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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빚 갚은 외채구조, '눈 가리고 아웅'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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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빚 갚은 외채구조, '눈 가리고 아웅' YS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⑥] 외환위기 전야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제문제 중 최대의 쟁점이 외채였다. 야당 후보들은 저마다 외채망국론을 들고 나와 전두환 정권을 공격했다. 반면에 방어논리가 빈약한 민정당 후보들은 빚 갚으라는 독촉장을 본 사람이 있느냐는 따위로 유치하게 대응했다.

정책대결이 아닌 시정잡배 수준의 공방이었지만 정책실패를 부각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정치판이 거꾸로 가는지 11년이 지난 1996년 15대 총선거에서는 지역감정과 인신공격만 난무하여 그 같은 모습조차도 볼 수 없었다.

1984년 말 외채규모는 434억 달러였다. 원화로 따지면 환율을 850:1로 쳐서 36조8900억 원이었다. 당시 국민이 3년 동안 내는 세금과 맞먹을 만한 빚이었다. 1985년에는 외채가 467억6200만 달러로 더욱 늘어나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국운이 들었는지 1986~1988년 3저호황이 몰아닥쳤다.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수출호황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이에 따라 외채도 1989년 293억7100만 달러로 크게 줄었다.

바깥에서 불어온 3저호황의 바람이 사라지자 1990년대 들어 경상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1995년에만 해도 경상수지 적자가 88억1700만 달러로 1994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연간으로 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그런데 1996년 들어 1~2월 적자가 32억9300만 달러에 달했다. 역시 사상최대의 규모였다. 김영삼 정권이 1996년 연간 억제목표로 삼았던 64억 달러의 절반을 두 달 만에 넘어섰던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증되자 이에 따라 외채도 급증하고 있었다. 1994년 말 568억5000만 달러였던 외채가 1995년 6월 702억2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불과 6개월 사이에 133억5200만 달러나 증가하여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관료집단은 나쁜 숫자를 감추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 까닭인지 그 이후 공식집계를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경상수지 적자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 점을 미루어 외채규모를 추정하면 1995년 말 780억 달러, 1996년 2월 800억 달러를 넘어섰던 것 같다. 1990년대 들어서만도 외채규모가 500억 달러가량 증가한 것이었다.

외채가 급증했던 원인은 정부나 기업이 3저호황에서 얻은 흑자를 관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단순조립-가공업종 위주의 저부가가치형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형으로 전환하는 데 소홀했다. 그리고 기업은 기술개발보다는 부동산 투자에 앞장섰다.

그 결과 무역수지가 만성적인 적자구조로 고착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김영삼 정권이 외채의 심각성을 알리지 않았고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처럼 경제홍보에 몰두해 외화낭비를 부추긴 측면이 컸다.

1995년 무역수지 적자가 통관기준으로 사상최대인 100억6000만 달러였다. 특히 대일무역 적자가 155억6000만 달러, 대미무역 적자가 62억7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일본은 한국을 제외하고는 주요 교역국과의 거래에서 흑자가 축소되고 있었다.

미국은 세계최대의 시장이고 가장 폭넓게 개방된 시장이다. 그런데 세계최대의 시장인 두 나라를 상대로 한 교역에서 적자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대기업 중심의 조립산업이 대외경쟁력을 상실하여 선진국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대만은 기술개발을 통해 제품가격을 인상함으로써 수출증대를 꾀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판매규모를 확대함으로써 수출증대를 도모했다. 결국 시설확충을 위해 선진국에서 자본재를 도입해야 하니 수출이 증가할수록 수입이 증가하는 산업구조로 고착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내의 비교우위론자들이 득세하여 농업의 생산기반이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곡물자급률이 27.7%로 떨어졌던 것이다. 공산품을 팔아 식량을 사먹자니 무역적자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화의 덫에 걸려 능동적 정책 능력 상실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뉴스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국내시장이 단시일 내에 과도하게 개방됐다. 그 결과 대미무역 적자가 급증추세를 보여 1995년의 경우 전년보다 6배나 늘어났다. 세계화 바람이 잘못 불어 수입사치품을 쓰는 데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당시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과소비 억제운동을 벌이려고 했으나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포기해야만 했다.

수입고가품이 범람하면서 무역수지가 더욱 악화되었다. 같은 이유로 사치성 해외여행이 유행병처럼 번졌다. 계절에 따라 피한여행-피서여행을 떠나고 골프-보신-쇼핑관광이 극성을 부려 현지에서 적지 않은 말썽을 일으켰다. 초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영어연수교육이 줄을 이었다. 이러니 1995년 여행수지 적자가 2억2300만 달러나 됐다.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려면 외자도입에 의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1995년 자본수지 흑자가 135억3000만 달러나 됐다. 이에 따른 이자지급액만도 53억6000만 달러에 달했다. 여기에다 국제수지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 은행의 외자도입을 더하면 그 규모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1995년 은행의 외자도입은 38억 달러나 됐다. 외자의 상당액을 외채를 상환하는 데 썼을 테니 빚내서 빚 갚는 꼴이었다.

무역적자를 축소하려면 환율을 적정수준으로 유지하여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OECD(경제협력기구) 가입을 목표로 자본-금융거래 자유화를 단시일 내에 급속하게 추진함으로써 외화유입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환율, 금융 등 동원이 가능한 정책수단이 제한되어 원화가치의 절상을 효율적으로 완화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정책수단이 세계화의 덫에 걸려 경제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권은 외채증가에 대해 궁색한 논리에 낙관론을 폈다. 총외채에서 대외자산을 제외한 순외채는 180억 달러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외자산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큰 외환보유고에는 자산이라고 보기 어려운 외국인증권자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GNP 대비비율, 채무상환 부담률, 이자부담률 등이 1980년대 중반보다 낮아졌다거나, 남미 국가들에 비해 경제체질이 양호하다는 따위의 논리로 문제의 중대성-심각성을 호도하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자세조차 보이지 않았다.

1996년 당시의 원화가치는 과거 10년간의 임금-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어 있었다. 수출촉진과 수입억제를 위해서는 환율을 크게 올려야 할 시급한 상황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의 도산이 급증하고 있었는데 그 원인도 과도한 수입증가에 있었다. 하지만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환율정책을 효율적-신축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입억제를 통한 저축증대만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었다. 채무상환 단계에 달한 외채구조의 심각성을 알려서 국민적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외환사정의 심각성을 알리지 않아 국가도 기업도 가계도 마찬가지로 흥청거렸다. 적자경영의 결과는 자명했다. 외환위기가 예정된 수순을 밟고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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