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1일 2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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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소임은 무엇인가?
[나는 반론한다] <근대 의료의 풍경> 서평에 답한다
4월말 춘천에서 열린 대한의사학회 학술 대회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함과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면에서 두 분의 글을 대하니 반가웠습니다. 제가 <프레시안>에 1차 연재를 마친 뒤인 2011년 1월 중순 여인석, 박윤재 교수께서 공동으로 그 연재에 대한 글을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조선인 생활수준의 진실은?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20] 전염병으로 본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졌을까, 아니면 악화되었을까? 최근 주로 경제(사)학자들이 이에 관련된 논쟁을 벌여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이들이 사용한 경제 지표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
일본이 한국에 병원을 지은 진짜 이유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9] 일제가 지은 병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크게 내세웠던 점이 관립/도립의원을 곳곳에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널리, 많이 베풀었다는 것이다. 관립의원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격인 경성(京城)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원(1928년부터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경성
일제 시대, 북쪽에 의사가 많았던 까닭은?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8]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③
의사(의료인) 수와 더불어 의사의 지역별 분포 양상은 국민(주민) 건강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국가의 의사 수가 많더라도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으면 의사 수가 적은 나머지 지역은 그만큼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의 지역적 편
대만과 한국, 똑같은 日 식민지 하지만 달랐다!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7]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②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로는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와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의학부가 있었다. 경성의전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에 이른다. 의학교는 1907년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덕분에 조선인의 의료 수혜가 늘었다고?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6]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①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관·공립 의학 교육 기관들을 설립하여 조선인 의료인들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확대시켰다고 선전했다. 과연 그러한 선전처럼 식민지 시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의료 수혜가 늘어났을까? 여기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도록
콜레라·장티푸스…100년 전 전염병 관리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5] 전염병 예방령
그러면 대한제국 시기에 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염병을 관리했을까? <전염병 예방령>부터 살펴보자. 우선 법령은 콜레라 등 여섯 가지 이외의 전염병이라도 크게 유행할 조짐이 있으면 지방장관(군수)이 내부에 보고한 뒤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조선이 흑사병보다 더 무서워한 전염병은?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4] 전염병 예방 규칙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8월 16일 내부령 제19호 <전염병 예방 규칙>을 필두로 몇 가지 전염병을 예방, 관리하기 위한 법령을 잇달아 제정했다. 그보다 4년 전인 1895년 7월 내부령 제2, 4, 5호로 <호열자병 예방 규칙> <호열자병 소독 규칙> <호열자병
日 공격한 흑사병, 한국은 비켜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3] 일본의 전염병 ②
19세기말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었다. 이들 수인성 전염병은 특별한 예방, 치료 방법이 없더라도 상하수 관리만 제대로 하면 상당 정도 퇴치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일본을 괴롭힌 전염병 2위는 이질, 1위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2] 일본의 전염병 ①
일본은 1877년의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전염병에 대한 통계를 체계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1874년부터 1891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위생국장으로 재임한 나가요(長與專齋, 1838~1902)가 전염병 통계의 확립에도 가장 공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