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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덕분에 민주화 이룩? 해괴망측한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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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덕분에 민주화 이룩? 해괴망측한 궤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1> 경제 개발, 열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관계는 학계는 물론이고 신문 칼럼 등에서도 심심찮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 '경제 성장->중산층 창출 및 확산->민주화'라는 주장을 도식처럼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런 도식 자체가 역사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방향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킨 덕분에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예전에 유력 수구 언론이 게재한 어느 칼럼의 필자도 이런 논리를 편 적이 있다. 한때 급진적인 운동권이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그 칼럼 필자는 "박정희 시대는 '민주화의 암흑기'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 조성기'였다"고 주장했다. "경제 발전을 통해 중산층이 두꺼워지고 도시화가 진전되어야 경제적 자유에 대한 욕구가 상승해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데, 박정희 집권기에 바로 그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결과로 나타난 몇몇 수치에만 주목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은 점, 경제 관련 수치가 나아진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 칼럼 필자는 "권위주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인권 유린마저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위험한 논리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위험한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이 문제의 칼럼 필자만이 아니라는 점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아울러 그 논리대로라면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세력 역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해괴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전두환 집권 중후반기에 국제적인 여건이 변하면서 3저 호황을 누린 결과 경제 관련 수치가 호전됐다는 것에 주목해 '경제 성장->중산층 창출 및 확산->민주화' 도식을 적용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박정희 독재로 경제가 발전해 민주화가 가능하게 됐다는 주장은 개발 독재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극단적으로 반공, 반북 캠페인을 벌였던 유신 체제 하에서 경제 발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통일의 길이 열렸다거나 전두환·노태우의 민주화 의지가 1987년 6.29선언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처럼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억설이고 궤변이고 견강부회의 억지 주장이다. (관련 기사 :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6월항쟁 탈취' 사건)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은 개발 독재론 비판과 닿아 있다.

해방 후 한국인은 어떤 면에서는, 또 어느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 예컨대 정권 차원의 간섭, 탄압, 부정 선거 같은 식으로 이승만 정권이 선거에 깊숙이 개입하기 이전에 치러진 1948년 5.10선거, 1950년 5.30선거는 그 이후 선거와 비교하면 별다른 부정 선거가 발견되지 않고 유권자의 정치 의식이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된 선거였다. 그래서 우리 제헌 국회가 그렇게 수준 낮은 국회가 아니었고 2대 국회는 상당히 수준 높은 국회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부정 선거를 많이 치르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그전에 이미 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할 능력도 한국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걸 다 보여준 것이다.

박정희 독재로 경제가 발전해 민주화가 가능하게 됐다는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설이고 궤변인지는 1963년에서 1972년, 그러니까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룰이 큰 틀에서 지켜졌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도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이 시기 민주주의가 오늘날 이명박·박근혜 정권보다 뒤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얘기할 만한 구체적인 게 별로 없지 않나. 그와 비슷한 것이다. 뉴라이트들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유신 체제의 박정희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점도 개발 독재론자들하고 비슷한데, 참 신기한 일이다.

난 이것(유신 쿠데타 이전과 이후)은 구별해서 봐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런 주장이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1963년에서 1972년에는 민주주의 룰이 지켜졌고 그 점은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하고 질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민주주의의 기본적 룰이라고 할까, 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유린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개인의 권력 욕구로 1인 유신 체제를 만든 것 아닌가. 유신 체제는 박정희만의 체제였다. 그야말로 박정희만의 유일 체제였다. 박정희 말고는 아무도 유신 체제의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전두환 신군부 체제는 그런 유신 체제를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변형한 것이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박정희 독재로 경제가 발전해 민주화 이룩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인 이유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중 유신 체제로 한정해서 보면 어떠한가.

서중석 : 유신 체제가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느냐. 그동안 내가 유신 체제 시기 경제 발전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여러 가지로 설명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사실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 중에도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은 소수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담화문을 읽어봐도 그런 내용이 안 나온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까지만 하고, 그러니까 1975년까지만 집권하고 김종필이든 김대중이든 다른 사람이 1975년에 집권해 정책을 폈더라면 박정희 정권에서 좋은 면은 계승하고 중화학 공업도 발전시켰을 것이고 그러면서 잘못된 것은 수정하면서 더 바람직한 경제 발전상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면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면은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 신군부 체제에 협력한 자들, 그 밑에서 권력이나 부를 챙긴 자들, 이자들은 지금도 민주주의, 인권, 자유 이런 것과 상당히 대립적인 행동을 많이 하고 있지 않나. 1987년 6월항쟁으로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인정했지만 유신 체제 같은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도, 박정희 독재로 경제 발전이 이뤄져 민주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정말 이상하다. 그러면 왜 지금이라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하려고 적극 노력하지 않나? 왜 인권이나 언론 자유 같은 것을 중시하지 않나?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기 이전의 한국 상황을 보면 당시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유지, 발전시킬 수 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 수준을 갖췄다는 증거를 1963년에서 1972년의 어떤 것에서도 찾아낼 수 없다.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박정희 대통령도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9년 10.26이 난 후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많은 고위 군인들이건, 물론 전두환 신군부 쪽은 다르지만, 최규하 정부건 유신 체제는 한 사람한테만 맞는 옷이니까 이제 바꾸겠다고, 민주화 쪽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화로 간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 시기에 경제가 나쁘지 않았나. 그야말로 어불성설인데, 1980년 서울의 봄을 뺏은 자들, 쿠데타로 다시 민주주의를 뺏은 자들이 누구인가. 이런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1970∼1980년대 비판 이론의 쇠퇴, 그리고 진보 세력이 성찰해야 할 대목

프레시안 :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1990년대 중후반에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났다. 그 후 일부 진보 인사들이 박정희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진보 세력의 한 저명인사는 "독재만 하고 경제 성장을 못 이룬 독재자가 많다는 점에서, 또 한국에서와 같은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주식회사 한국'의 CEO 박정희의 공을 인정해주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일부 진보 인사들의 이러한 태도 변화가 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과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진보 성향 인사들 중 적잖은 이들이 이 문제와 관련해 길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런 현상은 1970∼1980년대의 비판 이론(민족 경제론, 종속 이론, 마르크스주의 등)이 한국 사회에서 힘을 잃은 것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방식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고 결국은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 같은 의문이 커진 것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 와중에 중진 자본주의론, 식민지 근대화론 등이 퍼지고 뉴라이트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생겼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과거 박정희 경제에 대한 비판 세력의 논리가 설득력이 약해진 것이 뉴라이트가 기승을 부리는 데 일조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뉴라이트나 수구 냉전 세력이 1980년대 이후 현대사 연구 진전에 크게 불만을 품고 불안감을 느껴서 나름대로 근현대사에서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낸 데 비해, 진보 세력은 현대사 인식이 1980년대 수준에서 별반 나아진 것이 없고 공부를 하지 않고 무사안일로 지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뉴라이트 논리가 일부 일반 대중한테 먹혀들어갈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게 더 심각한 현상이다.

박정희 경제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비판은 종속론에서 나왔다. 매판 자본을 비판하고 해외 자본에 예속되는 것을 견제하는 주장은 한일 회담 반대 투쟁 때부터 나왔다. 그 후 유신 체제 중후반기에 중화학 공업화가 이뤄지면서 자본 시장, 기술 측면에서 해외 의존도가 급속히 심화되자 중남미 연구자 및 이집트 등 아랍·아프리카 연구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던 종속론을 한국 현실과 연결해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독점 자본이 국내 시장과 산업 관련성이 약하고 대외적인 예속성이 대단히 강해 몇몇 재벌에 경제력이 극도로 집중되고 독과점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그와 함께 산업 내부에서 중층적 분업을 갖게 하는 중소기업이 몹시 취약한 것에 대해, 이러한 종속론은 적절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 구조 전반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것도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고 본다. 정윤형·전철환 교수 같은 분들이 실물 경제에 밝았다는 점도 종속론 주장의 강점이었다.

그런데 속류 종속론자들은 경제의 종속성이나 자본가의 매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민족 경제나 내포적 경제 발전을 강조했고, 민족 경제나 내포적 경제 발전에 대해서도 세계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편협하게 해석했다. 문제는 이런 속류 종속론이 한때 강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해근 교수 등이 큰 틀에서는 종속론을 원용하면서도 한국의 현실은 중남미 등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고 지적한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내 생각에 한국은 중남미와 크게 다르다. 난 종속론이 제기될 때부터, 우리는 중남미와 여러모로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종속론과 연결해 많이 이야기한 것이 중남미 경제가 미국, 그 이전엔 영국이 될 텐데, 어쨌건 그런 데에 종속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 중 하나는 직접 투자, 그러니까 미국인을 가리키는 양키라든가 다른 자본가들이 이 지역에 직접 투자를 많이 한 것이었다. 지하자원 개발, 커피 농장이나 과일 농장 같은 농작물 부문, 제조업, 서비스업 이런 데에 투자를 많이 했다. 중미에 있는 조그마하고 힘없는 나라들의 경우 미국인 과일 농장 주인이 대통령도 마음대로 갈아 치운 역사까지 있지 않나.

이와 달리 한국은 직접 투자할 대상이 별로 없는 나라였다. 지하자원이나 농작물에 투자할 것도 별로 없었고,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투자하는 것도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대개 차관으로 많이 들어왔고, 직접 투자 액수는 얼마 안 됐다. 박정희 정부는 물론 그 이후 정부도 직접 투자를 많이 장려했지만, 오랫동안 그 액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외국인들이 왜 직접 투자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직접 투자를 하기에는 한국을 너무 모른다는 것도 작용했다. 한국인들의 특성 같은 것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걸 잘 몰랐던 점도 있었다. 하여튼 종속론과 관련 있는 것이 직접 투자 부분인데, 한국과 중남미는 이 문제에서 여러모로 달랐다.

그리고 한국은 역사, 문화, 환경이 중남미하고 아주 다르다. 멕시코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많이 놀랐다. 브라질이라든가 아르헨티나 같은 그 지역의 여러 나라를 보면서도 또 놀랐다. 그 지방 주민들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이쪽 사람들하고 기질이 다르다.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하고도 다르다고들 하지 않나. 서양 사람들이 일본 사람, 한국 사람에 대해 '저 사람들은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 아니냐. 일을 위해 사는 건지, 아니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건지 도대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그런데 중남미는 그것하고 또 다르다. 인생을 즐기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으로, 우리처럼 뼈 빠지게 일한다는 관념하고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이건 역사, 문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남미에선 한국과 달리 토지 개혁이 안 됐다. 또 한국인은 교육 수준이 높고 근면하고 성취욕이 강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평준화가 돼 있다는 점도 달랐다. 그와 함께 전후 미국에게 있어 한국과 대만은 소련과 중국을 막는 반공의 보루, 최전선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미국이 볼 때는 자원 문제와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해를 넘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한다. 이 지역에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 이건 미국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거기다 베트남전쟁까지 있지 않았나.

종속론에서 설득력 있는 부분을 앞에서 얘기했는데, 몇몇 재벌한테 국가의 운명을 맡긴다는 건 정말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러 종속론 경제학자들이 전개했던 큰 줄기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고,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회구성체론이 남긴 것

프레시안 : 종속론 이외의 다른 조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다른 조류들 중에서도 특히 사회구성체론은 1980년대 중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서중석 : 종속론과도 관계가 있고 사회구성체론과도 관련이 있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영향도 받고 그랬다. 일부에서 이 주장을 했는데, 이것은 한국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하위 경제 체제로 봤지만 구체성이 결여돼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가 막연했다. 그 때문에 그랬겠지만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문제는 사회구성체론에 크게 있었다고 난 본다. 1984∼1985년경에 종속론을 주장하던 이들 중 일부 학자들이 사회구성체를 제기하자마자 이게 순식간에 한국 사회를 풍미했다. 학계를 뛰어넘어 운동권으로 퍼진 것이다. 1985년 2.12총선 이후 운동권이 크게 활성화되는데, 1986년에는 NL-PD로 운동권이 나뉘지 않나. 학생 운동권뿐만 아니라 다른 부문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여기에 사회구성체론이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큰 틀에서 보면) 사회구성체론도 두 개로 나뉘었다. 1930년대에 일본 강좌파-노농파 논쟁에서 한국인 학자들이 큰 영향을 받은 것처럼, 사회구성체론이 시작되는 데에도 일본인 학자들의 영향이 컸다. 이 논리는 극도의 추상성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극단의 추상성이 한국인의 기질에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되는 측면도 있다. (농업의 지주-소작 관계를 강좌파는 '반(半)봉건적 생산관계'로 여긴 것에 반해 노농파는 '자본제적 관계'로 분석했다. '편집자')

사회구성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4월혁명이건 유신 체제건 1980년 5.17쿠데타건 모두 국가독점자본주의 같은 것으로 설명했다. 사회 성격도, 역사적 사건도 그러한 자본 논리로 그 당시에 설명했다. 그래서 각 사회의 차별성, 역사적 사건의 차별성 같은 것을 느끼기가 힘들다. 다 국가독점자본주의 같은 것에 의해 그렇게 이뤄져 있다는 식의 설명인데, 분명히 차별성이 있는데도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에는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설득력이 없다. 그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경제 결정론이었다.

프레시안 : 한국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던 이들에게 사회구성체론이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

서중석 : 구체성이 극도로 빈약한 것이 사회구성체론의 제일 큰 특징이었다. 당시는 일제 시기 연구도 빈약했지만 특히 해방 후 현대사는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때다. 본격적인 연구가 막 시작될 무렵 이 사회구성체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구체성이 결여된 채 추상적으로만 설명했다. 이 당시 국가에 관한 규정도 미국인 학자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도입했다.

운동권이 PD, NL로 갈리고 사회구성체론도 큰 틀에서 두 편으로 갈렸는데, 그때 내가 어떤 후배와 상당히 오랫동안 논쟁을 하면서 '참 신기하고 재미나다', 그런 점을 느꼈다. 그 후배는 신식민지 반봉건 국가독점자본주의 주장을 펴더라. 그 근거로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에 소작농이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소작농이 일제 시기의 소작농하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도, 이 후배한테 먹혀들지 않았다. 상대방이나 일반 국민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려는 것이더라.

결국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고 운동권도 약해지면서 사회구성체론은 어느 논리보다도 맥없이 사라졌다. 문제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운동권에 아주 큰 어려움을 던져줬다는 점이다. 운동권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아주 피폐해졌고 허탈감이라고 할까, 무력감 같은 걸 갖게 됐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운동권에서 열려고 하지 않는 여건을 조성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아흔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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