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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의 소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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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사학자의 소임은 무엇인가?

[나는 반론한다] <근대 의료의 풍경> 서평에 답한다


지난 5월 31일 '프레시안 books' 143호에 실린 여인석, 신규환 연세대학교 교수의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펴냄) 서평을 놓고 책의 저자인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가 반론을 보내 왔다.

1.

4월말 춘천에서 열린 대한의사학회 학술 대회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함과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면에서 두 분의 글을 대하니 반가웠습니다. (☞관련 기사 : 빈곤 속의 역사학과 역사학의 빈곤)

제가 <프레시안>에 1차 연재를 마친 뒤인 2011년 1월 중순 여인석, 박윤재 교수께서 공동으로 그 연재에 대한 글을 게재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여인석, 신규환 교수께서 함께 서평을 해주셨습니다. (☞관련 기사 : 황상익 교수의 '근대 의료의 풍경'을 읽고)

학기 중이라 매우 바쁘실 터인데도 제 졸저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더불어 이번 학기에는 예년에 비해 강의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영일이 없어 이제야 답 글을 쓰게 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2년 전에나 이번에나 제 글에 대해 두 분이 함께 비평을 하신 특별한 연유가 있는지요? 저는 물론이거니와 서평을 많이 읽는 주변의 독서광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경우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이제 두 분께서 언급하고 지적하신 데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소제목은 두 분의 서평에 붙어 있는 것들입니다.

2. '주문형 연구와 사료 비판'

"새로운 사료의 발굴 없이 기존 연구 성과의 꼬투리를 잡고 '주문형 연구'를 위해 또 다른 비틀기에만 열중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근대 의료의 풍경>(황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두 분은 <근대 의료의 풍경>에 이렇게 비판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꼬투리 잡기'와 '비틀기'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는 "근대 서양 의학의 도입기에 제중원의 설립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닫다가 연세대학교의 사료 검증을 통해 일단락이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기존 연구 성과'라고 하신 것은 '연세대학교의 사료 검증을 통해' 얻어진 성과물들, 구체적으로는 <제중원>(박형우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한국 근대 서양 의학 교육사>(박형우 지음, 청년의사 펴냄) 등 서평 맨 앞머리에 소개하신 저작들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두 분께서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과 관련해서 '제중원의 실체와 성격' '제중원의 설립 과정과 그 과정에서 알렌의 역할' '제중원 규칙의 제정 과정과 특징' '제중원의 설립일' '제중원에서 일한 서양인 의사들의 지위와 월급 문제' '제중원 학당의 설립 과정과 운영 실상' '제중원의 구리개 이전 과정과 이전 시기' '제중원의 진료 상황' '제중원 운영권의 이관 및 환수' '에비슨의 의학 교육과 의술개업인허장 문제' 그리고 '제중원에서 일한 서양인 의사들의 윤리 의식과 언행' 등 제중원에 관한 거의 모든 핵심 이슈에 대해 기존 연구 성과의 문제점과 오류들을 철저한 사료 고증을 통해 일일이 밝히고 바로잡았다(171~457쪽, 634~659쪽)라고 자평합니다. 당연히 저는 제 작업이 '꼬투리 잡기'와 '비틀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실체가 있는 논의를 위해 두 분께서 '꼬투리 잡기'와 '비틀기'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러한 작업에서 제가 주로 사용한 사료는 알렌의 일기와 편지, 헤론의 편지,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통서일기> 등 기왕에 잘 알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잘 알려진 사료들이라고 해서 그 동안 제대로 활용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갑신쿠데타에 앞서 국왕 고종이 미국 공사에게 의료 사업을 허락, 장려한 것(185~186쪽) 등 매우 중요한 데도 아예 다루어지지 않거나, 신수비에 관한 것(239~244쪽)을 비롯해서 해석이 잘못되거나 자의적으로 행해진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에 따라 핵심적인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거나 크게 비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제 작업은 우선 누락되거나 왜곡된 사료 읽기를, 어느 평자의 표현대로 "지나치게 치밀하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꼼꼼히 읽어내어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었던 '제중원의 실체와 성격' '제중원의 설립 과정과 그 과정에서 알렌의 역할' '제중원 규칙의 제정 과정과 특징' 등 핵심 이슈들이 제대로 규명되었습니다.

두 분께서는 제 사료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경우를 들어 비판하셨습니다.

"<청의서>와 <관보>라는 공문서를 부정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료를 신뢰하겠다는 것인가? 자신의 주장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라고 해서 신빙성이 없다든지 사료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사료들을 사료 가치가 없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주문형 연구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2011년 1월 여인석, 박윤재 교수께서 언급을 하셨고 거기에 대해 제가 답변한 바 있습니다. (☞관련 기사 : '근대 의료의 풍경' 비평에 대한 답글) 즉 <제중원 찬성금에 관한 청의서>는 "제 입론에 불리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사실에 너무 어긋나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임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역사학자라면 어떤 자료라도 엄밀한 검증 없이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부연하자면 <청의서>와 <관보>와 같은 공문서라고 무조건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지요(455~456쪽). <청의서>나 <관보>뿐만 아니라 최고급 공문서라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예컨대 제중원 설립일에 관한 논증에서 <일성록> <고종실록> <비변사등록>의 해당 기록을 꼼꼼히 비교 검토하여 사실을 가리는 과정(215~217쪽)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가정법의 역사 서술'

"황상익 교수는 무수한 가정과 추측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지 모른다' '∼가 아닐까'라는 술어는 역사 서술에서 쓸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황 교수와 같이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단정적 판단을 유보하는 조심스런 역사가의 자세에서 나왔다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황 교수의 경우는 불확실한 사실 앞에서 근거 없는 가설에 의해 끊임없는 억측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것도 이미 2011년 1월에 언급되었던 것이고 그에 대해 "저는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 단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에 대한 제 신념이자 서술의 방법론입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다시 문제 제기를 하셨기에 실제로 제가 '∼일지 모른다' '∼가 아닐까'라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어떠한 경우에 사용했는지 확인해보았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혹시 빠뜨린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두창 환자가 한 해에 4만여 명이 생겨 그 가운데 무려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경험을 하던 시절에 미신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일지 모른다." (55쪽)

"방한숙은 게이오 의숙에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게이오 의숙 도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조기에 귀국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145쪽)

"알렌의 입장에서, 조선 정부에 고용되어 자유로운 활동에 제약받을 것을 꺼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알렌이 <병원설립제안>에서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유일지 모른다." (234쪽)

"전염 병동은 다른 환자들뿐만 아니라 외부와도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것이 적절할 터인
데, 그럴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취한 고육지책일지 모른다." (295쪽)


"당시에 가장 흔한 질병이 두창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두창 때문에 제중원을 찾은 환자가 의외로 적다. 조선인들에게 두창은 치료할 질병이라기보다는 기원(祈願)의 대상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359쪽)

"홍종훈(洪鍾熏)은 의학교 2회 졸업생 홍종욱(洪鍾旭)의 오기이거나 개명 전 이름일지 모른다." (602쪽)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보다는 민중의 불만을 일단 우두 의사들에게 돌리는 미봉적이고 책임회피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 아닐까?" (57쪽)

"1888년 '영아 포식(捕食)'이라는 유언비어가 생산, 유포된 것 역시 조선 민중들이 서양이라는 외부 세력의 진출에 대해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339쪽)

"중풍(뇌졸중)은 그 이전부터 적지 않게 있었으므로, 신경계 질병으로 분류된 마비 중에 사실은 순환기계 질병인 중풍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368쪽)

"그런 일을 할 책무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소임이 아닐까?" (815쪽)


800쪽이 넘는 책에서 '∼일지 모른다' '∼가(이, 은) 아닐까'라는 표현은 모두 열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떠한 경우에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이(었)다'로 바꾸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들이지요. 그런 경우에도 저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단정적인 표현을 자제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역사학에서 가정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저도 대부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예문들을 통해 '역사학 입문 시간에 가장 처음 배우는' 가정법에 대해 검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A) ① 조선 정부와 국왕이 1882년에 혜민서를 폐지(215~216쪽)하지 않았다면, 민중들의 건강은 더 나아졌을까?
② 지석영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59~61쪽)를 읽지 않았다면, 대한의원에서 당장 쫓겨났을까?
③ 알렌이 음경 절단 수술(402~404쪽)을 하지 않았다면, 그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④ 엘러스가 미국에 몇 년 더 있었다면, 의사 자격을 얻었을까?
⑤ 에비슨이 오치서라는 환자를 제중원에서 내쫓지(327쪽) 않았다면, 그 환자는 횡사를 면했을까?

예문 ①~⑤는 두 분께서 예시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권총을 쏘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와 마찬가지로 가정법 문장이지요.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묻는 의미 없는 서술입니다. 물론 저는 예문 ①~⑤와 같은 서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른 예문들을 보도록 합시다.

(B) ⑥ 조선 정부와 국왕이 민중들의 건강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면, 아무런 대안 없이 혜민서를 폐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⑦ 지석영이 역사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거부했을 것이다.
⑧ 알렌이 조선인 환자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음경 절단 수술 전에 환자의 동의를 구했을 것이다.
⑨ 엘러스가 양식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조선에 와서 가짜 의사(255~258쪽)로 행세하지 않았을 것이다.
⑩ 에비슨이 의사로서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었다면, 치료 중인 환자를 병원에서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예문 ⑥~⑩은 형태상으로 ①~⑤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정법 문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문장이지요. 달리 표현하자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읽은 것으로 보아, 지석영은 역사에 충실한 지식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치료 중인 환자를 병원에서 내쫓은 것으로 보아, 에비슨은 의사로서 최소한의 윤리 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가 되겠지요.

두 분께서 언급하신 이 문장은 어떤가요?

"에비슨이 진정으로 한국 청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고 그들을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의학교 규칙>에 정해진 대로 의학교 설립 신청을 했어야 할 것이다." (636쪽)

이 문장이 '클레오파트라'나 위의 예문 ①~⑤와 같은 가정법인가요? "가정법에 사로잡혀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역사가의 의도대로 역사적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역사 서술"인가요? 또 이것이 "역사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대표적인 오류"인가요?

그러면 보다 근본적으로 역사(학)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사실과 그것에 대한 역사가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겠지요. 근거가 없거나 허황되다면 모르지만, 충실한 근거로 사건과 사람을 평가하는 게 문제인가요? 에비슨이 당연히 했어야 할, <의학교 규칙>이라는 법령에 따라 의학교 설립 신청부터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면 도대체 역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요?

4. '근대 의료의 실체'

"그의 '근대 의료의 풍경'은 서울대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부터 이 책의 목적은 한국 근대 의료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았고, 서울대학교병원의 뿌리로서 국립병원의 기원을 탐색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했다는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입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갈음하겠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묘사하고 세브란스와의 계승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899년 설립된 한방 병원인 내부병원(1년 3개월 후에 광제원으로 개칭)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둔갑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황 교수는 내부병원의 성격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 주장을 일거에 뒤엎는 말을 하고도 그 근거에 대해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병원에서 양의사를 찾기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내부병원 의사들이 대부분 한의학을 배운 사람이거나 한의학을 배경으로 종두를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별다른 근거 없이 내부병원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변조시켜 놓은 것은 또 다른 '국립병원'을 한방 쪽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서울대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고, 그의 국립병원 뿌리 찾기의 일부일 뿐이다."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관계에 대해서는 책에서 상세히 다루었거니와(452~457쪽) 2011년의 답 글에서도 소상히 말씀드렸고, 또 이 글의 앞부분(<청의서> 관련)에서도 언급했기 때문에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묘사'했다는 두 분의 언급은 제가 국립병원이 아닌 것을 국립병원인 듯이 묘사했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설마 제중원이 국립병원이라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두 분께서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제가 내부병원(광제원)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둔갑, 변조시켰나요? 저는 광제원에 대해 서술한 제3부 5장의 제목을 '광제원―전통과 근대의 절충'이라고 했습니다. 광제원에 대한 제 인식과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지요. 그리고 구체적인 서술(660~702쪽)에서도 광제원이 양방(근대 의학)과 한방(전통 의학)을 병용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로 논증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광제원을 '한방 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일방적이고 편향된 평가겠지요.

<병원 관제>에 나타난 직제를 보면(663~664쪽) 양방 병원의 성격이 좀 더 뚜렷합니다. 치료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양약과 한약으로 치료받은 환자 수는(691~692쪽) 58대42로 역시 양방이 우세합니다. 의료진들을 분석해 보면(683~689쪽) 그들 중 다수가 종두의 양성소 출신입니다. 최초로 임명받은 의사 13명 중 무려 10명이 그들입니다. 그들 외에 한우, 노상일도 기록으로 보아 양방 치료와 조제법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인 의사 고죠(古城梅溪)가 설립, 운영한 종두의 양성소는 양방과 한방 중 어디에 속합니까? 또 '한의학을 배경으로 종두를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피병준 이외에 누가 있는지요? 그리고 광제원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변조시키지 않았거니와, '또 다른 국립병원(광제원)을 한방 쪽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서울대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5. '식민주의 인식과 남는 문제들'

두 분께서는 대한의원 관련 서술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셨습니다.

"황 교수는 의학교 및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뿐만 아니라 세브란스병원 출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이 역사 앞에 공정한 역사가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얼핏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듯하지만, 줄곧 선교 의료를 평가 절하하고 관립 의료를 과대평가하는 등 편향된 인식을 내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의학교 부속병원이라는 것이 의학교 교사인 고다케 츠쿠지 1인이 겸직으로 운영하는 개인 의원의 형태였음에도 이러한 형식적 부속 병원으로 의학교 학생들의 실습 부재와 부실 실습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다. 반면에 에비슨을 비롯한 선교 의사들의 사소한 개인적인 흠집 잡기에는 몰두하면서 정작 의학사적 의미가 큰 에비슨의 방대한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 사업의 성과와 그 의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저는 선교 의료를 평가 절하하거나 관립 의료를 과대평가하려는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선교 의료 대 관립 의료'라는 프레임은 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제 관심과 작업은 출신, 소속 따위와는 무관하게 사실과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저를 과분하게도 '진보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생각하는 '진보'의 첫 번째 '필수조건'은 '우리가 남이가?'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의학교 부속병원이라는 것이 의학교 교사인 고다케 츠쿠지 1인이 겸직으로 운영하는 개인 의원의 형태'라는 것은 과문의 탓인지 금시초문입니다.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병원이 개인 의원의 형태라니요? 더욱이 고다케는 한국 정부에 고용된 사람입니다. 의학교 부속병원이 고다케의 개인 의원 형태라고 말씀하시는 근거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하마터면 임상 실습을 전혀 하지 못했을 뻔했는데 부속병원이 세워짐으로써 다행히 그런 일은 면할 수 있었다(599~600쪽)라고 한 것이 과장된 서술인가요?

저는 <근대 의료의 풍경>에서 에비슨의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 사업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홍석후가 에비슨의 지도를 받아 생리학과 진단학 책을 펴낸 것을 기술(620쪽)한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에비슨의 의학 교과서 편찬의 성과와 의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더불어서 앞에서 언급했던 에비슨, 알렌, 엘러스 등의 행동은 결코 '사소한 흠집'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밝힙니다. 그들의 행동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변할 수 없는, 의사 및 의사 지망생들이 지켜야 할 철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잘못된 '개인적' 행동을 선교 의료 '전체'와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6.

두 분께서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역사 서술의 기본 요건과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저술된 <근대 의료의 풍경>이 후학들에게 한국 근대 의료사의 한 성과로 비쳐질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것이 그가 지속할 차후의 작업에 대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대 의료의 풍경>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신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 말씀을 드리면서, 책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독자들께서는 <근대 의료의 풍경>과 두 차례의 비평 및 그에 대한 제 답 글을 통해 충분히 판단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께서 글의 형식(표현)과 내용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전형을 보여주신 데 대해 사의를 표하면서 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아, 감사할 게 한 가지 더 있네요. <제중원 찬성금에 관한 청의서>를 1906년 5월 31일자라고 잘못 기술한(456쪽) 것을, 두 분께서 5월 22일로 바로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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