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박정희 집권기를 말할 때 '지긋지긋하던 보릿고개가 그 시절에 사라졌다'고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서중석 : 서민들, 농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칭찬할 때 빠짐없이 이야기하는 게 식량 문제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굶주리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중화학 공업 국가에서 굶주림을 이야기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정말 기이하지 않나.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는 믿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우리가 1970년대 중반에 그렇게 됐다', 이렇게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게 됐는가, 왜 우리가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하게 됐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하고 몇 나라가 20세기의 어느 한 시점부터 유난히 굶주리게 됐다. 한국인들이 만날 굶주린 것이 아니다. 한말 또는 일제 초기라고 해서 그렇게 굶주린 건 아니다. 한국인들이 아주 심한 굶주림을 맛보게 되는 건 일제 통치 후기에 해당한다.
생활이 극히 궁박한 상태이지만 우선 연명은 할 수 있는 사람인 세민(細民)이 1926년에 186만 명이었던 것으로 일제가 통계를 냈다. 전체 한반도 거주민의 9.7퍼센트였다. 그리고 긴급 구제를 요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인 궁민(窮民)이 이 시기에 25만9000여 명으로 1.5퍼센트였고, 걸인은 2만여 명으로 일제가 통계를 잡았다. 일제는 통계 하나는 열심히 냈다. 그런데 대공황이 발발한 직후인 1930∼1931년 그때부터 한국인이 지독하게 못 먹게 된다. 1931년에 세민이 무려 420여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7퍼센트나 된다. 다섯 명 중 한 명이었다는 말이다. 굉장한 것이다. 궁민은 105만 명으로 5.1퍼센트였다. 걸인도 급증했다. 16만4000명이었다. 그러니까 극빈층이 543만 명, 26.7퍼센트나 됐다. 그전 조선 왕조 시대에는 아마도 굉장한 흉작, 가뭄 같은 것이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통계도 이런 현상을 뒷받침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낸 자료를 보면 한국인이 1910년대보다 놀랍게도 1930년대 이후에 더 곡식을 못 먹은 것으로 나온다. 1912∼1916년에 1인당 1년 쌀 소비량이 평균 0.7188석이었는데 1922∼1926년에는 0.5871석, 1932∼1936년에는 0.401석이 된다. 대폭 줄었다. 물론 다른 곡물을 가지고 보충하기는 한다. 그래서 1930년대에는 만주 좁쌀이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던 사람들은 콩깻묵이라는 것도 먹고 그랬다. 일제 말엔 별의별 것을 다 먹었다. 그야말로 굶주림이라는 게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봄이 되면 초근목피라도 캐먹으려는 모습이 특히 1930년대 이후 크게 증가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이 남부여대해서 만주로 많이 간다. 품 팔러 일본으로 도항하는 인원도 1930년대에 엄청나게 늘어난다.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전엔 비밀 도항했지만 1930년대에는 허가도 해주지 않나. 이런 일이 왜 일어났겠나. 못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주로 남부여대한 것이나 일본으로 이동해 노동자가 된 것이나 다 그런 것이다. 일제 말엔 전시 상황에서 얼마나 어려웠나. 이처럼 한국인이 일제 때 항상 굶주린 게 아니고, 오히려 일제가 경제를 발전시킨 1930년대 그리고 일제 말에 오면서 이렇게 한국 경제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일제 말 굶주림에 시달린 한국인들, 해방 후에도 식량난과 전쟁으로 고통
프레시안 : 1930년대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일제에 의한 공업화를 강조하며 주목하는 시기다. 그 시기에 정작 피지배층이던 다수의 한국인은 더 팍팍한 생활을 해야 했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근거 중 하나다.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넓게 조망하기보다는 일부 통계 수치에 지나치게 방점을 찍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가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일제 말 전시 체제에서는 벗어나지만 한국인들은 곧 만만찮은 경제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다.
서중석 : 해방은 엄청난 식량난을 불러왔다. 해방 직후 남쪽은 풍년이 들고 북쪽은 흉년이 들었는데, 남쪽의 경우 미국이 뭘 잘 모르고 자유 경제를 실시해버렸다. 그러니까 모리꾼들이 매점매석을 해버렸다. 일제 때 '야미쌀'(암거래로 유통되던 쌀) 문제가 아주 심했는데, (해방 후) 그런 야미꾼들에 친일파, 나쁜 사람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래서 풍년이 들었는데도 사람들이 쌀을 제대로 못 먹었다. 1946년에 9월총파업하고 10월항쟁이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곡식 문제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해방이 되고도 해방의 기쁨을 곡식으로 못 누렸다.
그런데다가 조금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나. 전쟁에서 사람들을 참 힘들게 하는 게 굶주림 아닌가. 지독하게 굶주림을 맛봤다. 권정생 선생이 쓴 <몽실 언니>에도 그런 굶주림 행렬이 얼마나 많이 나오나. 1950년대에 베이비붐 현상으로 인구가 부쩍 늘어나면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농촌이 파탄한 건 전쟁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 적자 부담을 정부가 농민에게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토지수득세라는 것을, 그것도 현물로 농민한테 받았다. 전쟁에서 비롯한 어려움을 농민에게 전가한 것이었다. 이것도 농촌을 못살게 한 이유가 됐다.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특히 1963년과 1964년에 식량 파동이 일어난다. 3분 폭리도 겹치지 않나.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때에도 식량이 쪼들렸다. 1960년대 후반기, 그러니까 1967∼1969년에는 나도 지방에 내려가고 했는데 가뭄이 지독했다. 유난히 심했다. 그전에, 그러니까 자유당 말기에는 태풍 피해 같은 것도 심했다. (1959년 한가위에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가 대표적이다. 사라는 1904년 한반도에서 근대적 기상 관측이 시작된 후 그때까지 한반도를 덮친 태풍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이에 더해 태풍에 대비한 재난 방지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도 피해 규모를 키웠다. '편집자') 이런 것도 겹치면서 1960년대까지 우리 사회에 굶주리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썼기 때문에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와서 새로운 정책도 작용하고 하면서 배고픔이 해결됐다. 서민들, 굶주렸던 사람들은 그게 생각이 나는 것이다. '굶주림처럼 인간한테 힘든 게 어디 있나. 그런데 그 배고픔을 그때 와서 해결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같은 수준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는 그 이전에 이미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봐도 좋다. 다만 아프리카 일부 지역 등은 그때도 못했고 지금도 해결을 못하고 있지만, 다른 곳은 대개 그렇지 않았다.
식량 문제를 생각할 때는 필리핀, 이란 같은 나라에서 이미 1960년대에 녹색 혁명 같은 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인도 같은 데서도 농업에 대한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고 그랬다. 통일벼라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필리핀의 다수확 품종의 영향을 받아 그걸 개량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내 이야기는 그 이전에 정부가 중농 정책을 제대로 폈다면 우리도 1960년대에 배고픔 문제를 많이 해결할 수 있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시기에 난 농촌 운동도 좀 해봤는데, 그때 '우리가 많이 늦다. 왜 빨리 안 했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식량 문제가 해결된 건 새마을운동 덕분? 잘못 짚었다
프레시안 : 쌀이 부족하던 그 시절 정부는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학생들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풍경은 학교 급식이 전면 실시되면서 사라졌지만, 박정희 집권기에 학교를 다닌 이들에게 도시락 검사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어쨌건 1970년대 중반 심각한 굶주림에서는 벗어나지만, 그러한 먹을거리를 생산한 농민들은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정부의 저곡가 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서중석 : 야당에서 총선하고 대선이 있던 1967년에 이미 이중 곡가제를 들고나오는데도 정부는 1960년대 내내 저곡가 정책을 썼다. 저곡가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1960년대 내내 썼던 것은 노동자에 대해 저임금을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저곡가 정책에다가 계속되는 한발 등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농촌이 참 얼마나 어려웠나. 농촌 파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다. 그 당시 농촌을 돌아다녀보면 정부의 농정에 대한 불신도 아주 심했다.
한국에서 먹는 문제, 식량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도 일부에서 설명을 부정확하게 하고 있다. 마치 새마을운동의 영향인 것처럼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기에 쌀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히 크게 증가하는데, 그건 농정의 영향이지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농업 정책으로 당연히 써야 하는 것을 쓴 것이다.
일본에서 일찍부터 시행했고 야당에서 1967년부터 이야기한 이중 곡가제를 (1969년에 도입한 후) 1973년부터 강화하고 1975년에는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에서 통일벼를 정말 강력하게 권장했다. 그런데 농민이 말을 안 들었다. 내가 농촌에 가서 많이 본 모습인데, 면사무소 관리들이 와서 이미 심어놓은 모를 막 뽑아버리고 그랬다. 통일벼를 안 심었다고 그런 것이다. 그만큼 농민들이 안 심었다. 왜냐하면 통일벼는 벼가 조그마했다. 볏짚도 농민들에게는 중요한 수확물이지 않았나. 그것으로 가마니도 짜고, 또 다른 여러 가지로 사용하고 그랬다. 그런데 통일벼로는 그런 걸 하기가 어려웠다. (통일벼의 볏짚이 짧고 단단하지 못해 가마니를 비롯한 짚 제품을 만드는 데 쓸모가 없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에서 1975년 11월 통일벼의 볏짚을 가마니 짜기에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보급하겠다는 발표를 하기도 한다. '편집자') 그리고 통일벼는 맛이 없었다. 우리가 억지로 먹다 보니까 그것도 입맛 들였지만, '아키바레' 같은 것에 비하면 쌀의 질이 형편없다. 그래서 농민들이 통일벼를 잘 안 심었다. 통일벼는 심는 방법도 조금 달랐다. 짧은 거리에 많이 심는 방식이었다.
나중에 농민들이 통일벼를 많이 심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뭐냐 하면 이중 곡가제를 시행하면서 정부가 수매를 하는데, 통일벼를 우선 받아준 것이다. 그러자 농민들은 자기들이 먹을 건 '아키바레' 같은 좋은 것으로 심어놓고 팔 것, 도시에 내보낼 것으로는 대량으로 통일벼를 심어버렸다. 그러면서 1970년대 중반에 엄청난 쌀 생산이 이뤄진 것이다.
이건 새마을운동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필리핀 등에 비해 한국에서 녹색 혁명이 조금 늦게 일어난 것이다. 일찍부터 다수확 품종을 우리 현실에 맞게끔 권장했어야 할 일이고, 이중 곡가제가 조금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저곡가 정책의 대책은 일찍 세웠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이 워낙 어려워진다. 1971년에 대선, 총선이 있지 않았나. 그러고 나서 1972년에 유신 체제로 들어가는데, 유신 체제를 지지할 중요한 기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나. 1973년부터 이중 곡가제를 강화하면서 수매를 통일벼 우선으로 한 것에는 그런 여러 가지가 작용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세계 여러 나라를 보면 식량 문제는 인구 조절 문제와 맞물린 경우가 많다. 박정희 정권도 가족계획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서중석 : 이 대목에서 가족계획이 한국에서 잘된 것도 짤막하게나마 짚어보자. 1962년부터 시행하는데, 이 부분도 우리가 이해를 잘해야 한다. 1965년부터 1960년대 후반에 3-3-3운동이 벌어졌다. 자녀는 3명만, 세 살 터울로, 35세 전에 다 낳자는 운동이었다. 이게 한국에서 빨리 된 건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국가의 정책 집행 능력이, 한국이 다른 어떤 곳보다도 과도하게 강했다. 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한국은 상당히 강력하게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전통이 있는 나라였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이슬람 국가들이건 남유럽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이건 가족계획을 방해하고 어렵게 하는 데 종교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인종적 편견도 크게 작용한다. 지금도 미국에서 이런 것들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거기다 교육 수준 등도 작용하는데, 한국은 놀랍게도 이 문제에서 인종적 편견이 없는 나라였다. 종교적으로도 이 부분이 개재가 안 됐다. 난 가톨릭에서도 왜 가족계획에 대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하여튼 그랬다.
그리고 한국인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강했다. 1950년대부터 보면 생활수준이 빨리 높아지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한국인은 대단히 강했다. 난 인도에 가서는 그것을 그렇게까지 느끼지 못하겠더라. 어쨌든 그런 것들이 작용하면서 순발력, 적응력 같은 것이 굉장히 좋았다. 1970년대에 가면 2명만 낳는 것으로 바로 정착됐다. 1980년대 어느 때부터는 1명만 낳는 사람도 늘어나더라. 2000년대에 가니까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는 정도까지 됐다. 가족계획 하나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눈감은 진실
프레시안 : 가톨릭에서 가족계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족계획 사업 시행 직전인 1961년 9월 26일 한국천주교주교단은 가족계획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자연적이며 죄악적인 어떠한 피임 행위나 그에 의한 산아 제한 제도에 현혹됨이 없이 오직 순결하고 명예롭고 인간 품위에 적합한 부부 생활만을 영위"할 것을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후 가족계획이 강력하게 추진된 시기에 천주교단 차원의 조직적이고 강력한 반대 운동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중석 : 그렇다. 지금까지 박정희 집권 시기의 경제 발전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걸 살펴봤다. 역사적으로 쭉 되짚어보는 것도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930년대에 한국의 산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 성격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지 않나. 전쟁이 끝날 무렵, 그러니까 일제가 패전을 눈앞에 둔 때부터 패전할 때까지, 주로 1944년과 1945년이 이에 해당하는데 그때 한국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허수열 교수가 제시한 서양 경제학자의 자료를 보니까 (1인당 GDP가) 1910년보다 1945년에 곤두박질쳐서 한국 경제가 더 나빴던 것으로 나와 있더라. 나는 정말 그건 믿기지 않는데, 허 교수는 통계를 가지고 그것을 주장하고 있더라. <개발 없는 개발> 책에도 나오고 다른 글에도 나온다. 그 정도로 한국 경제가 악화됐다.
해방 직후 한국 경제는 지독한 인플레이션과 물자난에 노출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가 패전 직전부터 막 돈을 찍어냈다. 여러 가지를 예상하지 않았겠나. 해방 후에도 일제가 계속 돈을 찍어냈다. 그래서 엄청나게 화폐량이 늘어났다. 거기다가 미국이 자유 경제 정책을 쓰면서 경제 혼란이 가중된 데다가, 일본인 기술자들이 남쪽의 경우 대거 철수해버렸다. 중공업 중심이던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들을 붙들어놨는데 남한은 그렇게 못 했다. 남한이건 북한이건 다 기계 공업은 일본 것을 쓰게 돼 있었는데, (남한의 경우 기술자들이 철수한 것에 더해) 부품도 없어져버리면서 공장이 돌아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남한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최악의 상태를 계속 헤맸다.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했느냐. 1944년에 비해 1946년에 물가가 92배나 됐다. 1946년 1월에 소매로 쌀 한 두에 180원 하던 것이 9월에 가니 무려 1200원이나 됐다. (물가가 92배로 뛰는 동안 임금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의 1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이 때문에 삼척에서 여성 300여 명이 쌀을 달라며 군청을 포위하고, 부산에서는 굶주린 시민 500여 명이 부청에 몰려들었다. '편집자') 1946년 (좌익인 전평에서 주도한) 9월총파업에 (우익인) 대한노총 노조원까지 가담한 것은 바로 이런 지독한 경제난, 곡물 문제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 한국 경제가 정말 나빴다. 그런데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허수열 교수도 그걸 잘 비판하고 있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것(일제 시대 개발의 유산)이 (온전히) 이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1949년쯤 되면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김도연의 표현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이 잡히는가 하더니, 1950년에 바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건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집권에만 골몰해 경제 개발 계획 묵힌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다양한 통계를 활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경제학자인 허수열 교수는 일제 시대 개발의 유산 중 한국전쟁 이후까지 잔존한 것은 일제 말기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고 <개발 없는 개발>에서 평가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식민지 시대에 이뤄진 모든 개발의 유산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까지 축소됐고 해방 후 한국의 경제 성장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귀담아들을 이야기다. 한편 전쟁의 참화 속에서 박정희는 쿠데타를 꿈꿨다.
서중석 : 전에도 얘기했지만 박정희가 1950년대 초중반에 쿠데타로 집권했다면 경제 무능만 보여줬을 것이라고 본다. 그 시기에 적절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고, 더더구나 군인들은 그런 경제에 현실적인 적응을 할 수가 없었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남한이건 북한이건 모두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데 참 힘을 많이 쏟지 않았나. 그러면서 1956년에 악성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히고 1957년부터 경제 건설기로 들어간다고 최호진 연세대 교수는 그 시기 쓴 글에서 이야기했다. 주택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복구되고, 부흥 궤도에 올라 생산도 한국전쟁 이전 수준을 약간 상회하면서 확실히 1957년을 계기로 한국은 경제 발전기에 들어간 감을 준다고 얘기했다. 최호진은 식민 사관을 주장해서 나중에 욕먹지만, 일제 때부터 유명한 학자였다. 우리 세대한테는 친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대만은 1958년부터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쓰는데 이승만 정권이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미국의 원조 정책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사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새로운 세대의 테크노크라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1958년에는 이러한 테크노크라트를 포함해 경제 전문가 20명 정도로 구성된 산업개발위원회가 부흥부 산하에 구성된다. 이 사람들이 그래도 현실적인 경제 개발 계획을 최초로 마련했다고 하는데, 그게 3개년 경제 개발 계획이다. 이것을 1959년 봄에 국무회의에 올렸는데, 정부는 1960년 4월 15일에야 이걸 통과시켰다. 3.15 부정 선거가 끝나고, 이제 집권했다 싶으니까 통과시킨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 후반기에는 경제 부처 장관도 그러했고 관료들 중에도 유능한 경제 관료들이 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제대로 쓰지 않은 것이다. 경제 건설 쪽에 신경 쓰기 전에 정치 우선, 그러니까 부정 선거로 집권하는 것에다가 모든 걸 쏟은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결국 이런 모든 공이 장면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본격적인 경제 건설, 개발 정책은 경제 제일주의를 내건 장면 정부에서 이어받게 된다. 장면 정부는 인프라 조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전력 산업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1960년 55억 환의 예산이 배정됐던 것을 1961년에는 286억 환을, 그러니까 전년도의 5배 이상이나 배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추가 경정 예산을 짤 때 다시 131억 환을 여기에 배정했다. 이것을 국토 건설 과제와 결합했다. 광공업 부문도 1960년에 46억 환이던 것이 1961년에는 147억 환이 됐고, 중소기업 예산도 1960년에 106억 환이던 것이 1961년에는 286억 환으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자유당 정권 때 세워둔 1960년 예산에 비해 전력, 광공업, 중소기업 부문 예산을 이처럼 크게 늘렸다.
1961년 3월에는 대규모로 공무원을 공채했다. 이건 해방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다. 일제 때도 이렇게 2000명 넘게 한꺼번에 공채한 일은 없었다. 그러면서 이 시기부터 직업 공무원제가 자리를 잡아간다. 인사 관장 기관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공무원 신분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장면 정부 때 공무원법을 개정하면서 그렇게 된다. 이것을 나중에 박정희 정부 때 더 강화하는 것이다. 장면 정부 때 국장으로 있었던 이한빈은 성취형 공무원, 테크노크라트들이 장면 정부 시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또 장면 정부는 재무 장관 김영선, 머리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 김영선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경제 정책을 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1961년 4월말에 세웠는데 이것을 박정희 쿠데타 정권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은 다들 아는 것이다. 아울러 장면 정부는 수출 경제로 나아가서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로 환율을 조정하고, 상공부에서 수출 보상금을 책정하겠다고 하면서 수출 시장 개척비를 마련하고 미국, 서독에 기술 원조와 장기 차관 도입을 요청했다.
장면 정부가 가장 힘을 들여서 한 것은 국토 개발 사업이다. 국토 개발 사업으로 추경 예산을 400억 환이나 편성해가지고 경지 정리, 관개, 배수, 산림녹화, 위생 시설, 도로, 교량, 그리고 소양강댐, 남강댐, 춘천댐 같은 댐 건설 등의 사업을 벌이기로 하고 이 중 일부를 부분적으로 했다. 국토 개발 사업은 1961년 3월경에야 시작되는데 5.16쿠데타가 바로 났기 때문에 성과라는 걸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경제 제일주의 내건 장면 정권, 시행착오 거듭한 쿠데타 정권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이 하려던 것들을 쿠데타 정권이 정면 부인한 경우는 별로 없다고 전에 이야기했다. 박정희 집권기 전체를 놓고 보면 그렇지만, 쿠데타 후 한동안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장면 정부의 이런 여러 경제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후 적절하게 바로 소화, 흡수해서 발전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초기에는 경제에 미숙했다. 의욕만 앞섰을 뿐 워낙 모르지 않았나. 그러면서 시행착오와 실책을 거듭했다. 그래서 외환 위기까지 낳고 그러는데, 이때 미국이 제1차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하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미국은 원조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었으니, 권고라는 건 사실 반강제 아닌가. 그러면서 한국은 극심한 외환 보유고 문제를 헤쳐가기 위해서도 1964∼1965년경부터 과감히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펴게 된다. 박정희의 경제 추진 능력이 수출 드라이브에서 잘 드러난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그런데 이 시기부터 서독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돈을 부쳐오고, 청구권 자금을 10년간 나눠 쓰게 되고, 베트남 특수가 생기고, 국제 자본 이동도 활발해지면서 한국이 차관 위주, 외자 위주의 경제 정책을 쓰게 된다. 거기에다 값싸고 근면하고 아주 성실한 노동력을 무한정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1960년대에 맨 처음에는 수입 산업을 대체하는 정책을 썼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 집약적 수출 산업을 강력히 지원하게 되는데, 그때는 시장의 장벽, 즉 무역 장벽 같은 것이 없었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 상품을 사줬다.
그러면서 1970년대로 넘어가게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대만과 비슷하게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쓴 한국은 1970년대에는 대만과 함께 수출 위주의 중화학 공업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기업 쪽에서 망설이면서 1975년까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중동 건설에서 엄청난 호재가 쌓이면서 중화학 공업화로 가게 됐는데,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과열 경쟁을 유도했다가 결국 경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서 1978년 12월 12일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고 1979년 10월에는 부마항쟁이 일어난다. 해방 전후 시기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한국 경제의 흐름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앞으로는 박정희가 정말 경제를 중시하는 정책만 썼느냐, 그렇지 않고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잘못도 많이 범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를 짚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 전면적인 경제 발전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러니까 평준화, 교육 문제, 토지 개혁 문제를 쭉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이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짚을 것이다. 제일 잘못된 게 재벌 중심 정책이었는데 그것도 유신 체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빨리빨리 해먹으려면 재벌을 잡아서 하는 게 제일 낫다고 본 것이다. 정경유착을 하기도 그게 제일 쉽다. 몇 군데에서 돈을 뜯어내면 되는 것이니. 중소기업은 숫자가 많아 돈을 뜯어내기가 힘들지 않나. 그러한 재벌 문제를 마지막으로 짚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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