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13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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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모래폭풍, '아쉬페트리아'
[이미지프레시안] 6년전 전쟁을 기억하다
이 기사는 사진과 동영상, 음악과 텍스트가 어우러지는 이미지프레시안의 멀티미디어 콘텐츠로 제작되었습니다. 영상을 보시려면 www.imagepressian.com 을 클릭하십시오. 편집자6년 전인 2004년 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동안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즈음엔 항상 파김치가 되었다. 전 세계 중고차 전시장이 되어버린
손문상 기자
아쉬페트리아
6년 전 전쟁을 기억하다
6년 전인 2004년 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동안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올 즈음엔 항상 파김치가 되었다. 전 세계 중고차 전시장이 되어버린 바그다드 거리는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매연과 소음으로 몸살을 앓았다. 건조한 공기와 잿빛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로 곳곳을 막아선 거대한 콘크리트 방벽과 철망, 사방에 번득이는 경계
달콤한 카리브 쌉쌀한 혁명
[이미지프레시안] 아바나에서 시에라마에스트라까지
쿠바, 작은 차를 빌렸다. 낭만적인 아바나에 머물다, 체 게바라의 혁명 유적이 있는 산따 끌라라를 거쳐, 게릴라 본부가 있는 시에라마에스뜨라 산중의 삭막함을 뒤졌다. 이를테면 쿠바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셈인데, 아바나는 현재, 산따끌라라는 혁명 이후, 그리
아바나에서 시에라마에스트라까지
달콤한 아바나 쌉쌀한 시에라마에스뜨라쿠바, 작은 차를 빌렸다. 낭만적인 아바나에 머물다, 체 게바라의 혁명 유적이 있는 산따 끌라라를 거쳐, 게릴라 본부가 있는 시에라마에스뜨라 산중의 삭막함을 뒤졌다. 이를테면 쿠바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셈인데, 아바나는 현재, 산따끌라라는 혁명 이후, 그리고 시에라마에스뜨라는 혁명 이전이 된다. 쿠바를 횡으로 지
머나먼 귀향
네팔 부탄난민촌 르포
잠시 뒤 창 너머로 히말라야가 보였다.카트만두의 지독한 스모그와 그 상층의 구름을 뚫고 솟아 오른 '다막'행 '부다항공' 쌍발기. 엔진 소음에 섞인 몽환적 창밖 풍경은 그 자체가 모니터 속 작은 동영상 화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렇게 한참 창밖으로 히말라야가 흐르고 있었다. 네팔과 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난민 취재 일정. 돌연 파키스탄 일정이 무산되면
다시 쓰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남미, 70일 간의 기억
라틴아메리카, 정복과 독립, 배반의 역사, 그리고 혁명을 꿈꾸는 수많은 몽상가들이 활보하는 곳이자, 첨단의 자본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곳. 노벨 문학상을 받은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기질을 '콤플렉스와 열정의 조합'으로 보았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상처투성이 대륙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비상을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뜨거웠던 추모열기와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 풍경을 사진으로 엮었다.
손문상 기자, 최형락 기자
머나먼 귀향 2
[르포] 네팔의 부탄 난민촌을 가다
네팔 남동부 '다막' 지역에 있는 '골드합' 난민캠프의 한 초등학교. 대나무로 엮어 만든 교실에는 의자도, 책상도 없다. 흙바닥에 나란히 앉아 있는 '니르말라 드르웡가나'와 '딜마야 구룽'은 이 교실에서 짝꿍이다. 난민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열 살배기 두 소녀는 서로 둘도 없는 친구다.최근 이들 두 소녀의 가족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니르말라' 가
우리 젊은 날
하모니카 뮤지션 전제덕
헤드폰을 쓰고 녹음 부스에 앉는다. 이 순간 나는 완벽한 혼자다. 엄숙과 대면한 녹음실은 어떤 잡념도 허용하지 않는 성소다. 나의 모든 신경세포를 깨워 몸 어딘가 깊이 숨어있는 음을 길어 올려야 한다. 그 음은 채보할 수 없는 음표 밖의 것이다. 음표는 앙상한 기호일 뿐이다. 녹음은 지금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내 몸의 경건한 기록이다. 나와 동료 뮤지
"용산을 잊지 말아 주세요"
[포토] 용산참사 희생자 장례식 현장
용산참사 1년을 열흘 앞둔 9일,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서울 순천향대학병원에서 발인한 운구행렬은 서울역에서 영결식을 갖고 참사 현장인 용산으로 이동해 노제를 치렀다. 용산으로 가는 동안 눈이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 4000여 명의 추모객들이 행렬을 따랐다. 1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1년 동안 용산을 기억하는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