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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를 들어낸 국가 대표 배구 선수, 보상은 '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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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폐를 들어낸 국가 대표 배구 선수, 보상은 '0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 ⑪] 피해 가족의 '헬조선'을 막아라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국민의 관심이 뜨겁다. 검찰이 과연 어느 기업을, 기업의 누구를, 어디까지 수사해 기소할 것인가와 사법부가 어떤 단죄를 내릴 것인가도 물론 큰 관심거리다.

이와 관련해 핵심은 이제 '옥시'가 아니다. 옥시의 단죄는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형국이다. 핵심은 SK케미칼을 비롯한 애경, 롯데 등 대기업과 김앤장 등이다. 이뿐만 아니라 과연 정부에 대해서도 수사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을 것인가도 주요 관전 포인트다.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이참에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기업, 정부, 김앤장 등 이번 사건에 연루된 모두에 대해 일벌백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응징이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 또한 피해자와 사회시민·환경단체 사이에서 상당한 것이 현실이다.

이와는 별도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하며 뇌관 구실을 할 것으로 내가 보는 것이 있다. 폐 이외 질환을 어떤 방식으로 조사, 인정할 것인가와 현재 정부가 피해 구제 대상으로 삼고 있는 1, 2단계가 아닌 3, 4단계 피해자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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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 등급 외 판정자가 매일 흘리는 피눈물 하루빨리 닦아줘야

밀양에 사는 여자 배구 국가 대표 선수 출신 안은주 씨는 2013년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가 주관한 정부의 제1차 가습기 살균제 피해 조사 때 신청을 했으나 2014년 3월 3단계 판정 등급을 통보받았다. 이 때문에 안 씨는 그 어떤 배상이나 구제도 받지 못하고 지내다 지난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친정 식구 등의 도움으로 거액의 수술비를 겨우 마련해 폐 이식을 받고 투병중이다.

안 씨가 받은 통지문에는 귀하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것은 확실하고 폐 판독 사진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폐 손상 환자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음영이 일부 관찰되었지만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 환자의 전형적인 사진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어 3등급, 즉 가능성이 낮음으로 판정했다고 돼 있었다.

안 씨는 밀양에서 어머니배구단과 초등학교 배구 선수 감독을 할 정도로 그동안 몸이 매우 건강했다. 다른 질환을 크게 앓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안 씨는 자신이 앓았던 폐 질환이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관련성이 있다는 판정 결과를 나올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 뒤 재심을 신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고 한다.

안 씨처럼 3단계 판정(가능성 낮음)을 받거나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부의 판정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3단계 판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호흡기 질환을 비롯해 다른 질환을 앓고 있던 중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숨지거나 피해를 당했다.

이들은 또 가습기 살균제 피해 가능성이 낮다고 하면 다른 원인, 예를 들면 세균성 폐렴이라거나 결핵 등 다른 질병이 원인이라고 해주어야 승복할 텐데 이런 언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간단하게 몇 줄로,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말로 가능성 낮음 단계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1, 2차 판정 때 구상권 행사 100% 자신 있는 피해자만 인정

정부의 1, 2차 조사, 판정 때는 나중에 기업들을 대상으로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구제금(의료비 및 장의비)에 대해 정부가 구상권을 행사해 100% 돌려받을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 1, 2등급 판정을 했다고 조사판정위원회에 참석한 한 위원은 전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3, 4등급 가운데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 노출로 인한 폐 손상 피해자가 있을 수 있으나 나중에 소송 때 기업 쪽이 조금이라도 딴죽을 걸어올 소지가 있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1, 2등급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정부의 책임이 큰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혹 가해 기업한테 구상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와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정부는 1, 2차 조사 판정 때 이를 외면한 것이다. 이 때문에 3, 4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 신고자들은 울분을 마구 토해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처럼 환경병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 사건이 있다. 1988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민국 최대의 직업병 사건인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집단 발병이다.

작업장에서 이황화탄소에 노출돼 신경 중독으로 팔다리가 마비되고 말을 못하는 노동자의 사례는 핀란드, 스웨덴 등 유럽에서 고무 제조 노동자에게서 이미 1940~50년대에 많이 발생했다. 원진레이온에 인견사 방사기 등을 팔아먹은 도레이 등 일본의 인견사 공장들에서도 1950~60년대 많은 노동자들이 이미 끔찍한 직업병에 걸린 바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이황화탄소 직업병 인정 기준을 토대로 1987년 원진레이온 공장 노동자 4명을 처음으로 이황화탄소 중독증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원진레이온 사건은 단일 공장에서 일어난 세계 최대의 이황화탄소 중독증에 걸맞게 외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신체 증상이나 사례들이 속속 쏟아져 나왔다.

노동부는 1991년 이황화탄소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을 1차 개정했다. 1987년 이전에는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작업 환경 측정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어떤 노동자가 어느 정도 유독 가스에 노출됐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직업병을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인정 기준 완화를 통해 터주었다. 만성 중독 인정 기준도 마련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 기준 확대의 역사에서 얻는 해결 지혜

하지만 이런 개선에도 불구하고 피해 판정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속출했다. 1991년 숨진 퇴직 노동자 김봉환 씨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직업병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숨진 김 씨의 주검을 회사 정문 앞에 둔 채 장기농성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주검 투쟁'이 벌어졌다.

그 성과물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김정순 교수가 주관하는 대규모 역학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 현직 근로자 1370명과 사외(社外) 대조군 182명 등 모두 155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검진이 이루어졌다. 김 교수 팀이 낸 최종 보고서를 토대로 1993년 5월 이황화탄소 만성 중독 인정 기준이 마련됐다.

그 덕분에 많은 전, 현직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직업병 인정을 받았다. 200여 명에 불과하던 이황화탄소 직업병 환자들이 1000명 가까이로 늘어나 대한민국 산업보건사에 우뚝 서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검찰 수사로 국민의 관심사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쏠리자 환경부는 뒤늦게 폐 이외 질환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이 조사 판정 기준을 제시해줄 경우 3, 4 등급자를 포함해 개별 피해 판정을 거쳐 추가 지원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환경보건학자, 임상 의사, 역학 전문가, 독성 전문가, 산업의학전문의 등 8명으로 폐 이외 질환 검토위원회를 꾸려 최근 몇 차례 회의를 했다.

최근 많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피해 신고를 환경부에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폐 손상 피해만을 대상으로 판정을 하고 있다. 같은 사람에 대해 피해 판정을 두 번씩, 세 번씩 하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가습기 살균제 피해 인정 확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이 맡아 할 성격은 결코 아니다. 한국역학회와 같은 전문 연구 단체에 맡겨 많은 전문가들이 집중도를 높여 역학 조사를 벌여야만 가능하고 연구 결과에 따른 시비를 잠재울 수 있다. 그래야만 올해 안으로 새로운 기준에 따라 조사, 판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사, 판정은 물론 정확하고 엄격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정 판정을 받는데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누락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파렴치한 기업과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탓에 아이를, 아내를, 부모를, 형제자매를 잃은 가습기 피해자 가족들이 '헬조선'을 생각하지 않도록.
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2011년부터 피해자 실태와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한 수십 편의 글을 6년째 기고해왔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백서> 총괄편집인을 맡았으며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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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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