돼 있었는데도 이를 외면했다면 국가의 책임을 확실히 물을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문제 삼기 어려운 형편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자체를 우리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 성분과 관련한 법률 조항이나 사전 흡입 위해 평가, 흡입 독성 평가 등이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다. 일본의 경우 우리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가습기 살균제(일본의 용어는 멸균제)가 일부 출시돼 팔리고 있으나 대부분 알코올계나 식물 추출액 등이어서 우리의 PHMG, PGH와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곤란하다.
가습기 살균제는 미생물, 특히 세균을 죽이거나 번식을 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화학 성분이다. 항생제와 항균제, 살균, 살충, 살서제와 제초제 등은 BT독소(미생물 성분의 천연 살충제) 등 극히 예외를 제외하곤 다른 생물들에게 일정 악양향을 끼친다는 것이 과학계에서는 상식처럼 통한다.
다시 말해 사람과 동물에 사용하는 항생제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항균제, 항진균제 등은 사람이 피부, 흡입, 구강 등을 통해 인체에 들어올 경우 그 농도에 따라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심하면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상식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기업, 전문가, 정부 모두 이 성분은 상식과는 다른 특수한 물질(인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인 것으로 알고 위해성에 대해 오랫동안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국가의 책임을 면제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상품(제조물) 불량, 식중독 사고, 각종 재난과 사건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그 유해성이 알려진 뒤에도 국가가 예방조치나 관련 제도 정비 등을 소홀히 했다면 이는 분명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지난해 일본 지방법원에 이어 대법원(최고재판소)은 오사카 센난 지역 석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석면 질환 피해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석면의 위해성이 국제적으로 1930년대(석면폐증)와 1960년대(악성중피종 등 석면암)에 이미 알려졌는데도 일본 정부가 1970년대까지 공장 배기 장치 의무화 등 관련 예방 조치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석면 노출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그랬다면 석면 피해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국가 책임이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일본의 석면 판결의 경우도 모든 재판에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재판부에 따라 판결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는 재판부가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국가 책임을 묻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일본의 석면 판결과 살균제라는 것이 지닌 근본적인 위해성 등을 고려해볼 때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2011년부터 피해자 실태와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한 수십 편의 글을 6년째 기고해왔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백서> 총괄편집인을 맡았으며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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