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파업의 법적 정당성 여부는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겠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과연 정치파업이 의미하는 바가 무얼까'라는 지점이다. 그런데 보도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장관들의 담화문 내용을 보니 매우 간단하다. 노조는 '근로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서만 파업할 수 있다'는 내용에 그 의미가 어려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그 이외의 노조 파업은 '정치파업'인 셈이다.
선관위와 싸우는 '정치인', 노무현에게 정치의 의미는?
필자는 이런 내용을 접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다. 말단에서 정치학을 학습하는 필자는 '정치파업'이라는 수사를 접하면서 자괴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를 포함해 속된 말로 개나 소나 걸핏하면 정치를 이런저런 수사용으로 갖다 붙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정치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반증해주는 것이기에 오히려 환영할 만하다. 다만 그처럼 모두 편하게 사용하기에 그래도 정치라는 말을 쓸 때는, 그것도 일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이 국가의 중대사안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쓸 때는 그 내포와 외연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데, 너무도 가벼이 쓰기에 드는 느낌이다. 학문을 현실과 분리시켜 특권화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되면 정치학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라는 자괴감에서 오는 그런 느낌이다.
그렇기에 최소한 이번 파업을 '정치파업'으로 규정했다면 도대체 거기에서 '정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주는 친절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정치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선거법 위반 문제와 관련, 선관위와 다툼 중에 있는 노무현 정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또 다른 이유는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근로조건개선투쟁 이외의 활동을 '정치'로 규정하는 잔여범주적 발상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왜 그럴까? 지금 다수의 대중들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 자체가 실종됐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실종된 정치를 누군가가 복원시키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격려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일 수는 없다.
노무현 정권이 진정 금속노조의 파업을 정치행위로 생각한다면, 이번 파업을 '정치파업'으로 딱지붙이기에 앞서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그 독단성과 폐쇄성이 이번 금속노조의 파업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관련 이해당사자들, 이질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의 본령은 화석화된 법, 제도의 준수를 읊조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현실을 고민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이 독점한 '정치'
두 번째 드는 의문은 왜 노동조합은 근로조건개선투쟁만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 그 자체가 이미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매개로 재생산되기에 노동-자본의 관계는 애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제는 '고전적인 언술'이 되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정치 내재화 테제'를 다시 불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노무현 정권은 이것을 부정하겠지만, 그렇기에 이번 금속노조의 파업을 '정치파업'으로 규정하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노무현 정권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가 애초 정치적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표명 여부와 무관하게 너무도 잘 체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정권이 이 '내재화 테제'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정치를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성의 법, 제도로 꽁꽁 묶어버린 정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정치파업'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 여성, 환경 및 생태주의자, 문화 및 교육 관련자들이 FTA에 반대하는 또 다른 파업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언제 그들의 그 알량한 정치에 대한 독점성이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똑똑한 척하는 발언이 결국 대중호도의 언술이었음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정치를 노동현장, 가정, 학교, 지역 등 다양한 일상의 삶의 현장과 분리시키려는, 이른바 '시민사회'와 분리시키려는 발상, 행태가 지향하는 '정치적 비밀'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무현정권이 말하는 정치인 것이다. 지금 금속노조 파업에 대한 비판이 다음의 언술들과 정치적으로 그 무엇이 다른가. '여자가 웬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 집에서 애들이나 돌보고 밥이나 짓지.' '선생이 아이들이나 열심히 가르치면 되지, 머 그리 사학운영문제에 개입하고 난리야.' 이것들이 진정 다른가. 이른바 급진민주주의자들의 맥락에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아니던가.
언제는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비판하더니
다시 파업 문제로 돌아가자. 어느 때에는 노동조합에게 국민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면서 왜 지금은 근로개선투쟁에 몰입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조변석개에 비춰볼 때, 근로개선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 또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비판할 터이니 노동조합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판이다. 거기에다가 비정규직, 영세중소사업장 노동자의 고달픈 삶까지 들먹이며 비판하니 그 곤혹스러움은 더할 나위 없다. 계급 이하, 아니 인간 이하의 존재인 이주노동자 존재상황을 비판의 근거로 들먹이지 않으니 그래도 고마울 뿐이다.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처지를 진정 위하면서 이런 비판을 하면 이해가 가지만,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정권으로부터 이런 질타를 들으니 더욱 기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한미FTA만큼 국민적인 사안이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대중의 운명을 좌우할 사안을 걸고 파업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노동조합이 지향해야 할, 그동안 노무현 정권이 '충고'한 '국민적 노동운동'을 실천에 옮기는 것 아닌가. 한미FTA에 의한 비정규직, 영세노동자들, 영세농민들의 몰락은 노무현 정권조차도 우려하고 있는 만큼 그것의 반대를 위한 파업이야말로 노무현 정권이, 자본이 훈수를 두며 열망하는 '이타적인 노조운동' 아닌가. 따라서 이번 파업결정에 대해 '정치파업' 운운하면서 탄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이 아니라, 한미FTA 비준이 다수 대중의 삶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릴 것이기에 그것의 저지를 위해 파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금속노조의 결정을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그 초심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고 그 초심으로부터 벗어나면 심각한 질타가 따를 것임을 경고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공언하는 권력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으며 그가 말하는 공익성, 공공성에 대한 언술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미 국민지지율에서 바닥을 친 바 있는 정권이 민주노총의 빈약한 조직률을 비판한다면 누가 그것을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필자는 이번 금속노조의 파업결정을 보면서 금속노조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한미FTA를 강제한 노무현정권과 자본의 저 천박한 정치언술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리하여 진정 한미FTA 문제를 얼마나 중대한 정치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 앞에만 서면 그 급진성을, 급진민주주의를 잊어버리는 그들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일 것인지도 자못 궁금하다. 또 다시 '모호한 긴 침묵'이 정치의 확장과 연대를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을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한미FTA의 비준 여부를 떠나서 새로운 정치관의 구체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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