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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한국, 똑같은 日 식민지 하지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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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한국, 똑같은 日 식민지 하지만 달랐다!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7]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②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로는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와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의학부가 있었다.

경성의전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에 이른다. 의학교는 1907년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었으며, 대한의원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명칭과 성격이 다시 바뀐다. 나라가 독립국에서 피보호국을 거쳐 식민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원의 교육 부서는 부속의학강습소로 불렸으며, 당시 학생들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교관(교수)은 전원 일본인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가 제정, 공포되면서 의학강습소는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와 더불어 조선 최초의 전문학교가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및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프레시안

하지만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수학 연한도 의학강습소 때와 마찬가지로 4년이었으며 교과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가장 뚜렷한 차이라면 일본인들의 입학이 허용된 점이었다. 경성의전은 전신인 의학강습소 시절을 포함하여 35년 동안 도합 23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986명, 일본인은 1319명, 대만인 등 그 밖의 출신은 10명이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1919년까지는 한 명도 없었던 일본인 경성의전 졸업생이 1920년부터 점차 늘어나 1927년부터 조선인 졸업생을 능가하게 되었고 날이 갈수로 졸업생 수의 차이가 더 커졌다. (1941년도에 졸업생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전시 정책으로 수업 연한이 6개월 단축되어 두 학년이 반년 간격으로 같은 해에 졸업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의학부의 수학 연한은 의학전문학교들과 마찬가지로 4년이었지만, 학부에 입학하기 전에 예과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예과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경성제대에 예과를 설치했던 것은 조선에는 고등보통학교(조선인)/중학교(일본인) 이후 과정인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당시 예과는 오늘날의 의예과, 치의예과와 위상과 성격이 달랐다.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학생들도 학부 입학 전에 예과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경성제대 의학부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7차례(1941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 311명, 일본인 763명, 기타 8명 등 모두 10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성의전과 달리 경성제대 의학부는 처음부터 조선인과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이 대체로 3:7 정도였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日治時代臺灣醫生社會地位之究>(陳君愷 지음, 1992년). ⓒ프레시안

이 그림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서 일제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 졸업생 수의 누계(累計)치이다. 앞의 그림에서 졸업생 수가 연도에 따라 들쭉날쭉했던 것과는 달리 졸업생 수가 상당히 일정한 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일제 당국이 식민지의 의사 배출에 대해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과 대만은 민족별 관립 의학교 졸업생 배출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조선인 졸업생 배출이 많았지만 1935년부터는 일본인 졸업생 배출 누계치가 조선인을 넘어서게 되었고, 그 격차는 갈수록 더 커졌다.

지난 회에서 제시했던 그림 "일제 강점기 의사 수의 변화"에서 1927년부터 조선인 의사 수가 일본인 의사 수보다 많아진 것과는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42년부터 졸업생 배출) 출신들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또 일본 등지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조선에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인 중에는 의사가 된 뒤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특히 경성의전 일본인 졸업생)가 적지 않았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대조적으로, 대만인 관립 의학교 졸업생 누계치가 일본인 누계치보다 항상 많았고 그 차이도 줄어들지 않았다.

요컨대 대만의 관립 의학교는 전 기간에 걸쳐 대만인 의사 양성에 충실했던 반면, 조선의 관립 의학교는 적어도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인 의사보다 일본인 의사 배출을 더 중요한 역할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대만총독부 통계서>, <일본제국 통계연감>. ⓒ프레시안

위의 그림은 조선, 대만, 일본의 의료인 수급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다. 신식 의사 1명당 인구는 일본의 경우 이 기간 내내 대체로 12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만과 조선은 꾸준히 감소했다. 조선의 변화가 더 뚜렷하기는 했지만 1940년대 초에 겨우 대만의 1910년대 초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의생을 포함하여 보면, 조선과 대만은 상반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대만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의생을 포함한 의료인 1인당 인구가 감소하여 의료인 수급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조선은 계속 악화될 뿐이었다. 대만은 의생의 감소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신식 의사 수가 증가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일제 식민지 시기 대만인 의사의 산실이었던 "대만총독부 의학교" 건물과 강의실(왼쪽, <대만위생개요>, 1913년)과 연혁(오른쪽,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일람>, 1925년판). ⓒ프레시안

공교롭게도 한국과 대만에서 공식적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은 똑같이 1899년이었다. 그 해 3월 24일 대한제국 정부가 <의학교 관제>를, 꼭 1주일 뒤인 3월 31일에는 대만총독부가 <대만총독부 의학교 관제>를 공포했다.

의학교는 그 뒤 일제에게 장악되어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으며, 대만총독부 의학교는 1919년에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그리고 경성의전은 1920년대 후반부터 주로 일본인 의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는데 반해, 처음부터 식민지 교육 기관이었던 대만총독부의전은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대만인 의사 교육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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