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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권, 세계화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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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권, 세계화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다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④] 외환위기 부른 무분별 개방

김영삼 정권은 미국이 채택한 국가발전전략인 '세계화'의 뜻도 잘 모르고 국정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추진했다. 그것이 결국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즉 국가경제 파탄이란 결과를 초래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1994년 11월 17일 호주를 방문했던 김영삼이 시드니에서 구상했다는 이른바 '세계화'를 요란하게 발표했다. 세계화를 통해 성장동력을 찾겠다는 소리였다. 세계화는 고질병인 쌍둥이 적자를 세계시장 개방을 통해 해소하려는 미국의 국가발전전략이란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미국은 1980년대 중반까지 쌍둥이 적자(재정적자-경상적자)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국내법인 통상법에 의존했다. 301조를 동원해 교역상대국에 모든 시장을 열라고 통상압력을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가히 19세기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국내시장도 1986년 7월 1일 미국 통상법 301조에 의한 일괄타결이란 방식에 따라 일차적으로 개방됐다.

미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 중반 '국경 없는 세계경제'(borderless economy)라는 국가발전전략을 수립했다. 미국의 상품-용역-자본-인력의 이동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군사력-외교력을 동원해 철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세계화 전략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95년 세계시장을 하나로 묶기 위해 WTO(세계무역기구)를 탄생시켰다. 이와 함께 지역화주의에도 나서 1994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출범시켰다. 그즈음 EC(유럽공동체)에서 경제통합을 목표로 출범한 EU(유럽연합)를 겨냥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전방위 FTA(자유무역협정)를 추진하면서 한국도 끼워 넣었다. 세계화와 지역화란 쌍칼을 들고 미국이 자국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계시장 개방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영삼 정권은 '세계로 미래로 뛰자'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더니 1995년 3월 반대여론을 묵살하고 '부자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외환-금융-자본시장을 개방하기에도 힘겨웠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OECD에 가입한다고 외환-자본거래를 사실상 전면적으로 자유화했다. 개방충격을 흡수할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았으니 그 후유증과 부작용은 심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이 내세운 가입 이유는 이 기구의 정보와 경험을 활용하면 국가경제를 선진국형으로 운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단순논리였다. 개방위험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추상적인 설명이었다. 선진국으로 행세하려면 거기에 걸맞은 조건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자본이동과 경상무역외거래의 자유화였다. 다시 말해 국경을 넘나드는 돈의 흐름과 금융 등 서비스 거래에 대한 제한을 최소화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할 사회적-경제적 능력을 가졌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뉴스

뜻도 제대로 모르고 밀어붙인 세계화…준비 없이 개방 대폭 확대

미국의 통상압력에다 OECD 가입이 겹쳐 자본-외환-금융시장이 한꺼번에 빗장이 풀리고 말았다. 그 결과 외국인직접투자나 상업차관보다는, 실물투자와는 무관한 단기자본의 유입이 급증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고질적인 고금리가 외자의 유입을 촉진하고 유출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경상수지는 적자인데 자본수지는 흑자여서 환율절상을 압박했다. 결국 수출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OECD 가입을 추진하던 1996년 8월말 현재 단기외자인 증권자금이 200억 달러, 해외증권발행이 60억 달러나 유입됐다. 해외현지금융도 그해 3월말 현재 224억 달러나 되었다. 빚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이에 더하여 외채가 6월말 현재 사상최대 규모인 702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 중에 1년 미만 단기외채가 56.4%인 396억 달러나 되었다.

외화가 넘쳐나니 그것이 빚인지도 모르고 너나없이 흥청거렸다. 정부, 기업, 가계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경제주체들이 도취상태에 빠진 모습이었다. 1996년 해외여행경비 등으로 80억 달러나 썼다. 당시 계 타서 비행기 탄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해외여행이 유행했으니 그만큼 썼을 것이다.

석유수입에 200억 달러를 소비했다. 차량증가만 봐도 에너지 낭비가 얼마나 심한지 알 만 했다. 올림픽을 개최한 1988년 말 전국의 차량대수가 200만대였는데 1997년 7월 1000만대를 돌파했다. 식량수입에 100억 달러를 사용했는데 음식 쓰레기가 100억 달러어치나 발생했다.

세계화가 정치구호로 변질되어 국민으로 하여금 부자 나라에 산다는 허위의식을 심어 낭비생활을 일삼게 만들었다. 'OECD 가입은 곧 선진국이다,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었다'느니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기업들도 세계화 열풍에 편승해 무분별하게 해외투자를 벌였고, 그것이 부실화되어 외환위기를 촉발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인데 한국보다 못한 나라들도 OECD 회원국이라며 가입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은 OECD의 성격을 모르는 소리였다. OECD의 모체는 서유럽의 전후복구를 위한 미국의 마셜 플랜에 근거한다. 그래서 경제력이 취약한 그리스, 터키가 창설 회원국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당시 체코에 이어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동구권 국가들이 가입을 추진했으나 이 문제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 국가는 서유럽과 손을 잡기 위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에 가입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맹주 러시아가 동구국가의 서구 편입을 견제하고 있었다.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무마하려는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먼저 OECD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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