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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현대, 고맙다? 한국 고질병 '잔혹사'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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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현대, 고맙다? 한국 고질병 '잔혹사' 잊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7> 경제 개발, 열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0∼1970년대에 한국은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도 발생했다. 그 해악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서중석 : 지금까지 박정희 집권 18년간의 경제 정책, 경제 발전이 이뤄진 원인, 그것의 역사적 배경 등을 쭉 살펴봤다. 18년간 엄청난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고, 그 시기에 경제 발전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18년간의 경제를 평가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게 18년 동안 관행처럼 돼 있다 보니까 그 뒤의 정권이 그걸 이어받지 않으면 경제가 운영이 안되는 식으로까지 한국 사회가 돼버렸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처럼 된 것이 있다. 너무 심각해서 그 병이 무슨 병인지도 나중에 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상황까지 간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을 이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일 큰 병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건 서유럽이나 북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하고도 크게 다르다. 장개석(장제스)과 장경국(장징궈)이 이끈 대만하고도 아주 다르고,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배한 스페인과도 다르고, 이탈리아하고도 다르다. 이건 정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1970년대 야당의 중진이었던 고흥문은 "대기업에 의한, 대기업을 위한, 대기업의 정부"라고 유신 체제 시기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그만큼 경제가 재벌 중심으로 움직이게 됐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박정희 정권 시대에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재벌들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혜를 발판으로 성장한 재벌…"대기업에 의한, 대기업을 위한, 대기업의 정부"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재벌이 커지나.

서중석 : 첫 번째는 (5.16쿠데타 후 부정 축재자 처리를 비롯한) 과거사 정리 과정에서 정부가 차관을 알선하고 보증해주지 않나. 그런 과정에서 국제적 시야를 키우고 국제적 경영 수법도 알게 되는 일부 기업이 커진다.

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서 부실기업 정리가 이뤄지고, 1972년에는 경제 쿠데타로 불리는 8.3조치가 있게 된다. 이런 부실기업 정리와 8.3조치도 대기업 중심으로 한국이 가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 8.3조치 당시 대기업들의 자본이 지극히 부실해서 재무 구조가 몹시 나빴다. 대부분이 부채가 누적된 부실기업들이었다. 그런 기업들이 8.3조치라는 엄청난 특혜적 조치를 받아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8.3조치는 1960년대 대외 지향적 경제 개발이 낳은 경제적 모순들을 비정상적인 충격 요법으로 해결하려 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8.3조치는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전격 발표된 대통령 긴급 명령이다. 기업과 사채권자 간의 채권·채무 관계를 무효화하고, 기업이 사채를 신고하면 원금 상환 시기를 늦추고 장기 저리 대출로 대체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초법적인 사채 동결 명령은 사채를 많이 쓴 부실기업에 대한 특혜였다. 사채 신고액의 3분의 1이 기업주가 자기 기업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한 '위장 사채'였다는 점도 논란을 키웠다. '편집자')

프레시안 : 중화학 공업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서중석 : 한국이 재벌 중심으로 가는 데에는 중화학 공업화 과정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까 여기서는 한두 가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하자.

박영구 교수는 중화학 공업화가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시장 규모를 체계적으로 급속히 확대한 반면 그 결과 대기업의 확장과 발언권 강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그 이후 대기업이 기술, 정보 등 여러 면에서 정부를 압도하는 전환점이 됐다고 하면서 재벌 중심으로 중화학 공업화가 이뤄진 것에 대해 일정한 비판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 공업화와 관련해 재벌을 얼마만큼 지원해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일반 은행인 예금 은행, 그리고 특수 은행인 산업은행의 시설 자금 대출 총액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그 비중이 1974년에 49퍼센트였는데, 이것도 큰 것이지만, 1978년에 가면 70퍼센트나 된다. 그러니까 당시 은행의 대출 총액은 대부분 그리로 갔다는 것을 말한다.

5대 재벌 기업의 부가가치 비중과 성장률을 보면 1973년에 부가가치 비중이 3.5퍼센트였던 것이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며 한국 경제의 위세가 대단했던 1977년에는 8.2퍼센트가 된다. 두 배 이상으로 커진 것이다. 중화학 공업화가 많이 이뤄진 1973년에서 1978년 사이에 GDP 성장을 보면 연평균 성장률이 9.9퍼센트로 나온다. 그런데 10대 재벌의 경우 무려 28퍼센트가 넘었다. 이 시기에 재벌은 세 배 가까이나 더 빠른 성장을 했다. 그래서 1973년에서 1978년 사이에 재벌의 총 부가가치 성장률을 5대 재벌에 한해서 본다면 연평균 성장률이 30.1퍼센트나 된다.

재벌이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독과점 문제가 심각했다. 공산품의 큰 부분을 재벌이 장악했다. 정부는 1977년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독과점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썼다고 한다. 1977년에서 1980년까지 시장 구조를 보면 재벌 상위 3사가 공산품 총수 가운데 50퍼센트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90퍼센트 수준이나 된다. 독과점 품목이 이렇게나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변화를 보면 현대가 1974년에 9개 계열 기업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31개로 늘어난다. 이건 정주영 동생이 운영한 현대양행은 뺀 것이다. 대우는 이 시기에 10개에서 35개로, 럭키는 17개에서 43개로, 삼성은 24개에서 33개로 늘어난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계층별 소득 격차도 아주 큰 변화를 보였다. 전체 소득에서 상위 20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에 41.6퍼센트였는데 1980년에는 45.4퍼센트나 된다. 그 반면에 하위 40퍼센트는 1970년에 19.6퍼센트였는데 1980년에는 16.1퍼센트로 줄어들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 욕심, 재벌 편향 정책, 성장률과 덩치 키우기에 과도하게 집착한 파행적인 경제 운영을 한 묶음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일본이나 대만에서는 중소기업을 육성했고 대만의 경우 중화학 공업화도 국영 기업 중심으로 했던 것과 달리 박정희 정권에서는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정부가 제시한 발전 방향으로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게 했다.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바로 재벌이다. 유신 체제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빠른 경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사실 경제 성장을 빠르게 달성하려 한 것도 유신 체제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 경우 일반 관료보다도 소수의 핵심 권력, 그러니까 청와대 비서실이라든가 경호실이라든가 중앙정보부 같은 쪽의 의사에 따라 핵심 사안을 결정하는 것이 예사였다. 상명 하달식의 권위주의, 그리고 한쪽으로 편중된 지원 같은 것을 통해 성장 만능주의를 추구하면서 전투적으로 성장 속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했던 것이다. 사회를 통제하는 것과 함께 경제를 통제하는 데에도 소수의 선택된 집단, 곧 재벌 중심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아닌가. 속도를 내는데도 재벌 중심으로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건 또 정경유착을 하기에도 좋았다. 소수니까 정경유착이 훨씬 더 잘될 수 있었다. 중소기업 수천 개를 상대한다고 생각해봐라. 특수 기관에서 정치 자금을 달라고 할 때 그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점에서도 대만, 스페인과 달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재벌들, 정말 고맙다? 재벌이 만든 어두운 역사 기억해야

프레시안 : 각종 특혜를 누리고 정경유착을 일삼으며 세력을 키운 재벌의 어두운 역사는 눈감고 재벌 예찬론만 이야기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 일각에 있다. 걱정스러운 일이다.

서중석 : 여기서 한국 경제의 견인차이기도 하지만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숙제이기도 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보여주는 재벌 문제를 일괄해서 살펴보자. 1990년대 이후 해외여행객이 부쩍 늘어났는데, 여행객들이 외국에 다니며 긍지를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모모 재벌의 광고판이 참 많다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서 한국에 대한 자신감도 갖고 '저 삼성, 현대, 엘지가 없으면 한국이 죽는 것 아닌가. 재벌들, 정말 고맙다', 아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내가 많이 봤다. 1990년대 중후반, 그리고 2000년대 여행객들 속에서 그런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 그런데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특히 1960∼1970년대에 재벌들이 일반 국민들한테 어떻게 비쳤느냐. 그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이해할 때 양 측면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연 현재 재벌 문제가 없느냐. 어쩌면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이런 점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재벌은 형성 과정에서 욕을 많이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해방 직후 모리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되지만, 다만 그 당시 최대 부호 중 하나이던 박흥식 같은 경우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한국 재벌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건 귀속 재산 처리에서다. 전에 말한 것처럼 미국은 아주 강력하게 귀속 재산을 불하하라고 요구했다.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귀속 재산을 불하하게 되는데, 정부의 사정(査定) 가격이 시가에 훨씬 못 미쳤다. 시가의 4분의 1이나 3분의 1밖에 안됐다. 거기다 규모가 큰 것일수록 상환 기간은 예컨대 15년, 이런 식으로 길었다. 제1회 납입금을 얼마 안 내고 큰 기업체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귀속 재산을 어떻게 불하받느냐, 이것이 재벌 형성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그다음에는 원조 물자 획득이다. 이게 왜 또 중요한가 하면 굉장히 심한 저환율 속에서 이걸 획득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 500대 1이라는 정말 비현실적인 저환율(환-달러)로 원조 물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 이건 시중 가격보다 엄청나게 싼 것이었다. 밀가루건 목화 쪽이건 모직 쪽이건 설탕 쪽이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한국 재벌들이 삼백 산업을 중심으로 커간다는, 즉 밀가루, 방직·모직, 설탕 등 경공업, 소비재 산업에 너무 치중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 이후,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 이후에 재벌들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는 앞에서 다 이야기했는데 뭐니 뭐니 해도 정부가 차관을 보증하면서 도입을 알선해준 것하고 금융 특혜, 이 부분이 큰 역할을 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만들어진 재벌은 매우 기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한국 재벌은 힘이 셀 뿐만 아니라 정말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걸 문어발 재벌이라고 1970년대부터 참 많이 부르고 있는데, 뭐냐 하면 안 하는 게 없는 것이다. 콩나물이건 두부건 빵이건 뭐건 돈이 될 것 같으면 다 하는 것이다. 1964년 3분 폭리가 일어날 때 김대중 의원이 모 재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재벌은 매판성을 띠는 설탕, 모방업 같은 소비재 생산에 치중하고 있는데 그것도 재료는 외국에서 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빵, 비누 등으로 중소기업을 도산시키고 중산층을 몰락시켰다." 이런 발언을 하면서 그 재벌 쪽과 상당한 논란을 벌이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재벌은 수십 개의 계열 기업이라는 걸 갖고 있는데 연관성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외국의 대기업은 그렇지 않다. 연관성이 있는 큰 기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주력 기업 중심으로 재벌을 재편성하도록 정부가 유도해야 한다고 1970년대부터 수십 년간 이야기했지만, 그게 안 된다. 하여튼 돈이 된다 하면 재벌이 다 뛰어드는 식으로 일반화돼 있는 한국식 재벌이 탄생하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재벌들은 돈이 생기는 데에는 다 뛰어드는 면이 있다. 해방 직후 모리배들이 비난을 무척 많이 받았는데, 재벌들도 1963년과 1964년에 3분 폭리로 참 비난을 많이 들었다. 그 당시 큰 기업들이 밀가루, 설탕, 시멘트로 엄청난 이득을 낸다. 예컨대 한 자료에는 밀가루로 6억 원 내외, 설탕으로 약 10억 원, 시멘트로 3억여 원, 이런 식의 폭리로 30억 원에서 40억 원을 대기업에서 챙긴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다른 데에서까지 막 나타났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투기다. 재벌들은 그런 데에는 이미 혜안이 있었다고 할까, 그래 가지고 1960년대 중반부터 부동산 투기에 굉장히 열을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1964년 11월 이정환 재무부 장관은 "재벌들이 자체 자금으로", 이건 기업을 운영해야 할 돈이라는 뜻인데, "건물, 대지 등 부동산에 치중하고 있다. 정부 특혜도 소비 성향 기업을 키우는 데 일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당히 놀라운 비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열흘도 안 돼서 쫓겨났다. (이정환 장관은 일부 몰지각한 재벌의 부당한 치부가 경제 발전에 큰 해독을 끼치고 있으며, 재벌들이 자체 자금은 부동산에 투자하고 정부의 특혜 융자를 받아 기업 운영 자금으로 쓴다고 비판했다. 또한 일부 관리와 언론 기관이 재벌들의 이러한 부당한 치부를 두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 후 이정환은 재무부 장관에서 돌연 경질돼 산업은행 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장관에 임명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았던 때다. '편집자')

서울의 제일 노른자 땅이라 하는 것들을 큰 재벌 몇 군데에서 나눠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재벌들은 1960년대부터 1980∼1990년대에 걸쳐 부동산 투자를 엄청나게 했다.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 없는 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하여튼 한때는 재벌들의 이익이 기업에서 나오는 것보다도 부동산 투기 쪽이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부동산 투기가 활화산처럼 일어날 때는 '부동산 투기 이득으로 재벌들이 견디고 있다', 이런 심한 얘기까지 나오고 그랬다. 이런 부동산 투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재벌들은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중소기업 영역까지 재벌들이 다 해먹는다.

재벌이 국민들한테 그토록 욕을 얻어먹은 이유

프레시안 : 재벌은 기업 윤리와 거리가 먼 행태를 거듭했다. 재벌 형성 과정을 되짚어보면 재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비뚤어진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 나무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똑바로, 늠름하게 자란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중석 : 재벌들은 자본주의 기업 윤리를 상실했다는 비난을 1960∼1970년대 언론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다. 한국 경제의 모습이 그야말로 그대로 비치는 존재가 재벌 아닌가. 그런 것의 대표적인 예가 재벌 세습이다. 탈세를 해서까지 재벌들이 자식한테 재산을 상속하고, 지분율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한국 경제의 특성을 잘 활용해 세습을 한다. 당대에 수십 개의 계열 기업을 거느리고 황제 경영을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한테 그런 식으로 승계하는 것은 한국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와도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재벌들은 이런 걸 넘어서서 혼맥으로도 정계와는 물론이고 재벌들끼리 서로 얽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한국 경제의 제일 큰 어려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은 한국 경제가 몇 개 재벌에 의존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아울러 역시 1970년대부터 끊임없이 나온 이야기인데, 재벌들은 사회나 국가나 민족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다시 말해 번 돈의 사회 환원, 공공 부문에 대한 헌신 같은 것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앤드루 카네기 등이 사회에 환원한 예를 언론에서 계속 강조했다. (한국 언론은 사회 환원에 초점을 맞춰 앤드루 카네기를 조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892년 '홈스테드 학살'을 비롯한 잔혹한 노동 탄압을 빼놓고는 앤드루 카네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편집자')

한국 재벌들이 국민들한테 그렇게 욕을 얻어먹었던 이유는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서 금융 특혜라든가 수출 상품에 대한 정부의 이윤 보장이라든가 그 밖의 각종 특혜들에 의해 재벌이 된 것과도 관련 있다. 그런 각종 특혜는 국민의 세금과 관련이 많이 되는 것들이고 국민의 희생에 의해, 특히 내수 희생에 의해 재벌이 성장한 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다른 나라 기업보다도 사회 환원을 많이 해서 국민에게 충분히 보답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재벌이 커졌기 때문에 사회성과 경제성을 망각한 재벌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재벌들이 문화 재단을 안 만든 건 아니다. 거의 다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우문화재단과 성곡재단, 이 두 개만이 이름에 걸맞은 방식으로 운영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철환 교수가 1970년대의 기업가에 대해 적절한 이야기를 했다. "1970년대의 기업가는 장래에 대한 명백한 전망이나 능력에 맞도록 투자한 것이 아니고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의지와 특혜만 믿고," 이것에는 재벌 순위 선두로 나서기 위한 측면도 강했는데, "무모하리만큼 과다한 투자, 그와 함께 부동산 투기를 했고, 기업가 정신이나 사업에 적합한 경영 기법이나 기술의 확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슘페터가 말한 바 있는 기술 혁신에 의해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정부 시책에 편승해서 무모하게 사업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벌이 이뤄졌다." 전 교수가 이렇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그런 식으로 정치 권력과 밀착했기 때문에 정경유착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시기 경제와 관련해서 제일 큰 문제 중 하나는 정경유착이 아주 심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야기한 정치 자금이니 선거 자금이니 하는 게 다 정경유착에서 나오는 건데 그렇게 큰 정치 자금, 선거 자금이 꼭 필요했던 건가? 1995년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될 때 국민들이 정말 깜짝 놀라지 않았나. 도대체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비자금이 수천억 원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그런 것을 가질 수가 있느냐고들 그랬다. 그것도 부정하게 거둬들인 검은돈 중 쓰고 남은 것일 것이다. 하여튼 이 정경유착은 권력을 아주 뒤틀리게 하고 부패시키고, 기업은 기업대로 경제 논리나 자본주의 정신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에 부정부패를 만연하게 하고 가치관 같은 걸 전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동안 쭉 정경유착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여기서 더 이야기할 건 없지만 하여튼 우리나라에서는 인허가를 받는다는 게 1950년대부터 어쩌면 지금까지도 굉장한 이권 같은 게 돼버렸다. 사업과 관련해 인허가를 받을 때, 또 차관 보증을 받을 때 얼마나 힘들었나. 또 1970년대까지는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기도 그렇게 힘들었다. 은행 문턱에 올라선다는 것이 보통 '빽' 가지고는 안 된다고 그랬다. 금융 특혜 같은 걸 통해 정경유착이 이뤄진 것과 관련된 문제다.

▲ 1996년 8월 26일 수의를 입고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 ⓒ연합뉴스


청와대의 '재벌 사랑'에 뒷전으로 밀려난 중소기업

프레시안 : 정경유착과 관련해 짚어볼 문제 중 하나는 재벌들이 자신들을 피해자인 것처럼 포장하는 대목이다. 예컨대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세상에 드러난 후 이들에게 거액을 준 재벌 회장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데,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재벌들이 하나같이 '어쩔 수 없이 돈을 줬다'는 태도를 취한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시쳇말로 찍히면 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독재 정권의 눈 밖에 난 기업이 공중 분해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다고까지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재벌들의 그런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와 손잡고 오랫동안 엄청난 특혜를 누린 재벌들을 피해자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의 재벌 편향 정책들만 살펴봐도, '어쩔 수 없이 돈을 줬다'는 식의 재벌 측 해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이처럼 재벌 위주 정책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중소기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중석 : 재벌 중심으로 한국 경제가 편성됐다는 건 중소기업이 그만큼 큰 어려움을 맞게 됐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한 나라 경제에서 중소기업이 해야 할 역할, 차지해야 할 비중 같은 것이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끔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만의 장개석과 장경국이 중소기업을 많이 육성했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서도 그렇게 했다는 걸 강조했는데, 한국에서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제 건설에 뛰어든 장면 정권도 중소기업 육성을 중요 정책으로 제시했다. 예산에 특별히 반영하고 그랬다. 그런데 모든 걸 성장 속도에 맞춰 군인 정신으로 처리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은 중소기업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은 자유 기업의 상징이자 중산층의 원천으로서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데, 또 사회적·정치적 안전판으로 중요시되고 있지 않나. 수출과 외자에 의한 산업화라는 박정희의 정책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를 이끌어가게 하는데, 그 때문에 중소기업은 박 정권 아래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았다. 얼마나 홀대를 받았는가는 성장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964년에서 1979년 사이에 전체 제조업은 연평균 22.4퍼센트 성장했다. 굉장한 성장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은 같은 기간에 연평균 16.4퍼센트밖에 못했다.

노동자 숫자를 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1960년에서 1979년 사이에 중소기업에 속한 노동자 숫자를 보면, 19만 명이었다가 1979년에는 84만 명으로 늘어났다. 약 4.4배로 증가했다. 그런데 대기업은 같은 기간에 처음에는 6만 명으로서 중소기업 노동자 19만 명의 몇 분의 1밖에 안 됐는데, 1979년에 가면 127만 명이 된다. 20배가 넘게 된 건데, 참 무서운 간극이 생겨버린 것이다. 특히 500인 이상 대기업을 보면 같은 기간에 27.8배나 됐다. 대만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화학 공업에서 중소기업의 역할이 대단히 큰데도,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크게 밀려나고 말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한국 중소기업이 얼마나 취약한가가 더 잘 드러난다. 미국을 보면 1972년에 중소기업의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58.2퍼센트나 차지한다. 부가가치는 51.4퍼센트나 된다. 일본의 경우 1978년 통계를 보면 노동자 수에서 71.4퍼센트, 부가가치에서 57.1퍼센트나 된다. 그러니까 내수도 일본이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중심이라는 점도 굉장히 중요하다. 한마디로 탄탄한 것이다. 서독도 이와 아주 비슷하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냐. 앞에서 노동자 수를 이야기했는데, 노동자 숫자와 부가가치액 이 두 가지가 각각 1960년에는 76.0퍼센트, 66.3퍼센트였다. 장면 정권 때만 해도 외국에 지지 않는다. 물론 한국 경제가 낙후해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1979년에 가면 노동자 수에서 39.7퍼센트, 부가가치액에서는 28.5퍼센트로 떨어져서 미국, 일본, 서독 등 선진 공업 국가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는 대기업의 내구 소비재, 철강 생산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와 달리 비중이 낮은 중소기업의 경우 기계, 금속 제품, 산업용 화학 등 생산재 공업이 높은 비중을 차지해 자립적 산업 구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중소기업에 관해서는 이경의 교수 글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이 교수는 대기업이나 중화학 공업이 한국에서 자립적 산업 구조와 관계없이 저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고 해외 시장에 치중했다고 밝혔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간의 관련성을 높여 중층적 산업 구조나 분업 구조를 형성하고 자립적 산업 구조로 우리나라가 가도록 해야 하는 건데 실제로는 역행했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재벌이 중소기업 부문을 잠식하고 잡아먹고 해서 중소기업 도산의 일역을 맡기도 했다. 자본 축적 메커니즘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중소기업이 살아남지 못하고, 시장을 지배하는 대기업에 종속적인 지위로 인해 도태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재벌 중심으로 경제 이끈 박정희, 경제 민주화 저버린 박근혜

프레시안 : 2012년 대선을 전후해 경제 민주화가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된 것은 오랫동안 재벌의 폐해가 쌓인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당시 박근혜 후보조차 경제 민주화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 민주화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재벌 문제 해결을 비롯한 경제 민주화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과제로 남아 있다.

서중석 : 예전에 제빵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글에서 본 적이 있다. 어느 중소기업에서 좋은 빵을 만들어서 호감을 사고 반응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랬더니만 재벌 가족이 여기에 뛰어든 것이다. 그럴 경우 가격을 대폭 낮춰 뛰어들어버리니까 중소기업으로서는 가격 경쟁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판매망 부분에서 재벌 쪽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이 있지 않나. 중소기업이 이런 시장 메커니즘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이 중소기업은 도태되고 말았는데, 그 후 그 재벌 쪽에서 만든 빵이 더 좋았느냐, 값이 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고 쓰여 있다.

몇 대 재벌 중 하나에 들어가는 대재벌인 모 재벌은 1970∼1980년대에 참 악명이 높았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면서 중소기업을 잠식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 재벌에서는 하청 기업에 처음에는 굉장히 많이 주문해 그걸 생산하게 한 다음 갑자기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하청 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때 이 재벌이 그걸 인수했다. 정부가 외면한 것뿐만 아니라 재벌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 것도 중소기업을 참 힘들게 했다. 같이 살아가야 하고 분업 구조를 이뤄야 한국 경제가 내적으로 충실해질 수 있는 것인데, 이런 행태가 그걸 아주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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