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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달인 박정희? '중화학 무리수'로 제 발등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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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제 달인 박정희? '중화학 무리수'로 제 발등 찍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8> 경제 개발,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동 특수다.

서중석 : 그 당시 한국 경제에서 견인차 역할을 한 중요 요소들을 지금까지 살펴봤는데 중동 건설처럼 한국에 큰 행운으로 작용한 건 없다. 박정희한테는 정말 대운이었다. 중동 건설은 뜻밖의, 그것도 엄청나게 큰 규모의 경제 발전을 할 수 있는 행운을 한국에 안겨줬다. 그런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시기도 중요하다.

1969년에 한국 경제가 아주 좋았다. 성장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장률이 계속 한 자릿수가 된다. 한 자료를 보면 1969년에는 13.8퍼센트였는데 1970년에는 7.6퍼센트로 나온다. 이런 식으로 1975년까지 계속 성장률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수출 증가세도 이 시기에는 상당히 둔화됐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가, 유신 체제가 들어섰건 안 들어섰건 상관없이, 어려움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등장한 게,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을 할 때인 1974년에 시작된 중동 건설이었다. 우리가 중동 건설이라고 한마디로 부르는 해외 건설 경기였다.

프레시안 : 중동 특수는 당시 세계를 뒤흔든 석유 파동과 이어져 있다.

서중석 : 유럽이라든가 일본은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한국은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형태가 좀 달랐다. 중동의 여러 나라가 이스라엘과 맞붙은 전쟁에서 계속 밀리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중동의 산유국들한테 호소하게 된다. (이 지역 산유국들이 뜻을 모아 유가를 조정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는 미국을 견제해 이스라엘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안와르 사다트의 생각이었다. '편집자') 그것을 계기로 산유 주권 국가로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전 세계 석유를 장악하고 있던 7대 메이저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독자적 행보를 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으면서 석유 가격이 오르지 않나.

석유 가격이 많이 오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같은 중동 여러 나라에 굉장히 많은 달러가 쌓인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이 그걸 자기들만 먹을 수는 없지 않았겠나. 당시에는 사우디아라비아만이 아니라 이란도 왕국(팔레비 왕조)이었는데, 왕족들만 그 과실을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국민들한테도 '우리가 이렇게 너희를 위해 일했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제일 표 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다리, 도로를 놓고 아파트 같은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빨리 지어주는 데일수록 그 사람들에겐 좋았다. '너희를 위해 우리가 이렇게 일하고 있다'는 걸 빨리 국민들한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독이나 일본이 일을 잘한다는 건 그 사람들도 알고 있었지만, 빨리빨리 일을 잘하는 건 한국, 특히 정주영의 현대건설을 따라갈 데가 없었다.

내가 10여 년 전에 피라미드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꼬맹이들이 우리 주변을 뱅뱅 돌면서 우리말로 "빨리빨리 빨리빨리" 그러면서 달음박질하고 다니더라. 어떻게 저런 꼬마들이 저럴까 하는 생각을 당시 했는데, 이집트뿐만 아니라 중동 여러 나라에서 현지인들이 한국인 여행객들을 보면서 "빨리빨리"라는 말을 하는 걸 나도 몇 번 들었다. 그만큼 한국인은 빨리빨리 해낸다고 해서 중동 여러 국가에서 선호했다. 그래서 한국은 오히려 제1차 석유 파동 때문에 나중에 엄청 덕을 보는, 지구상에서 어쩌면 제일 크게 덕을 본 참 기이한 예가 돼버렸다.

박정희도 살리고 한국 경제도 살린 중동 특수

프레시안 : 현대건설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빨리빨리" 방식으로 중동 건설 현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건 사실이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폭동' 같은 일련의 사건들도 당시 한국 기업들의 무리한 작업 및 노동자 관리 방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중동 특수 문제를 생각할 때 이런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중동 특수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한 자료를 보면 중동에 발을 뻗기 시작한 1974년에 8900만 달러였던 총 수주액이 1975년에는 7억5100만 달러가 되고,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연평균 76.1퍼센트씩 늘어났다고 돼 있다. 이건 수출 증가율하고 비교가 안 된다. 그러면서 1980년에는 82억 달러가 된다. 변형윤 선생이 쓴 글에서 건설 수출 부분을 보면 수치가 조금 다르게 나온다. 건설 수출이 1974년에는 2억6000만 달러, 1976년에는 25억 달러, 1977년에는 35억2000만 달러, 1978년에는 81억 달러나 되는 것으로 나온다. 정말 무서운 것이다. 변형윤 선생 글에는 이것이 전체 한국 수출액의 40퍼센트에서 60퍼센트까지 차지했다고 돼 있다.

1977년에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엄청나게 홍보하고 그랬다. 굉장한 기세였다. 그때 정말 대단했다. 떠나갈 듯했는데, 그것의 상당 부분은 이 중동 특수가 아니었으면 없었을 것이다. 중동 특수가 정말 박정희도 살리고 한국 경제도 살렸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번화한 새로운 번영 도시에 세워진 게 테헤란로다.

이렇게 수주액이 많고 건설 수출이 잘되다 보니까 노동자 송금액도 많았다. 노동자는 월급의 80퍼센트를 강제 송금해 은행에 예치하도록 돼 있었다. 이게 1975년에 1억5800만 달러, 1976년에 3억300만 달러, 1977년에 5억8400만 달러, 1978년에는 7억6900만 달러였다. 이건 월남 특수하고도 비교가 안 된다. 월남 특수가 대일 청구권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데, 이건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돈으로 되는 것 아니었나.

이때 천재적인 경영 수완을 보인 사람이 정주영이었다. 대단한 기량을 보였다. 정주영의 이때 업적은 두고두고 한국인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현대건설을 중심으로 현대에서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약 51억6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9년에 현대의 총 매출이 36억 달러나 됐다. 그러면서 1978년 미국 경제지 <포춘>에 드디어 한국 기업인 현대가 98위로 이름을 올린다. 정말 놀랍고 무서운 일이 중동 건설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중동 건설에서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오니까 부작용도 많았다. 부동산 투기가 1977∼1978년부터 굉장히 거세진다. 남편은 열사의 땅에서 고생하는데 부인이 그 돈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하여튼 중동 건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하는 건 중화학 공업 문제에 가서야 알 수가 있다. 분명한 건 중동 건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 능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횡재수가 터진 것이고, 기발하게 머리를 잘 쓴 정주영 같은 사람이 거기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중화학 공업화 위해 유신 쿠데타? 근거 없는 낭설

프레시안 : 중화학 공업화와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추진력을 강조하는 주장이 적지 않다. 최고 권력자의 결단이 중화학 공업화의 밑거름이 됐고, 그것이 한국 경제를 고도화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논리다.

서중석 : 중화학 공업화가 과연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업적인가, 그렇지 않고 이것도 다른 여러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인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중화학 공업화를 박 대통령 최대의 경제 업적이라고 한다. 심지어 모모 인사들은 '중화학 공업화를 위해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체제를 만든 것이다', 이런 주장까지 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어떤 연설문을 읽어봐도 그렇게 얘기한 게 없다. 중화학 공업화에서는 산림녹화에서 구공탄이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에서는, 북한이 더 강하게 주장했지만, 1950년대부터 '우리 경제가 자립하려면 중공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혁신계, 진보당 같은 쪽에서 많이 주장했다. 박희범 같은 극우 성향 학자들도 1960년대에 들어가면서 이 주장을 많이 한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장면 정부와 마찬가지로,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때 중공업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바로 생겨버렸고, 미국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경제가 도무지 돌아가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수정을 했다. 이 시기에 북한은 중공업 발전에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가장 오랫동안 한 김정렴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한 1967년부터 중화학이 태동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7년에서 1971년 사이의 계획을 보면 제철, 기계, 석유화학을 3대 기본 목표로 세웠다. 제2차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울 때, 이건 1967년 이전일 터인데, 이미 한국은 중화학으로 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포항종합제철하고 울산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착공되는 것 아닌가.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의 계획에는 종합제철, 석유화학에다가 중기계, 조선, 특수강, 주물철 공장이 또 중요 사업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중화학 공업으로 가야 한다는 건 유신 체제 이전에 대세였다. 중공업으로 가야만 한국 경제가 제대로 자립할 수 있다는 분위기는 이미 1950년대부터 계속 있었다.

1973년 1월 13일 중화학 공업화를 박 대통령이 선언했다고들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이 그 담화를 인용하는데, 그 담화도 읽어보면 중화학 공업화 이야기만 한 게 아니고 농업 등 여러 부문과 함께 중화학 공업도 발전시키겠다고 돼 있다. 그렇지만 이 시기쯤 오면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켜야 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면서 1973년 5월 12일 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밑에 시행 업무를 총괄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만든다. 1974년부터 조세 감면, 관세 보호 등 각종 혜택을 주고, 수입 규제 조치로 중화학 공업 제품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엄청난 금융 특혜를 제공하는 한편 대규모 차관을 정부가 보증하면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화학 건설 계획은 1975년까지 2년간이나 동면 상태였다.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프레시안 : 구공탄 역할을 한 다른 요인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서중석 :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 김정렴은 미군 철수에 대비해 방위 산업을 건설하려는 야심찬 의욕을 박 대통령이 10년 가까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려면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해서 군수 산업, 방위 산업과 관련해 중화학 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점을 김정렴이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재미난 게 특수강이다. 앞에서 중기계 등을 이야기했는데 특수강 등 4대 핵심 공장 건설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본에 차관을 요청했을 때 일본의 아주 큰 회사들인 후지철강, 야하타제철소, 니혼강관, 이 3사 대표들은 "경제성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 아니라 극동 안보 문제, 나아가서는 직접적인 일본의 안보 문제와 관련지어 이 사안을 다뤄야 한다"고 하고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 지원하자"고 결정했다. 방위 산업과 중화학 공업, 박정희 정권과 일본의 군사 전략의 관계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요인, 구공탄 같은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한국이 중화학 공업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함께 선진국에서 중화학 공업이 사양 산업화한 점이었다. 1970년 서울에서 열린 제2차 한일경제협력위원회 총회에서 대륙 침략의 만주 인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한일 관계의 막후 인물이던 야쓰기 가즈오가 '한일 장기 경제 협력 시안'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일본의 노동 집약적 산업과 철강, 조선, 석유화학, 전자 공업 등 사양 산업을 남한에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남한을 일본 경제의 하위 생산 기지로 포섭하겠다는 뜻이었다. 또 한일 합작 회사에서 노동 쟁의를 금지할 것도 요구했다.

당시 한국은 노동 집약적 상품에 중점을 두기가 어려웠다. 선진국의 수입 규제가 강화되고 있었고 태국 등 후발 개발도상국의 추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못지않게, 어떤 면에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국, 일본, EC(유럽공동체, EU의 전신)의 중화학 공업 여건이 변화한 것이었다. 일부 중화학 공업의 공해 문제로 환경 개선 시민운동이 유럽, 일본에서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1973년 유가 파동을 맞이한다. 유가 상승으로 임금도 상승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이 시기에는 다국적 기업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국제 자본 이동 및 기술 이동이 용이해졌다. 그러면서 노동 집약적, 에너지 집약적 중공업을 선진국에서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에 이런 것들을 팔기 위해 상업 차관까지 알선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철강, 비료, 조선 등 사양 공해 산업이 이 당시 한국에 많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한일 경제 협력 구상 아래 사양 산업들의 이전을 적극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중화학 공업 공장 신설에서 규모의 경제라는 게 작용하고, 또 최신 시설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진국보다 유리하게 돼버리는 국면이 나타난다. 이것도 한국, 대만 같은 나라에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대만의 경우 1972∼1973년경부터 중화학 공업화에 박차를 가해 에틸렌 23만 톤 플랜트 공사를 완성하고, 1974년에 중국제철회사, 중국조선회사를 설립하고 철강, 석유화학, 조선 공장을 활발하게 조성했다. 10대 공업이라는 대규모 중화학 공업화가 장개석 아들 장경국을 중심으로 야심차게 추진됐다. 재벌 위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한국과 달리, 장경국은 국유 공영 기업을 통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고 중소기업도 일정한 역할을 맡게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대조적이었다.

중동 특수와 중화학 공업화, 그리고 재벌의 영토 확장 전쟁

프레시안 : 유신 체제 후반기에 과잉 중복 투자가 문제가 될 정도로 중화학 공업 붐이 일었다.

서중석 :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외의 여러 여건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지만 1975년까지는 기업 쪽에서 별로 호응하지 않았다. 여러 혜택을 줬는데도 그랬다. 이런 상태에서 엄청난 경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게 바로 중동 특수였다. 중동 건설 특수 덕분에 현대뿐만 아니라 여러 대기업이 그야말로 노다지를 캤다. 기업들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렇게 되니까 이 대기업들이 국내 건설업계에 막 뛰어들었다. 이 무렵 부동산 투기가 크게 일어나는데, 재계는 물론이고 한국인들 모두 들떠 있었다.

이렇게 중동 경기로 기업의 재무 구조가 크게 개선되고 호경기가 도래한데다가 정부에서도 적극 권하니까, 그간 주저하던 대기업들이 한꺼번에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적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중복해서 막 뛰어들어버렸다. 설탕, 모직 같은 소비재 산업에 주력해 한국 최대 재벌이 됐다고 해서 비난을 많이 받았던 삼성도 1977년 대대적인 체제 개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소비재 재벌의 대명사 격이던 삼성은 박정희 정권 시절 전자, 건설, 석유화학 등에 뛰어들었다. 자동차는 나중에 창업주의 아들(이건희)이 뛰어들었다가 안 되지만, 자동차를 빼놓고 거의 모든 중화학 공업에 삼성도 조금 늦지만 뛰어들었다. (1977년 삼성은 삼성종합건설을 설립했다. 그에 앞서 1974년에는 삼성석유화학을 만들었다. 전자 부문에서 삼성은 1969년 삼성전자, 그리고 일본과 합작해 삼성-산요 전기를 세웠다. 1975년 삼성전기로 이름을 바꾼 삼성-산요 전기는 1977년 삼성전자에 합병된다. 1977년 삼성전자는 컬러 TV 양산 체제를 갖추고 수출을 시작했다. '편집자')

문제는 또 여기서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중화학 시대가 오게 되는데, 중화학 시대가 열리니까 정부가 앞장서서 중화학 공업 과열을 부채질했다. 1975년까지 잘 안되다가 재벌들이 뛰어들어 이제 유신 체제 경제를 살리는 것 같으니까,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의 경제 관료를 비롯한 여러 관련 경제 관료들이 충분한 검증 없이, 경제 성장을 단숨에 높이는 계기로 인식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어떤 사람은 "충동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표현했더라.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일관성 없이 단편적으로 추진해 과열, 과잉 투자를 자초했는가 하면 재계에서는 끊임없이 새 계획을 제시하면서 삼성, 대우, 럭키(오늘날 LG) 등이 모두 중화학 체제로 탈바꿈했다. 그러면서 새 사업을 일으켰다. 정부에서 적정하게 분배해 과열 경쟁을 막아야 하는데, 중화학 공업에 뛰어든 대기업들 또는 그 대기업 계열에 뛰어들려는 기업들이 정부의 구획 정리에 반발했다. 그러다보니까 정부의 중화학 구획 정리가 원칙이 없고, 모처럼 원칙을 정해도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복 투자가 일어나고 엄청난 과잉 시설이 들어서게 됐다.

▲ 포항종합제철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 ⓒ연합뉴스


유신 보위 위해 '중화학 무리수' 두다 위기 자초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큰 위기를 맞는다. 외채 누적, 재벌 비대화, 살인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물가 문제 등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 투자가 맞물린 결과다.

서중석 : 재벌들이 선발 주자건 후발 기업들이건 앞다퉈, 심지어 형제지간에도 경쟁하면서 서로 큰 규모의 중화학 공업을 세우려고 뛰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중화학 공업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한다. 거대 시설, 대규모 자본을 요구하는 장치 산업인데, 그건 대량 생산과 판매, 거대 이익을 가능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화학 공업의 어떤 부문에 뛰어드느냐에 따라 재벌 순위를 바꿀 수 있었다는 말이다. 즉 재벌의 영토 확장, 대형화, 비대화로 가는 첩경이었다. 정부는 이를 지원하고 보호해주기로 다 약속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런 과잉 설비 투자가 중복해 생긴 것이다.

경제 전문가 박병윤에 따르면 이 당시는 재계 최고의 황금기였다. 기회를 잘 잡으면 무명 기업인도 재벌 스타덤에 오를 수 있고 기성 재벌은 더욱더 규모를 확대할 수 있어서 모두 필사적으로 정부의 앞장에 서가지고 영토를 분할했고, 정부가 구획 정리 작업을 하면 더 심한 과열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아파트 청약과 비슷했다고 한다. 청약 투기처럼 과열 현상이 일어나 정부는 손을 뗄 수도, 더 깊이 개입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졌고, 구획 정리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속에서 재계의 각축전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병윤은 당시 <한국일보> 경제면을 맡았던 사람인데, 그때 <한국일보> 경제 기사가 괜찮았다.

이러한 중화학 공업이 박정희 1인 유신 체제의 발목을 잡고 유신 체제가 붕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자 없이 뛰어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양행은 내자 비율이 8.4퍼센트, 쌍용중기(오늘날 STX)는 11.2퍼센트, 삼성중공업도 15.7퍼센트에 불과했고, 중화학 공업에 뛰어든 기업들의 평균 자기자본 비율이 20퍼센트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심각한 내자 부족으로 정부의 긴축 기조를 위협했고, 또 해외 시장을 목표로 중복 과다 투자를 했는데 해외 시장 진출은 어렵게 되면서 엄청난 시설이 유휴화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1978년 말에 터진 제2차 석유 파동이 1979년에 내습해버렸다. 중화학 공업도 석유하고 관련이 깊지 않나. 1차년도는 그럭저럭 넘겼지만 2차년도에는 한국도 큰 피해를 본다. 물론 1980년대에도 중동 특수가 여전히 큰 역할을 하지만, 어쨌건 석유 파동이 내습해 한국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이 시기 정부는 중화학 공업 기술 수준을 높이도록 뒷받침하고, 제품의 질을 국내외에서 검증해 제대로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인가도 따져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대한 외자를 끌어들여 대규모 공장을 세운 다음 막 수출하게 하려는 식으로 해서 유신 경제를 띄우려 한 것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1975년까지만 대통령을 하고 그다음에 김종필이든 김대중이든 혹은 또 다른 누구든 대통령이 됐더라면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 투자 등이 불러온) 1970년대 말과 같은 사태, 1980년 초까지 이어지는 그런 사태는 안 일어났을 것이라고 본다. 중화학 공업화는 대세였다. 한국으로서는 대만과 함께 그쪽으로 안 갈 수가 없었다. 그건 누가 집권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고 난 본다. 그런 상황에서 김종필이나 김대중 같은 사람은 중화학 공업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중화학 공업을 계속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책으로 갔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유신 체제에서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유신 보위이지 않았나.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반공과 경제 성장밖에 없었다.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계속 국민에게 주입해 철통같은 병영 체제로 국민들을 몰아가고, 또 '이렇게 경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아울러 이 당시 중화학 공업이 어떤 중화학 공업이었느냐 하는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1950년대부터 한국에서 중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중화학 공업 또는 중공업은 생산재 공업 시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박희범도 그걸 강조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기에 있었던 중화학 공업은 노동 집약적 소비재 공업의 성격을 지닌 석유 정제 및 석유화학 제품, 최종 화학제품, 가정용 전자·전기 제품, 자동차, 선박 등에 주로 집중했다. 생산재 부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철강 정도였다. 그것이 국내 산업 내부에서 가질 수 있는 효과는 미약했다. 분업 효과가 별로 없었다. 중화학 제품 가공 수출의 성격이 강했고, 그로 인해 일반 기계 부문에서 비교 우위를 갖지 못하고 생산재 수입을 유발해 무역 수지 적자를 누적시켰으며 국내의 다른 부문에 대한 파급 효과를 약화시켰다. 중화학 공업 문제가 얼마만큼 유신 체제를 뒤흔들었는가는 나중에 유신 체제 붕괴 과정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프레시안 : 1970년대 후반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 투자가 심각한 위기를 낳은 건 사실이지만, 1980년대 후반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박정희 집권기에 그렇게 투자해놓은 덕분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그건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3저 호황을 맞으면서 중화학 공업이 살아난다. 그 3저 현상이 1980년대 중반부터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1986∼1988년에 만개하는 것인데, 그게 없었다면 '중화학 공업이 한국 경제를 망쳤다', 이런 얘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3저 호황이 오면서 중화학 공업이 효자 노릇을 하고 수출의 역군이 되는 건데, 3저 호황은 중동 특수처럼 우연한 요소였다. 우리가 예기(豫期)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데, 결과적으로 잘된 것만 가지고 '처음부터 잘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그렇지 않나.

아울러 결과적으로 잘된 면이 있지만, 꼭 잘된 것만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너무나 편중된 구조, 예컨대 삼성전자가 망하면 한국 경제도 같이 망하게 돼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 같은 문제점도 여럿 있지 않나. 이런 점을 두루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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