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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남자들이 강남대로변에서 국을 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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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남자들이 강남대로변에서 국을 끓이다

[르포 기고]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의 노숙농성 투쟁

지난해 1월 1일자로 일괄 계약해지를 당한 뒤 복직투쟁을 계속해 온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지난 12일부터 상경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울 강남에 있는 하이닉스-매그나칩 본사 앞에 천막을 설치해놓고 농성을 벌이는 동시에 청와대, 국가인권위원회, 시민단체 등을 돌며 연대와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여성학 연구자이자 르포 작가인 김연정 씨가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상경투쟁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작성한 글을 〈프레시안〉에 와, 압축·편집해 싣는다. 이들이 투쟁을 이어 오면서 겪은 고통과 고민이 담긴 글이다. 〈편집자〉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자 집을 나와 회사 앞에 천막을 치고 1년 넘게 살아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연초에 집이 있는 충북 청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 땅에 천막을 치고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바로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지회(이하 '하청지회') 노동자들이다.

선릉역 천막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조합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밥을 받아 들고 건물 앞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카메라를 꺼내려다 그만 둔다. 차마 찍을 수가 없다. 도로 옆에는 김치통이며 음식재료, 밥을 비운 흔적이 있는 빈 그릇 등이 널려 있다. 100명이나 되는 이 남자들, 도대체 왜 이 한겨울에 강남 대로변에서 국을 끓이고, 길바닥에서 밥을 먹고, 비닐을 쳐놓고 잠을 자는 걸까.

***두드릴 수 없는 청와대 신문고**

2004년 12월 25일.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직장폐쇄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그 해 마지막 날에 회사는 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십수 년 간 일해 온 조합원 전원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그리고 일 년 넘게 지났다.

"청주공장에는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임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장과 면담을 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면담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여기에 머물 계획입니다." (오병웅, 하청지회 부지회장)

강남에서 노숙투쟁 9일째가 되는 1월 20일 아침 9시에 청와대로 가는 1인시위팀을 따라 나섰다. 가는 길에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애기 돌이었는데 조합원들이 노숙농성 하느라 한 명도 오지 못했어. 회사 사람들도 겁 먹었는지 한 명도 안 오고. 마누라 보기 민망하더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그래도 자네 아들놈은 가마가 네 개라 뭐가 되긴 될 껴"라고 격려해주었다.

청와대 앞에 도착해 보니 이원종 현 충북도지사가 서울시장을 하던 1993년에 만들어 놓았다는 전시용 신문고가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로 일인시위에 나선 조합원은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에게 "저 신문고 한번 두드려보고 싶은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경찰은 "안 된다"고 했다.

설비 일을 십여 년 해 왔다는 이 조합원은 "저 신문고를 두드리면 대통령이 듣지 않겠냐"면서 못내 아쉬워한다. 그는 혀를 끌끌 차더니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공구도 없고 체계도 안 잡혀 있는 회사에서 최소인원으로 2교대 근무를 하며 토요일, 일요일, 명절도 쉬지 않고 집안 애경사에 참석하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일했어요. IMF 때는 이미 최소인원인데도 인원삭감이 됐지만 상여금을 반납하면서 고통분담에 동참했죠. 하지만 월급은 점점 더 줄어들고 우리에게 돌아온 건 빚밖에 없어요. 그런 상태에서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길바닥으로 쫓겨났죠."

***"계약해지라니, 계약서란 것은 한번도 써본 적 없는데…"**

하이닉스-매그나칩에서 14년 동안 일해 왔다는 다른 한 조합원은 하루 2교대로 일하고 가능한 잔업시간 230시간을 다 일했을 때 월 15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상여금까지 더하면 월평균 187만 원 정도다. 기본급은 근속에 상관없이 거의 최저임금이었고, 최저임금이 올라 기본급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회사는 상여금에서 떼어내 인상된 부분을 메웠다. 쉽게 말하면 임금이 오를 때마다 상여금은 줄어드는 것이었다. 10년 전 연봉이 2900만 원 정도였는데, 노조를 만들 즈음에는 2교대에 아무리 잔업을 많이 해도 2000만~2200만 원을 턱걸이했다.

경조사나 건강상의 이유로 최대한의 잔업를 하지 못하면 월 20만~30만 원씩 적자가 났다고 한다. 적자를 메우라는 회사의 배려였을까? 하청지회 노동자들은 1~2년에 한 번씩 퇴직금을 정산한 돈으로 빚을 메우는 식으로 생활해 왔다. 이렇게 퇴직금을 이미 다 정산했기 때문에 2004년 말 회사에서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을 때는 당분간이라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여윳돈이 누구에게도 없었다.

계약해지를 당했다고 하지만, 사실 조합원들은 단 한 번도 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다. "계약서 그런 거 써본 적 없어요. 십 몇 년 동안 일해 왔는데 그동안 사장이 8번이나 바뀌었어요. 사장이 오면 왔구나, 가면 가는구나 했고, 우리는 그저 맨날 그 자리에서 일만 했다니까요. 모든 영향력은 다 원청에서 행사했지요."

***"CCTV까지 설치해 놓고 감시하는 거냐?"**

강남에 있는 하이닉스·매그나칩 본사 건물 입구의 유리문은 내내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용역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1층에는 은행 현금지급기 등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는데, 용역들은 엄격한 '검문'을 한 뒤에 시민들을 출입시켰다.

한 조합원은 이렇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 건물에는 은행도 있어서 서울시민들이 다 들어가 업무를 보는데, 우리만 들어가질 못한다. 심지어는 화장실도 못 가게 한다. 정말 우리가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왜 이렇게 개 돼지만도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나? 없는 살림에 꼬박꼬박 세금 다 내고 남한테 해 한번 끼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마저 보장을 못 받고 있다. 단지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버림받았고, 국가에게서 버림받았다."

조합원들이 노숙농성을 하는 천막 주변에는 매일 전경과 경찰이 상주하며 조합원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농성 8일차가 되는 날에는 원래는 없던 CCTV가 하이닉스·매그나칩 건물 앞 도로에 설치됐다. 그 CCTV는 정확하게 하청지회의 천막과 그 주변을 향하고 있다. "인권침해여, 인권침해…"라고 한 조합원이 한마디 내뱉는다.

나이가 많은 조합원 한 분이 집에 다녀왔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은 이제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결국 휴학을 하고 가게점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돈이 없다 해도 차마 걔한테 손을 벌릴 수는 없더라구. 그래서 집에 돈 보탤 생각은 하지 말구 그냥 너 한 몸 잘 건사하라고 얘기했어요. 근데 지 동생들 옷 사주고 뭐 사주고 다 챙기는 거야. 나도 오늘 올라오는데 핸드폰 요금 내라고 5만 원을 쥐어주는데…."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손이 눈가로 올라갔다.

***농성장의 밥 인심은 후하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마이너스통장이며 카드빚으로 빚이 없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하청지회에는 결혼한 조합원이 전체 조합원의 70% 정도다. 배우자들이 식당일이나 우유배달 등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이를 돌보면서 저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농성기간 중에 생계문제로 이혼을 한 사람도 있고, 가족이 몇 차례나 수술을 한 경우도 있다.

결혼하지 않은 조합원이라고 해서 형편이 나은 것도 아니다. 청주에 있을 때는 그래도 택배 일과 같은 아르바이트라도 해가며 모자란 생활비를 보탰는데,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는 그것마저도 어렵게 되어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오후 4시 무렵. 천막 밖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져 나가보니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메뉴는 '감자 시레기국'이다. 원래는 순대국을 끓이려 했는데 청주에서 순대가 안 올라 왔다는 것이다. 하청지회의 식사 메뉴는 언제나 일품요리, 국밥이다.

"세상을 모를 때는 법이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편이 아니더라구. 1년 사이에 세상공부 많이 하고 있어요." 주방장 유선상 씨의 말이다. 그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시레기를 꾸욱 짜서 옆에 있는 큰 그릇에 휙 던져 넣는다. 음식 만드는 일은 두 사람이 고정적으로 하고 있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돌아가며 설거지를 한다고 한다. "자, 감자 깝시다!" 주방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던 조합원들이 칼을 들고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강남땅에서 이러고 살 줄 알았나. 나중에 추억거리 되겠지…."

6시, 드디어 저녁식사 시간이다. 조합원들이 일렬로 국밥에 김치를 받아 들고 천막 주변에 앉아 후루룩 먹는다. 메뉴가 어떻네, 맛이 있네 없네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지난 일년 간 저렇게 싸워오면서 입맛을 무디게 만든 탓도 있을 것이다. 농성장의 밥 인심은 어느 곳보다 후하다. 자기들 먹을 것도 모자라 보이는데 "기자님, 더 드세요. 더 드세요" 한다.

***교대로 청주 집에 내려가며**

오후 4시 40분. 청주에서 버스가 왔다. 어제 청주로 내려갔던 조합원들이 올라온 거다. 올라온 조합원들은 열 명 남짓으로, 내려갔던 조합원 수의 절반 정도다. 하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도, 걱정하는 사람도 없다. "식구들이랑 하루 더 자고 싶은 게지"하고 만다.

천막에 들어오는 조합원들은 말쑥한 차림새에 짐 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다. 젊은 조합원 중에는 깨끗하게 드라이클리닝한 옷을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 들고 오기도 했다. 잠시 후면 또 이십여 명의 조합원들이 교대로 청주에 내려갈 것이다.

집에 가게 된 한 조합원에게 "집에 가게 되니 좋겠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옆에 있던 다른 조합원이 "좋긴 뭐가 좋아요"한다. 안 좋을 이유가 뭐냐고 하니, 집에 가봐야 싫은 소리 들어야 하니 그렇다고 한다. "언제 끝나냐? 대충 해라. 안 올라가면 안 되냐?"는 가족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의 눈빛에는 청주로 내려가는 조합원들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 있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조합원들을 실은 버스가 떠났다.

노숙농성을 하는 조합원들 중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도 있다. 그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기 있어야 해요." 하청지회 조합원 중 50% 정도가 10년 이상 근무해온 사람들이다. 농성장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적당히 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 일인시위며 선전전, 새벽에 돌아가며 불침번 서는 것까지 똑같이 해야 한다. 다만 농성장 안쪽에 '경로우대석'이 있다. 열악한 조건에서나마 고령의 조합원들을 위해 젊은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다.

모든 조합원들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기 때문에 농성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명절 때 일하면 3만 원 더 준다고 해서 고향에도 못 가면서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해도 빚밖에 느는 게 없으니 노조를 만들었던 거다. 억울해서 농성을 그만둘 수 없다. 용역이 저렇게 서 있어도 겁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강남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에 창피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새 그것에도 익숙해졌다.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촛불문화제를 할 때마다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큰 힘이 된다. 한 번은 촛불문화제를 하는데, 지나가던 한 시민이 "따뜻한 식사라도 하라"며 막 현금지급기에서 빼내온 삼십만 원을 건네주고 가기도 했다.

비닐 한 장 치고, 차가운 바닥에 은박지 하나 깔고, 침낭 하나 덮고 잔 지 열흘이 되자 감기에 허리통증, 어깨통증이 심해졌지만, 문화제 때면 구호소리가 쩌렁쩌렁 강남 거리를 울린다.

***다가오는 설엔…**

토요일 저녁에 다시 천막을 찾아갔다. 조합원들과 잠깐 얘기하고 나니 어느덧 문화제를 시작할 시간이다. 청주에서 가족대책위원장(가대위원장)을 비롯한 조합원 가족들과 청주 문화패가 올라와서일까, 분위기가 한결 밝다. 생긋 웃는 모습이 귀여운 꼬마 진수는 천막 안과 밖을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며 오랜만에 만나는 아빠와 삼촌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다.

"애기랑 애기엄마 사진 가져와서 아침저녁으로 보고 잠자기 전에도 꼭 보고 잤어요. 유서를 쓸 때 쟤 키워 왔던 게 다 스치고 지나가더라구요. 장난감이며 맛있는 것도 못 사주며 키웠는데…. 애기랑 집사람한테 제대로 해주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못 사는 현실을 끝까지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교섭이 이루어진다면 하는 생각으로 유서를 썼어요." 진수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합원들 스스로 마음을 다지고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옆에서도 도와줄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가대위원장님 연설이 끝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문화제가 끝나고 가대위원장님은 조합원을 한 명 한 명 다 챙긴다. 오늘 가족이 올라오지 않은 조합원들의 마음은 내색은 하지 않아도 착잡할 것이다. "집에 전화 좀 자주 해. 괜히 가족들한테 혼나지 말고." 가대위원장님이 한 마디 하자 조합원 한 명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청주로 내려가는 차량이 출발한다. 한 조합원 가족은 이제 곧 아이들이 진학해야 하는데 농성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아빠나 삼촌과 헤어지는 것인데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이제 저 아이도 이런 이별에 익숙해진 걸까. "도착하면 전화해." 한 조합원은 아이와 아이엄마가 행여 못 들었을까봐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전화 하라고 외쳐댄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설이다. 그때는 오늘처럼 저들이 아쉬운 만남과 이별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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