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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한 장씩 가슴에 품고 서울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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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유서 한 장씩 가슴에 품고 서울 왔어요"

하이닉스-매그나칩 비정규직, 상경투쟁 13일째

어느새 비정규직 투쟁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2003년 12월 말 회사가 문을 닫아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러고 1년이 흘렀다. 그간 세월은 간단치 않았다. 가정살림은 파탄나고 몸도 축났다. 세상은 외면했다. 정당한 요구는 무시됐다. '정의'는 이 세상의 단어가 아님을 확인한 1년 간이었다.

청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90여 명은 지난 12일 서울에 올라왔다. 2호선 선릉역 1번 출구에서 200m쯤 걸으면 하이닉스-매그나칩 서울 본사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 앞에 무작정 농성장을 꾸렸다.

농성장이라야 보잘 것 없었다. 바람막이용으로 비닐을 둘러친 천막 안에는 스티로폼과 침낭을 깔아놓은 것이 전부였다. 조합원들은 침낭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간간히 몇몇 사람들이 천막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군데군데 양말, 수건 등이 널려 있었다.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사장 얼굴 한번 보려 했다**

상경 농성 13일째를 맞은 24일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았다. 오후 3시 금속노조 주최로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1인시위를 하러 청와대로 가거나 선전활동을 하러 선릉역, 삼성역 등지로 가기 때문에 낮 시간대에는 천막이 한산하다고 한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서울 본사 건물 앞에 천막을 친 것은 우연이었다. '사장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상경한 길이었다. 원래는 서울 본사와 경기도 이천공장 항의방문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들은 벌써 13일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

"사장 얼굴이라도 한번 직접 보고 싶었어요. 1년 동안 '담벼락'만 보고 싸웠거든요, 교섭 한번 못했습니다. 새해도 됐고, 다시 의지를 다독이자는 말이 나와서 본사 항의방문을 계획했는데, 첫 날부터 경찰들이 진을 치고 얼씬도 못 하게 하더군요."

1991년에 입사해 올해 15년차 '하이닉스-매그나칩 맨'이라는 김충렬(42) 씨의 말이다. 사장 얼굴 보기는커녕 하이닉스-매그나칩 본사 건물 화장실에도 가지 못한다. 건물 안 조흥은행 점포 사용도 허락되지 않는다. 경찰이 막더니 이제는 사설 경비원들이 통제한다.

"화장실도 못 쓰게 하더라구요. 우리를 벌레로 보는지…. 처음에는 힘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젊은 녀석들이 버티는데 어디 가당키나 한가요?"

하이닉스-매그나칩 본사에서는 본사 건물 옆에 있는 빈 KT 건물 내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했다. 조합원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곳에서 용변을 보고 세수를 한다. 물론 더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아침은 라면, 점심·저녁은 국밥으로**

고생스런 천막농성이지만 밥 때는 꼭 지킨다. 몸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푸짐한 식사는 아니다. 매일 아침은 컵라면이다. 밥은 점심과 저녁에만 구경한다.

이날 점심 메뉴는 흰 쌀밥과 쉰 김치, 계란을 풀어넣은 북어국이다. 플라스틱 용기 하나에 이 모든 것을 담는다. 설거지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식사 담당은 "너무 많이 퍼 가지 마요. 남기면 안 되요"를 연발한다. 길게 줄지어 늘어섰다. 성긴 밥이지만, 식사 때는 즐겁다. 삼삼오오 모여 숟가락을 뜬다. 금세 밥그릇이 깨끗이 빈다.

쌀과 김치는 자체조달보다 '지원'으로 충당한다. 매일 밤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각종 단체들이 '연대'란 이름을 걸고 쌀 한 포대, 김치 몇 봉지씩을 두고 간다. 한 번은 길 가던 한 아주머니가 사정을 들은 뒤 30만 원을 떡 하니 꺼내 놓았다. 아직 세상 인심이 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란다.

***노동자에게 법은 너무나 멀었다**

지난 1년 동안 몇 개의 산을 넘은지 모른다고 한다. 지난해엔 불법파견 결정만 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만 알았다.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이 들어갔고, 노동부는 재심 끝에 지난해 7월 사측에 '불법파견' 결정을 통보하고 시정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사측은 동요하지 않았다.

벌금만 내면 되는 현행 법·제도 하에서 사측은 원직복직 결정을 해줄 리 만무했다. 노동부도 현재의 법·제도로는 그렇게 하도록 '강제'할 도리가 없다며 한 발 뺐다. 노동자들에게는 법이 너무 멀리 있었다. 김충렬 씨는 말한다.

"불법파견이면 고용의제 하도록 돼 있어요. 정규직으로 간주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뭘 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일터로 못 돌아가는데…. 싸움이 길어질수록 법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점점 더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나이 40을 넘겨서야 깨달았죠."

***"여기 가족 이야기 하면 펑펑 울지 않을 사람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투쟁하는 노동자는 힘에 부친다. 돈은 바닥나고 가정은 흔들린다. 무너지는 소리는 개개인 내부에서부터 들린다. 전세집은 월세집으로 바뀌었고, 적금통장은 어느새 바닥났다. 아이들은 학원을 중단하고, 아내들은 우유배달이나 식당주방 일에 나선다.

가계가 무너지다보니 기현상도 벌어진다. 조합원들끼리 집을 합친다. 지금은 구속 중인 신재교 노조위원장 집에 집 잃은 조합원 가족들이 들어갔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 세 명을 돌보던 이용범(40) 씨는 전기·수도 다 끊긴 집에서 이틀 동안 기절해 있기도 했다. 영양실조와 과로라는 진단이 나왔다.

아내가 '암'에 걸려 고생하는 조합원도 있고, 아이가 '뇌' 성장이 멈춘 장애아이기 때문에 재활훈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낮에는 농성천막(청주)을 지키고 밤에는 치킨 배달을 하는 지경수(37) 씨도 있다. 이런 조합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조합원 송대균(35) 씨는 말한다.

"군인들이 '악'을 쓴다고 하죠? 그들은 '입'으로 악을 쓰지만 우리는 '몸'으로 악을 씁니다. 집안 이야기 꺼내면 여기 '엉엉' 울지 않을 사람 없어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그들(하이닉스-매그나칩)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으로 '악'을 씁니다. 억울해서 못 물러나요."

***아직 대화의 문은 안 열렸지만, 희망은 보여**

'직접대화'의 문은 여지껏 열리지 않고 있다. 1년 간 '악'을 썼지만 사측은 '제3자'라며 대화를 거부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언제나 느끼는 설움이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애달픈 사정이 지역 사회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초 청주지역 경실련, 민교협, 민우회 등 난다긴다하는 시민사회단체 39개가 하이닉스-매그나칩 사태 해결을 위해 공동대책위를 구성하면서 사측과 충청북도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들은 하이닉스-매그나칩에 대화할 것을 요구했고, 도지사에게 중재를 설 것을 요청했다.

정당들도 외곽지원에 나섰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을 비롯해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우리당 의원들이 하이닉스-매그나칩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 결실로 이원종 충북 도지사가 입을 열었다. 이 지사는 최근 "설연휴 전까지 해결될 수 있도록 시민단체와 공조 협력하고 지사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추운 겨울 날씨에 조합원들이 너무 고생하고 있다"며 "사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서 한 장씩 가슴에 품고…**

90여 명의 조합원들 각각의 가슴속에는 유서가 한 장씩 들어 있다. 각자 네 장의 유서를 써서 청와대, 국가인권위원회, 열린우리당에 한 장씩 보내고 남은 한 장이다. 유서를 보여 달라는 말에 손사레를 친다.

"몸으로 뚫고 올라왔어요. 고비고비 때마다 이 한번 더 악물고, 눈물 한번 더 쏟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유서요? 장난 아닙니다. 누구 보여주려고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해도해도 안 되면, 우리가 달리 선택이 있겠습니까?"(송대균 씨)

"지금까지 어쨌든 '의지'로 버텨 왔습니다. 그 의지가 바닥나면 그때서야 기자 양반이 내 가슴팍에 있는 이 유서를 볼 수 있을 거요."(김충렬 씨)

최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이 민주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민주노총 한 간부가 김 의원에게 한 마디 물었다.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유서를 품고 서울에 올라온 것 아십니까?" 그때 김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죽겠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상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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