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 배상을 묻는 소송을 제기해 이루어진 1심 재판에서 사법부는 정부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나온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 항소심 등 상급심에서는 반드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의 책임이 있다면 어떤 부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물어야 할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입장에 따라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부처가 다를 수 있다. 신의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그 경중을 가려 물어야 한다. 뭉뚱그려 정부에 책임 있다고 하면 문제의 핵심을 흐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책임이 거론된 부처는 (1) 산업통상자원부(국가기술표준원), (2) 환경부(국립환경과학원), (3)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 (4)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느 부처가 이번 사건에 가장 무거운 책임을 통감해야만 할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답은 1번이다.
검찰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 수사 이후 언론의 폭발적 보도와 뜨거운 관심이 모아진 지난 4월 이후 정부의 책임과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환경부와 보건복지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 언론은 경마장에서 말이 달리고 있는 것을 그냥 따라가며 중계 방송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도하는 이른바 경마 저널리즘에 익숙하다. 이 때문에 신문과 방송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며 난타를 당하는 것은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고 1차 피해 신고자 판정을 한 질병관리본부와 2차 피해자 판정에 이어 3차 피해자 조사, 판정을 벌이고 있는 환경부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
① '악마의 변호사' 김앤장, 이렇게 움직였다
② 나는 악마와 거래한 '청부 과학자'입니다!
③ 가습기 연쇄 살인범, 환경부 탓에 놓칠 뻔!
④ 가습기 살균제, SK 책임은 없나
⑤ 가습기 연쇄 살인, 일본에서 일어났다면…
⑥ 가습기 연쇄 살인, 왜 한국만 당했나?
⑦ 의사들은 왜 가습기 연쇄 살인을 못 막았나?
⑧ 옥시와 합의를 권한 판사는 누구인가?
산자부는 언론 편집·보도국의 경제부 소관이어서 비판 칼날 피해
특히 경제부, 정치부, 사회부 등 각 분야별로 나뉘어 기자 조직을 갖추고 있는 우리 언론 환경 탓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거의 전적으로 검찰과 환경부, 사건팀 등 사회부가 맡고 있다. 경제부는 쏙 빠져 있다. 그 덕분에 이번 사건이 일어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부처가 산업통상자원부임에도 비판의 칼날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독성학자, 화학자 등 이번 사건에 깊이 관여하거나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는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산업자원부가 이번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라고 가리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원인 미상 폐 손상의 범인이 가습기 살균제임을 밝혀내는데 힘을 보탠 독성학자 이종현 박사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산업자원부(기술표준원)의 무능과 무책임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언론이 이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아 국민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문제점에 관해 언론 인터뷰나 신문 칼럼 기고 등을 통해 활발하게 시민과 소통하고 있는 서강대학교 이덕환 교수(화학과)는 "산업부가 세정제라고 제품 허가를 내준 가습기 살균제에는 그 어떤 세정(세척) 성분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일부 제품(코스트코 전용 판매 제품 가습기클린을 가리킴)에는 안전을 인증해주는 국가 인증(KC) 마크까지 붙여주었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살인 생활 용품이 버젓이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하게 산업부의 무능과 무책임 탓"이라며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책임을 산자부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자부 책임을 점수로 매기면 99점
가장 큰 책임이 산자부에 있으면서도 현재 가습기 살균제 문제와 관련해 직접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판의 대상에서 한발 비껴나 있다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감사원 감사나 검찰 수사에서도 살인 생활 용품의 허가, 유통 과정에서 산자부의 책임 방기나 직무유기 등이 없었는지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 또한 언론과 환경 시민 단체 등도 산자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보다 더 집중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거론되는 부처는 환경부다. 환경부는 2011년 사건이 불거진 뒤 매우 실망스럽고 무능한 대응과 해결 태도 때문에 집중 포화를 받고 있다. 하지만 사건의 발생과 관련해서도 매우 큰 잘못이 있다. 환경부는 유해 화학 물질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부처다. 2001년 가습기 살균제 제품에 사용한 성분이 유독성의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으로 바뀔 때도 아무런 감시를 하지 않았다. 2002년에는 염화에톡시에틸렌구아니딘(PGH)이 유독물이 아니라는 황당한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이 성분이 버젓이 가습기 살균제에 쓰이는데 일조를 했다.
보건복지부는 산하 질병관리본부가 2011년 이전에 좀 더 일찍 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질본은 2011년 문제가 될 수 있는 질병의 범위를 폐 섬유화가 동반되는 특이성 간질성 폐렴으로 한정하고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판정 대상에서 제외해 결과적으로 원료 제조업체 SK케미칼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모기약, 파리약 등 살충제와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살균제들은 식약처(식약청)가 의약외품으로 관리하고 있다. 현재 가습기 살균제도 사건이 불거진 뒤 식약처가 의약외품으로 관리하고 있다. 애초부터 식약처가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제품이 시중에 나돌 때 공산품이 아닌 의약외품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더라면 집단 사망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이밖에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져 나온 뒤 국회에서 제정하려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법에 집요하게 반대한 기획재정부와 2012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기업과 정부에 대해 형사 고발했음에도 이를 미적거리며 4년 가까운 시간을 끈 검찰, 그런 검찰에 대해 업무 관장을 제대로 하지 않은 법무부 등도 나름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지금까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발생과 발생 후 대응과 관련해 정부 부처 가운데 어느 부처가 책임이 큰가를 살펴보았다. 이를 점수로 매겨보면 어떨까? 필자가 매긴 점수는 다음과 같다. 점수가 높을수록 책임이 크다.
(1) 산자부=99점 (2) 환경부=80점 (3) 보건복지부=50점 (4) 식약처=20점.
이러한 점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정부 책임 또한 기업 못지않게 크다는 점에는 서로 다른 의견이 없을 듯싶다. 이제 정부의 책임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행동에 나서야할 때이다.
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2011년부터 피해자 실태와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한 수십 편의 글을 6년째 기고해왔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백서> 총괄편집인을 맡았으며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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