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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깔보다 무너진 한국, 여성 덕에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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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깔보다 무너진 한국, 여성 덕에 다시 일어섰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4> 경제 개발,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년대 이후 한국이 도약한 역사적 배경으로 앞에서 평준화와 교육열을 짚었다. 그것 이외에 역사적 배경으로 어떤 것을 더 꼽을 수 있나.

서중석 : 한국에서 역동적인 힘,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을 산업화하는 데 기본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평준화 현상과 교육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몇 가지 다른 현상이 여기에 합세했다. 그 점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중 하나가 토지 개혁이다.

1930년대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사진이나 활동사진 같은 걸 봐라. 얼마나 멋진가. 파리를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는 아주 멋진 도시들이었다.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대도시들이었다. 그런데 이 도시들은 1960∼1970년대에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 왜 이 사회는 그렇게 정체됐느냐 하는 부분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는데, 이때 중요하게 거론된 것이 바로 토지 개혁 문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유럽과 북미,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지역 중에서 어째서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여기에서만 경제적으로 대단한 발전이 이뤄졌는가 하는 문제와 닿아 있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네 마리 용이라고 하면서 이것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유교 자본주의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다시 보니까 이 지역들에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일본, 한국, 대만, 그리고 현재로 봐서는 중국까지 포함될 텐데, 여기가 전부 토지 개혁이 된 지역들이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중남미 국가들은 그렇게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큰 나라들인데도 왜 경제 발전이 한때 되는 듯하다가 멈춰버렸는가, 이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권이 참 대단한 경제 발전을 하는데 이 지역들은 한동안 멈춰버린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많은 경제 혼란이 일어난다. 그렇게 된 제일 큰 요인은 토지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지주와 군이 결탁해 과두 정권을 구성하고 권력을 계속 장악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신선한 산업화 물결을 일으키거나 합리적이고 투명한 경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관료도 대지주들하고 결합하지 않았나.

프레시안 : 토지 개혁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반면교사 사례는 라틴아메리카 이외 지역에도 있다.

서중석 : 우리는 그런 지역 중 하나를 동남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필리핀이 그렇다. 여행을 가보면 필리핀은 참 땅이 넓고 거기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2모작, 3모작을 할 수 있는 데가 많지 않나. 우리가 1950∼1960년대에는 필리핀을 부러워했다. 민주주의도 모범 국가로 보였고, 경제도 우리보다 나은 것 같아서 그러했다. 그런데 그 이후 영 달라져가지고 이제는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이 와서 어렵게 사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나.

왜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이 이렇게 됐느냐.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토지 개혁이 안 됐기 때문 아니냐고들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을 만나기 직전인 1986년 필리핀에서 민중 혁명(people revolution)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래서 드디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코라손 아키노가 가톨릭과 민중의 지원을 받으며 대통령이 됐다. 이때 코라손 아키노가 크게 공약한 것이 토지 개혁이었다. 이 사람도 기득권자였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토지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끝내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뒤로는 또 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지 않나. 그러면서 여전히 마닐라 외곽에는 성주가 사는 성 같은 집들이 꽤 있고, 지방에 가면 지방 성주들이 있다고 한다. 그자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로 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가 그런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수의 대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는 불평등한 토지 소유를 해체해 그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주는 것은 1986년 민중 혁명 당시 사회 경제 분야에서 제기된 핵심 과제였다. 이는 필리핀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거센 요구와 시대의 흐름 앞에서 코라손 아키노도 농지 개혁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코라손 아키노는 "토지 분배보다 이윤 분배가 더 중요하다", "소단위 경작은 대단위 경작보다 확실히 비효율적"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농지 개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논란 끝에 1988년 6월 농지 개혁 법안이 필리핀 의회를 통과하지만, 의회를 지배하고 있던 지주 세력에 의해 법안은 이미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그 자신이 대지주 계급의 일원이던 코라손 아키노가 농민을 비롯한 민중 세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회를 지배하던 지주 세력의 손에 농지 개혁 법안을 맡긴 결과였다. 또한 민중 세력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을 독자적으로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정권과 갈라선 일부 군부, 교회, 대지주 등 기득권 세력과 연합해 집권자를 교체한 1986년 민중 혁명에 내재한 한계이기도 했다. 이처럼 코라손 아키노 집권기는 '마르코스 축출'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뭉쳤던 세력들 중에서 농민을 비롯한 민중 세력이 밀려난 시기였다. 농지 개혁 퇴행은 이를 상징하는 사안이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산업화의 기반 마련한 농지 개혁과 지주의 몰락

프레시안 : 농지 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주 세력이 힘을 잃은 건 한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중요한 사안이다.

서중석 : 중남미 국가들이나 필리핀 등과 달리 한국에서는 토지 개혁이 됐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지주가 쫄딱 망하는 식으로 돼버렸다. 지구상에서 이런 식으로 지주가 망할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심하게 망한 사례다.

조선 후기가 어떤 사회였나. 아주 심한 양반 지배 체제라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일제 때도 식민지 지주제라고 해서 지주가 강성했다. 1930년대 이후 조금 약화됐다고는 해도 지주는 여전히 강한 존재였다. 그런데 해방을 만나면서 지주의 힘이 많이 약화됐다. 1948년 5.10선거를 치르면서 지주가 더 약화된다. 제헌 국회가 토지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나. 그러면서 토지 방매 현상이 대량으로 일어났다. 또 농지 개혁이 전쟁 직전에 시작되고, 전쟁기에는 머슴이나 빈농들이 마을에서 큰소리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런 것 때문에도 지주가 망했는데, 그것으로만 망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굉장히 어렵게 됐는데 이승만 정권은 그걸 메우고자 재정 부담의 많은 부분을 농민에게 지웠다. 농민에게 토지수득세를 거뒀고 거기에 저곡가 정책이 겹쳐 1950년대에 농민 사회가 몰락하고 있었는데, 농민들과 함께 있던 지주들은 그것 때문에도 어려워졌다.

지주를 더 어렵게 한 것은 지주가 갖고 있던 지가증권이었다. 우선 일제 말부터 미군정에 걸쳐서 지주가 손해를 보는 정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소작료를 지주에게 금납하게 한 것이었다. 미군정이 실시한 3.1제도 그런 식이었다. 농민들한테 소작료를 현물로 받아 지주한테는 돈으로 줬다. 일제 말 전시 체제 당시 조선총독부건, 해방 후 미군정이건 그게 다 유리한 방식이었다. 쌀이 부족할 때였으니 귀한 쌀을 확보하고자 농민에게 현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이 심한 상황에서 그건 지주에게 큰 손해였다. 토지수득세가 농민을 그렇게 괴롭힌 이유도 그것을 현물세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지 개혁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농민들에게는 연평균 생산액의 150퍼센트를 분할해 현물로 상환하게 하고 지주한테는 한꺼번에 지가증권으로 줬다. 그 지가증권이 전쟁기의 인플레이션을 만나면서 거의 다 휴지 조각이 됐다. 대지주를 제외하고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대지주는 지가증권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게 생겼다. 뭐냐 하면 정부에서 귀속 재산, 그중에서도 특히 공장 같은 것을 처분할 때 이 지가증권을 액면 그대로 인정했다. 그래서 대지주들이 그것을 담보로 해서 귀속 재산을 불하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 것에 지가증권을 유용하게 쓴 아주 소수의 대지주를 빼놓고 나머지는 지가증권이 휴지가 되면서 일반 농민처럼 가난한 농민이 돼버렸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지주가 몰락했다. 필리핀 같은 데서는 영주라고 할 만한 자들이 하나의 지역을 지배했고 지금도 그런데, 우리 경우는 그런 자들이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대규모 이농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하나의 요인을 만들었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건 농촌에서 엄청난 규모의 농민들이 도시로 나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된다. 이 사람들이 또 1960∼1970년대 산업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힘이 여기서도 다시 나온 것이다.

프레시안 : 그렇게 형성된 노동자들이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서중석 : 전에 말한 것처럼 한글세대 그리고 엄청난 산업예비군, 이 사람들이 굉장히 근면했고 이처럼 근면한 노동력이 풍부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동남아시아나 중남미 사람들보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사람들이 더 부지런한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그렇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에 쓴 책에서는 식민 사관이 많이 보인다. 거기에서 박정희는 한국인의 식민지 근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인이 게을러서 이렇게 못살게 됐다'는 식의 논법을 폈다. 또 얼마 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낙마한 경우도 있지 않나.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했던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은 2011년 한 교회 특강에서 "조선 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거,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라고 강변했다. 이 특강에서 문 씨는 일본군 '위안부', 분단, 4.3사건 등에 대해서도 역사의식이 의심스러운 발언을 쏟아냈다. '편집자') 그런데 왜 일제 때 한국인이 일을 할 수가 없었느냐. 한마디로 일할 자리가 없어서 못한 것이다. 소작지라는 게 많이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일할 기회만 주어지면, 1960∼1980년대에 본 것처럼 한국인은 그렇게 일을 잘한다. 중동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사람들이냐'라고 하면서 혀를 내두르지 않았나. 21세기에 와서 중국인들이 또 그렇게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하면, 경제 발전 과정에서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노동력이 굉장히 근면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여성에게 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한국전쟁

프레시안 : 그처럼 성실하게 일하며 고도성장을 만들어낸 이들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임에도 현실에서는 심심찮게 잊히는 듯하다.

서중석 :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대거, 쉽게,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노동에 임하거나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점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그전에는 한국처럼 심한 남존여비 사회가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얼마나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됐나. 칠거지악과 삼종지례, 대표적으로 이 두 가지로 설명들을 하지 않나. 거기에다가 여성들에게 지독할 정도로 정절을 강요하는 것도 여성을 얽매이게 하는 대표적인 힘이지 않나.

그런데 해방 직후 '우리가 봉건적 인습,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운형 같은 사람들이 계속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표적이 된 건 여성 문제였다. 여성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건적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을 저렇게 깔보고 인간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해방 직후까지 여성들이 정말 어려웠다. 해방 직후에 물론 여성 운동이 많이 벌어졌지만, 그것도 정치 운동과 결합되면서 여성 자신의 권리를 증진하는 데는 부분적인 역할밖에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나버렸다. 여성에게 전반적으로 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놀랍게도 전쟁이었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일제의 잘못된 지배가 양반 사회를 없애버렸다고 전에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전쟁은 남성한테만 큰 시련인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굉장히 가혹한 것이다. 거기서 여성 가장이라는 것이 대량으로 탄생했다.

전쟁 때 남자들은 군인, 경찰 또는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같은 데로 많이 끌려갔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망자가 됐다. 인민군 의용군, 빨치산 이런 데로도 많이 끌려가거나 갔다. 여기서도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그리고 전쟁을 전후해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나. 여기서도 대개 죽는 건 남자들이었다. 부역자로 몰려 감옥에 들어간 남자들도 많았고, 월북하거나 납북되는 이들도 많았다. 또 1950년대에는 부상자들, 그분들 보기가 참 무서웠는데 그런 분들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상이용사라고 불렸는데, 상이용사라는 이야기를 못하는 부상자들도 많았다. 빨치산 부상자들 같은 이들이 그랬다. 아울러 그 시기에는 군 노동이라는 게 있었다. 유엔군 노동 같은 게 많았는데, 거기 가면 3년에서 5년을 노동했다고 한다. 그 숫자도 많다. 몇 만 명 된다.

다시 말해 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젊은 남자들이 너무나 많이 생긴 것이다. 죽었거나 다쳤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또는 군 노동 같은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여성 가장이 대량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경제 활동이 강요된 것이다.

프레시안 :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지배 질서가 조선 후기에 강화되면서 여성을 옥죄는 정도도 그전보다 더 심해졌다. 그것과 비교하면, 많은 여성이 가정을 벗어나 경제 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큰 변화다.

서중석 : 내가 10여 년 전 파키스탄에 가서 처음 보는 풍경을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파키스탄 북동부 도시인 라호르에서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거쳐 중국 국경선까지 넘었는데, 라호르에는 굉장히 번화한 시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그러니까 라호르건 이슬라마바드건 북쪽의 여러 지역이건 여자들이 노동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다시 말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는데, 거기서는 그렇다고 하더라.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아프가니스탄이 그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시리아는 꼭 그렇지는 않다. 요르단도, 팔레스타인도 그렇지는 않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상당히 파키스탄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차도르는 쓰게 하지만 여성이 사회 활동, 경제 활동을 많이 한다. 이렇게 아랍 국가 또는 이슬람 국가라고 하더라도 지역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슬람 국가 중에는 여성 노동을 금기시하는 곳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데가 꽤 있다.

사실 한국의 경우도 조선 후기 이래, 일제 시대 또는 해방 직후에도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여성은 가사 노동을 하고 농사 정도만 하면 된다는 사고가 만연해 있었다. 여성이 상속을 못 받는 게 아닌데도 경제권을 제대로 행사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놀란 것 중 하나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노동 이민 형태가 달랐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서 중국인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노동 이민을 많이 가는데, 대개 남자가 먼저 가고 여자가 나중에 가더라. 그런데 한국의 경우 남부여대해서 간다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온다. 물론 일본에 노동하러 가는 사람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건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자기 땅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외국으로 품 팔러 나간 건데, 왜 그렇게 형태가 달랐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만 하더라도 여자한테 일정하게 경제권이 있었다. 한국은 그게 약했기 때문에, 혼자 남아서 시부모나 시동생이랑 같이 있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남편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렇게 따라나서서 같이 고생해 먹고살자는 것이었다. 그런 한국 여성에게 전쟁이 결국 가족 생계와 자식 교육을 위해 고된 생활 전선에 뛰어들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의 노동을 금기시하는 종교적, 사회적 편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는 한국이 급속히 산업화를 하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봉제 작업을 하는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1986년 3월 15일). ⓒ연합뉴스


여성의 노동 참여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던 사회 분위기, 산업화에 상당한 역할

프레시안 : 1950년대 후반 여성 중에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 비율은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1957년 정부에서 실시한 서울 거주자 조사를 보면, 남편이 있는 가정부인 중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은 9.6퍼센트인데 미망인 중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은 88.8퍼센트였다. 다시 말해,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집에 없으면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농촌 거주 미망인이건 준미망인이건 이 사람들은 농사일을 도맡고, 시부모를 공양하고, 자녀와 시동생 학비까지 마련하기 위해 나서야 했다. 당시 월북하거나 납북된 사람들의 경우 미망인인지 아닌지 모르는 수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 준미망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여성들이 행상 노릇을 하거나 채소, 과실, 의류, 곡물 같은 걸 읍내에 들고 가 길거리에서 파는 경우를 아주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도시 시장마다 콩나물, 어묵 장사부터 양담배, 양과자, 양말 장사 같은 게 참 많았다. 이런 여성들 중에서 수완이 좋은 사람들은 양단 등 큰 옷감 점포를 갖게 됐고, 여성을 중심으로 작은 음식점에서 큰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식점을 차리는 모습도 나타났다. 서울의 동대문과 남대문, 부산의 광복동이나 남포동 같은 곳에 대도시 상설 시장이 생기는데, 여기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해 자리를 잡는 여성 상인들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암달러상이라든가 극장 앞의 암표상 중에도 여성들이 많았다. 1970년대를 산 사람들은 잘 알 텐데 그때는 암표상이 많았다. 또 극단적인 경우 몸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님이라든가 자신의 약값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도 참 많았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식모로 가는 여성도 1950년대에는 무지무지하게 많았다. 도시에서 부자만 식모를 둔 게 아니었다. 부자가 아닌데도 할 수 없이 식모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밥이나 먹여주면 된다고 하면서 시골에서 여성을 보내고 그랬다. 고생스럽긴 했지만 식모 일도 활동은 활동이었고, 그렇게 도시로 온 여성들도 뭔가 새로운 것을 접하며 배우는 것이 있었다. 당시 군대에는 대개 힘없는 농민의 자식들이 갔지만, 그렇게 해서 고향을 떠난 이들이 군대에서 뭔가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게 됐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프레시안 : 한국 여성이 강인하고 능력 있다는 이야기를 세간에서 하는데,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1960∼1970년대에는 또 다른 형태의 여성 노동자가 생겨났다. 대개 열네 살 이후, 그러니까 10대 후반에서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 같은 곳에 대거 진출하게 된다. 섬유, 봉제, 가발 등 노동 집약적 경공업에서 많이 일한다. 그때는 전반적으로 노동 조건이 열악했지만,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많이 한 노동 집약적 경공업일수록 고된 노동이 많았고 열악한 현장이 많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취직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젊은 여성이 많았다.

또 1960년대에 참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이 여자 버스 차장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버스에 여자 차장이 있었고, 심지어 한 버스에 2명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여자 버스 차장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은 그 당시에 참 중노동을 했다. (중노동과 더불어 이들을 괴롭힌 것 중 하나는 몸수색이었다. 요금을 빼돌리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이뤄진 몸수색은 인권 유린이자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행위였다. 지나친 몸수색을 견딜 수 없다며 여성 버스 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1978년 일어나기도 했다. '편집자')

1960∼1970년대의 이런 여성 노동자들 중에는, 여전히 가족주의 영향이 작용해서 그랬겠지만, 부모님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또는 1979년 YH사건 때 김경숙과 같은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부모님의 약값을 마련하거나 동생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고 그렇게 번 돈을 부치는 경우도 참 많았다. 반면에 가부장적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생계를 꾸리기 위해 노동하는 새로운 노동 여성 세대도 있었다.

하여튼 1950년대건,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하는 1960∼1970년대건 여성이 이렇게 노동에 대거 뛰어드는 데 한국에서는 거의 제약이 없었다. 봉건적 인습이나 사고, 여성의 노동을 금기시하는 종교적, 사회적 편견 같은 것이 이 시기에 전혀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한국이 급속히 산업화를 하는 데 이런 점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상승하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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