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MBN은 '신문 브리핑'에서 아침부터 30분 넘게 이 이야기로 도배하다시피 방송했다. 여성지, 공중파, 종합 편성 채널 가리지 않고 홍상수 감독의 아내와 김민희 씨의 어머니까지 등장시켜 이 소식의 파장을 중계 방송하듯 전하고 있다. 일부 종편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 이야기를 다룬다.
열흘 전에는 인기 가수이자 배우인 한류 스타 박유천의 '성범죄 스캔들'에 한껏 초점을 맞추던 것이 지난 21일부터는 홍상수-김민희 스캔들로 옮겨간 듯한 모양새다. 물론 아직 박유천 관련 보도도 열흘 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 언론인은 인기 연예인의 신변 취재 보도로 바쁘다. 성 관련 스캔들에 관심 없는 국민조차 거기에 빠지게 만들 정도다.
박유천 스캔들로 떠들썩할 즈음부터 가습기 살균제 참사 보도가 시들해졌다. 극히 일부 언론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연속 집중 보도로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언론에서는 이제 단신조차 보기 어렵다. 한 달 전만 해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환경 시민 소비자 단체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모임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시위를 하면 사진 영상 기자들은 좋은 사진 구도를 위해 자리다툼까지 했다. 이제는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든 추억이 됐다.
뉴스 보도 가치의 기준은 언론사마다 다르지만 관통하는 흐름이 그래도 있다. 독자와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것도 물론 한 요소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과 생명에 관한 것이다. 뉴스는 단발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같이 100년이 지나도 역사에 남을 사건은 하루 이틀 또는 한두 달 반짝하고 다루고 나서 역사의 뒤안길로 처박을 성격이 결코 아니다.
우리 언론은 '그때 틀렸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2011년 8월 말 그 윤곽이 드러나고 그해 11월 가습기 살균제 판매 중단 조처를 내리자 언론은 반짝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 뒤 사망자 등 피해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들과 그 가족 그리고 환경보건시민센터 같은 일부 환경 단체가 피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부르대며 시위를 벌여도 대부분의 언론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잠자던 언론 깨운 검찰, 수사 끝나면 다시 겨울잠 자나
① '악마의 변호사' 김앤장, 이렇게 움직였다
② 나는 악마와 거래한 '청부 과학자'입니다!
③ 가습기 연쇄 살인범, 환경부 탓에 놓칠 뻔!
④ 가습기 살균제, SK 책임은 없나
⑤ 가습기 연쇄 살인, 일본에서 일어났다면…
⑥ 가습기 연쇄 살인, 왜 한국만 당했나?
⑦ 의사들은 왜 가습기 연쇄 살인을 못 막았나?
⑧ 옥시와 합의를 권한 판사는 누구인가?
⑨ 가습기 살균제, 산자부가 웃는 이유는?
⑩ 또 기레기, "홍수종은 '가습기 의인' 아니다!"
⑪ 폐를 들어낸 국가 대표 배구 선수, 보상은 '0원'
⑫ 검찰, 김앤장-SK-이마트를 살렸다
⑬ <조선일보>, 누구 욕할 처지인가?
⑭ 검찰, 왜 산자부와 환경부는 봐 주나?
2012년 3월부터 언론인은 <프레시안> <경향신문> <베이비뉴스>를 제외하곤 오랜 겨울잠을 자는 반달가슴곰보다 더 깊은 잠에 빠졌다. 심지어 대표 진보 언론이라는 <한겨레>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깊은 잠에서 이들을 깨운 것은 검찰이었다.
검찰이 특별 수사 팀까지 꾸려 김앤장과 옥시 그리고 서울대학교, 호서대학교 등 대학교수 간의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관련 은폐 기도와 청부 연구 의혹을 밝혀내고 옥시 등 가해 기업들의 전직 대표와 연구소 관계자들을 차례로 불러 이들을 구속 기소하는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자 그때야 앞다퉈 치열한 속보 및 특종, 단독 보도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역시 대다수 언론은 검찰이 던져주는 떡을 받아먹는 보도에 그쳤다. 아니면 방송 심층프로그램이나 <프레시안> 등이 일찍이 1~4년 전 수십 차례 보도한 내용, 즉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 정부의 피해자 조사와 피해 배상 지연 등 새로운 뉴스가 아닌 것을 뒤늦게 조명했다. 하기야 과거 3~4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언론사와 언론인으로서는 그런 내용이 처음 보고 처음 듣는 듯했을 터이다.
어쨌든 그런 보도라도 자주 많이 하니 무원고립 처지에 있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원군만마를 만난 듯 반가웠다. 4년간 있었던 언론의 무관심에 분노했던 그들의 마음속 응어리가 모두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잠시 언론에 대해 신뢰를 보내고 박수를 보내던 피해자와 가족들은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 뉴스가 최근 지면, 화면에서 사라지자 깊숙이 숨겨두었던 분노를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보도를 뉴스 질적 가치는 제외하곤 기사량만 살펴보더라도 언론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언론 보도를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3월부터 슬슬 몸풀기를 시작한 언론은 4월부터 출발선에서 뛰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본격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5월 말께 반환점을 돌고부터는 속도를 늦추고 골인 지점에 거의 이른 듯한 자세로 달리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같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은 하프코스나 풀코스 마라톤이 결코 아니다. 울트라 마라톤이다. 이런 사건은 달리는 마라토너를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뒤따라가며 카메라를 들이대 중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중계는 중계대로 하면서 마라토너의 고된 훈련과 밤새며 달려야만 하는 울트라 마라톤의 의의, 울트라 마라톤의 미래에 대해 시청자와 독자에게 낱낱이 알려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보도의 핵심은 끈기다. 지금 우리 언론은 끈기가 부족하다. 한두 달 보도로 그칠 성격이 결코 아니다. 1년이고 2년이고, 10년이고 100년이고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사건이다.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미나마타 사건, 보팔 참사, 체르노빌 사건은 아직도 줄기차게 조명을 받고 있지 않은가.
탈리도마이드 기형아 사건의 경우 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1961년에는 관련 논문과 책이 몇 편에 불과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해마다 70~180편씩 제법 눈에 많이 띄다가 1970~90년대에는 연간 20~50편으로 푹 줄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 관련 문헌이 급증했다. 2000년 200개를 시작으로 치솟기 시작해 2004년 330개, 2008년 420개, 2010년 590개로 최근에 올수록 크게 늘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는 것이다.
검찰 기삿감만 받아먹지 말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역사성을 보라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고 불러도 결코 손색이 없는 사건이다. 물론 아직 이 사건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를 과장이라고 여기거나 잘못된 비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조명을 받듯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조명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실과 역사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4년간 이 문제를 홀대해왔다. 검찰 수사를 계기로 언론이 이제 이 사건의 본 모습을 이해했나 싶었다. 요즘 보도 경향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언론은 검찰이 던져주는 낚싯밥만 받아먹지 말고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뉴스 가치가 있는 사안은 사방에 널려 있다. 정부의 책임과 살균제 제조 업체에 대한 수사, 김앤장에 대한 수사 등등 너무나 많다.
검찰이 주는 기삿감만 받아먹으면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가 될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와 재판 과정, 결과만 보도하게 되면 그 또한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가 될 것이다. 우리 언론이 '그때 틀렸다'는 것은 이미 역사의 사실이 됐다. 하지만 자신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적어도 '지금은 맞다'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여론 형성과 사회 감시견과 같은 언론 최고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유명 감독과 유명 여배우 간 말초적이며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스캔들, 한류 스타의 성 추문만 붙잡고 호들갑을 떠는 한 우리 언론은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렸다'란 비아냥거림을 받게 될 것이다.
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진 2011년부터 피해자 실태와 사건의 원인 등에 대한 수십 편의 글을 6년째 기고해왔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백서> 총괄편집인을 맡았으며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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