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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공격한 흑사병, 한국은 비켜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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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공격한 흑사병, 한국은 비켜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3] 일본의 전염병 ②

19세기말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었다. 이들 수인성 전염병은 특별한 예방, 치료 방법이 없더라도 상하수 관리만 제대로 하면 상당 정도 퇴치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환자를 일찍 발견하여 격리함으로써 병의 전파를 막을 수 있는 병이기도 하다. 즉 소독과 검역으로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질병인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런 조치들을 활용하여 수인성 전염병의 창궐을 막는 데 성공했다. 구미 선진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이 시기에 일본을 괴롭혔던 또 한가지 전염병은 디프테리아였다. 1876년부터 1910년까지 35년 동안 30만 명 가까운 디프테리아 환자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10만 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다. 환자나 보균자의 호흡기 분비물인 객담, 콧물, 기침 등을 통하여 또는 피부의 상처를 통하여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직접 전파되는 디프테리아는 수인성 전염병보다 다루기가 훨씬 까다롭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 근대 일본의 의학 영웅 기타사토(北里柴三郞, 1852-1931). 1890년 세계 최초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독소에 대한 항독소 혈청요법을 에밀 폰 베링과 함께 개발했으며, 그 업적으로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1889년에는 파상풍균을 처음으로 순수 배양했고, 1894년에는 최초로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또 일본의사회가 창립되었을 때부터 별세할 때(1916~31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의료 침략의 선봉장 구실을 한 동인회(同仁會)의 창립 멤버로 한국과 중국에 일본식 의료와 일본인 의사들을 부식(扶植)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대 일본인들에게 전형적인 영웅이었다. ⓒ프레시안
일본에서 도시화 속도가 빨라진 1890년 이후, 수인성 전염병들과 반대로 디프테리아의 발생은 급격히 늘어났다. 다행히 치명률은 오히려 감소함으로써 사망자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에는 기타사토(北里柴三郞, 1852~1931년)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항혈청요법(抗血淸療法)이 적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기타사토는 이 업적으로 1901년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공동 연구자였던 에밀 폰 베링(Emil Adolfvon Behring, 1854~1917년)이 단독으로 수상했다.

메이지(明治) 정부는 초기부터 발진티푸스의 발발에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19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도 큰 피해를 초래한 질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별히 취한 조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발진티푸스는 1891년 1000명 남짓 되는 환자가 발생한 뒤로는 사실상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 향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897년 처음으로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된 성홍열은 그 뒤 10여 년 동안 환자, 사망률, 치명률 모두 빠르게 증가했다. 주로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의 특성상 도시화와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897년부터 1910년까지 환자 6336명, 사망자 1104명이 발생하는 데 그쳐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앞에서 언급한 전염병들보다 훨씬 더 일본 열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은 흑사병(黑死病), 즉 페스트였다. 페스트는 1350년을 전후해 온 유럽을 휩쓸어 불과 몇 해 사이에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몰살시킨 바 있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전염병이었기 때문이었다. 1897년 메이지 일본에서 첫 번째 페스트 환자가 발생하여 얼마 뒤에 사망했다. 기타사토가 홍콩에서 페스트균을 발견한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1899년 말 페스트 환자가 다시 발생하자 일본 내무성 위생국 직원들은 연말연시 휴가를 반납하며 방역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1910년까지 해마다 환자가 발생했고 치명률이 80퍼센트를 넘나들었지만 환자 발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1907년에 환자 646명, 사망자가 574명(치명률 89%) 발생한 것이 최대 피해였다. 중세 시대나 마찬가지로 한 번 걸리면 죽은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지만 전파력은 대단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페스트가 발생했다.

1900년 초 대한제국 정부도 페스트의 전파를 우려하여 선박 검역을 강화했는데 다행히 한반도에는 상륙하지 않았다. 이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중국, 일본, 만주, 시베리아, 대만 등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계속 간헐적으로 유행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다. 천운이었을까?

<황성신문> 1900년 2월 26일 기사는 그 전날 의학교에서 페스트 예방에 관한 강연회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페스트의 전파 매개체로 쥐(鼠)를 든 것은 타당하지만, 엉뚱하게 누에(蚕), 모기(蚊), 파리(蠅)도 용의자로 지목되어 있다.

(예방 연설) 작일 하오 1시에 의학교장 지석영씨와 교사 고성매계씨가 각부 대관과 각 학교 교원과 여학교 교장과 기타 인사을 회동하야 흑사병의 예방 규칙을 설명하난대 해(該)병의 근인(根因)은 염질(染疾)과 동(同)한대 차(此)병에 이(罹)하면 10의 8, 9는 사(死)하고 전염의 근유(根由)는 서충천문승(鼠蟲蚕蚊蠅)의 교통함과 오예물로 종(從)하야 생하니 예방 개의(槪意)는 의복을 청결하며 가옥을 통창(通暢)하야 공기를 다수(多受)하며 오예물을 원(遠)히하야 악취를 오촉(誤觸)함이 무케하라 하더라.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메이지 시기 일본 정부가 위생·의료 분야에서 가장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은 전염병의 전파 방지였다. 사실 디프테리아 항독소 혈청요법을 제외하고는 전염병에 대해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소독과 검역 등의 방법으로 전파를 억제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그리고 위 도표처럼 당시의 전염병 통계를 요약해 보면 일본이 그러한 일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은 1900년대에 들어 인구 10만 명당 연간 전염병 환자 200명, 사망자 50명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구미 선진국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염(의심)자의 강제 격리, 일방적 재산(가옥) 처분과 같은 인권 유린 행위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대만과 조선 등 식민지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더욱 뚜렷했다. 앞으로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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