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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의 '토지공개념', 왜 실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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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의 '토지공개념', 왜 실패했을까?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①] 기득권층 반발로 무산

노태우 정권은 선거에 의해 탄생했지만 따진다면 전두환 정권과는 이란성 쌍생아라고 볼 수 있다. 이 태생적 한계는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과의 단절이라는 멍에를 안겨주었다. 대통령 선거 득표율 36.6%, 여소야대의 국회의석 분포는 지지기반 확충이라는 정치적 과제마저 던져주었다. 군사독재정권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야만 전두환 정권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노태우는 선거라는 절차를 거쳤지만 그 자신이 신군부의 수괴라는 점에서 군벌체제의 절반의 종식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군사독재체제에서 내재화됐던 정치적-경제적 불만이 일시에 폭발했다.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서 비민주적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집회가 터져 나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노태우는 신군부 방식의 강압통치로는 사태를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노태우는 산업의 현장, 생활의 터전에서 분출하는 소외계층의 욕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형평, 복지, 분배를 강조했다. 지역-계층 간에 첨예하게 노정되는 갈등과 반목의 극복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를 양축으로 하는 경제정의를 내세워 제도개혁을 시도했다.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확충해 나간다는 전략이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3저호황의 여파로 부동산 투기가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태우는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를 골자로 하는 토지공개념을 도입했다. 토지를 일종의 공공재로 본다는 취지였다. 기득권층의 드센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토지공개념을 실현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입법취지는 훌륭했다. 하지만 정책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법조문에 감정이 넘쳐났다. 그 결과 제도상의 불합리성-불형평성이 산재해 있었고 운영상에도 임의성-자의성이 개입되어 적지 않은 부작용과 역효과를 낳았다.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그 취지조차 살리자 못하고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는 서울시와 광역시에서 가구당 200평 이상 택지소유자에게 주택부속토지는 공시지가의 7%, 나대지는 11%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민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9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결정을 받았다.

개발이익환수제는 택지개발사업, 관광단지 조성 등 29개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사업자에게 개발이익의 25%에 해당하는 개발부담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아직 존속하나 기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비수도권은 2002년부터, 수도권은 2004년부터 부담금 부과를 중지한 상태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유휴지 등의 소유자에 대해 3년 단위로 전국평균 지가상승률의 150%를 웃도는 지가상승분에 대해 30~50%의 세금을 물리는 제도였다. 땅값이 급등한 지역에 대해서는 1년 단위로 미리 과세한 후 3년 단위로 정기과세시 정산토록 했다. 이 제도도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가 문제가 되어 1994년 7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아 1998년 12월 폐지됐다.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들고 나온 노태우 정권, 반발하는 기득권층

박정희 정권은 1962년 가명-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저축을 통해 산업자본을 조달한다는 명목이었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따라 차명-무기명의 금융거래 규모가 커지면서 제도금융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종합소득세제 실시가 불가능해졌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극단적인 폐해가 1982년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터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취사건'으로 드러났다. 집권명분으로 사회정의 구현을 내세웠던 전두환 정권이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받자 1982년 7월 3일 그 탈출구로 금융실명제를 선택했다. 1983년 7월 1일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확보되면 정치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내다본 민정당이 드세게 반발했다. 또 비자금 조성에 애로가 예상되자 재계도 극렬하게 반대했다. 정-재계가 하나가 되어 검은 돈의 거래가 봉쇄될 것을 우려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1982년 정기국회에서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했지만 5년 후 실시한다는 단서를 달고 사장되어 버렸다. 전두환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 노태우 전 대통령. ⓒ프레시안
그런데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민정당이 선거공약으로 다시 금융실명제를 들고 나왔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노태우는 분출하는 소외계층의 불만을 진정시키려고 경제정의의 기치를 들고 금융실명제 부활을 시도했다. 1989년 4월 11일 재무부에 '금융실명거래 실시준비단'을 설치하고 현판식까지 가졌다. 목표시한을 1991년으로 잡았다.

기득권층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다. 3당합당으로 태어난 거대여당 민자당이 바로 그 진앙지였다. 과거정권에서 권세를 누렸던 인사들이 소위 '총체적 위기론'을 내세워 개혁파를 맹공했다. 기득권층은 재계의 금력을 등에 업고 노태우가 내세운 경제정의의 정책방향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0년 3.17 개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개혁파를 제거하고 권력전면에 부상한 이른바 성장파가 금융실명제를 생매장하기가 바쁘게 1990년 4.4 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1986~1988년 있었던 3저호황의 여열이 당시에도 뜨거워 소화전이 필요한데 발화전을 동원한 격이었다. 경기순환의 측면에서 보면 1988~1989년은 과열경기를 조정해야 할 시기로 보는 게 옳았다. 그런데 반대정책을 썼으니 노태우가 내세웠던 경제정의가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개혁포기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노태우는 그 무마용으로 속죄양이 필요했다. 초법적 발상인 1990년 5.8조치가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과녁으로 겨냥했다. 재벌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및 신규취득 금지조치가 그것이었다. 당시 '총체적 위기'로 표현되던 부동산투기의 주범으로 재벌기업의 부동산 과다보유를 지목했던 것이다.

49개 재벌그룹이 보유했던 비업무용 부동산 5700여만 평과 금융기관의 과다보유 부동산을 강제로 매각하도록 했다. 또 생산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동산의 신규매입을 금지시켰다. 정책방향-취지의 타당성은 인정되나 기준도 애매하고 법적 뒷받침이 없다보니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재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의 의지는 의외로 견고했다. 5.8조치의 과오는 정부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경제정책의 불가측성은 기업의 투지심리를 위축시켜 10년 만에 최저성장이라는 경기침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재벌기업의 부동산 사재기에 제동을 걸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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