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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괴롭힌 전염병 2위는 이질, 1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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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괴롭힌 전염병 2위는 이질, 1위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2] 일본의 전염병 ①

일본은 1877년의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전염병에 대한 통계를 체계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1874년부터 1891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위생국장으로 재임한 나가요(長與專齋, 1838~1902)가 전염병 통계의 확립에도 가장 공이 컸다.

한국은 일제에게 강제 병탄되던 1910년까지 독자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 못했으므로, 전염병 통계에 관해서는 일본에 수십 년이나 뒤진 셈이었다. 일제가 한국의 위생 행정을 아예 무시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 내무성 위생국(후생노동성의 전신)에서 1877년부터 매년 발간한 <위생국 연보>(1887년판) 중 전염병 관련 부분. 부현(府縣)별로 전염병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집계되어 있다. 1888년부터는 영문판 <Annual Reports of the Central Sanitary Bureau>도 함께 발행되었다. 프레시안
앞으로 2회에 걸쳐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전염병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1877년부터 1910년까지 34년 동안 콜레라에 걸린 환자는 모두 55만4062명이었고, 그로 인한 사망자는 37만6151명이나 되었다.

가장 유행이 심했던 해는 1879년과 1886년으로 환자가 약 16만 명씩이었고, 사망자는 각각 10만 명을 넘어섰다. 치명률이 50퍼센트 미만인 해도 몇 차례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70퍼센트 가까이 되었고, 환자 발생이 많은 해에는 치명률도 높아 피해가 더욱 컸다.

아래 도표를 보면 콜레라 발생 양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콜레라는 1879년과 1886년의 대유행, 1882년, 1890년, 1895년의 중규모 유행, 1902년의 소규모 유행 등 대략 5년 주기로 창궐했다. 그리고 이 유행기에 치명률도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895년 이후에는, 1902년의 소유행이 한 차례 있었지만 콜레라는 점차 위력을 잃어갔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본에서는 1910년 이후에도 콜레라의 큰 유행은 없었다. 1919년과 1920년 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유행에도 일본은 별로 피해를 보지 않았다. 요컨대 1895년의 유행 이후 일본에서 콜레라는 관리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수액 요법, 항생제와 같은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무엇보다 검역과 소독이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콜레라가 유행한 해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한국에서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콜레라가 창궐했다. 한 가지 예로, <황성신문> 1902년 11월 20일자에 의하면 광제원 의사 한우, 피병준, 이규선이 콜레라(恠症) 환자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당시 일본에서의 치명률이 70퍼센트 가까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콜레라 사망자가 적어도 1만 명가량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피해가 훨씬 컸던 1879년, 1886년에 한국(조선)의 콜레라 발생과 그로 인한 사망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 사이 콜레라에 대한 한국의 대응 능력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면 1879년, 1886년의 피해와 1902년의 피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콜레라에 이어 두 번째로 사망자(36만 2400명)를 많이 발생시킨 전염병은 적리(이질)였다. 35년 동안 총 환자 수는 148만여 명으로 콜레라의 2배가 넘었다. 적리는 콜레라와 달리 폭발적이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유행했다. 환자수가 15만 명을 넘어선 1893년과 1894년이 예외적인 경우로 생각된다. 치명률도 초기를 제외하고는 20퍼센트 남짓으로 거의 일정했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적리 역시 1900년대 들어서는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1890년대에 비해 많이 감소했다. 하지만 치명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특별한 치료법이 아직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적리 환자 감소에도 검역과 소독 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897년 일본인 세균학자 시가(志賀潔, 1871~1957년)가 적리균(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시겔라 균이라고도 한다)을 발견했지만, 원인균의 발견이 곧장 치료술의 발전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적리균을 발견한 뒤에도 세균 검사보다 임상적으로 진단을 붙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으므로 적리 환자 중에는 아메바성 적리 환자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을 괴롭힌 또 한 가지 중요한 전염병은 장티푸스였다. 34년 동안 94만여 명의 환자와 22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장티푸스는 적리보다도 폭발적인 양상이 더 적었고, 치명률도 거의 일정했다. 장티푸스는 콜레라, 적리보다 앞서서 18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감소했다. 물론 장티푸스에 대한 특효 요법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당시 또 한 가지 중요한 전염병은 두창이었다. 두창은 콜레라와 비슷하게 몇 차례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1886~87년, 1892~93년, 1897년, 1908년의 유행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행도 콜레라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셈이었으며 그나마도 점점 더 위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가 주로 위생 조치의 덕택으로 감소했던 것과는 달리 두창의 감소는 우두술이라는 의료적 방법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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