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28일 법원의 보석 허가로 풀려났다. 마침 진료차 병원에 가 있던 정 회장은 보석 허가로 구치소에 들러 엠뷸런스 편으로 다시 병원으로 갔다. '돌연사' 위험이 있으니 병원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처사일 것이다. 변호인단의 주장대로라면 정 회장은 '종합병원'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곧 회사로 출근해야 할 듯 싶다. 현대차와 재계와 일부 경제전문지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차가 정 회장의 공백으로 인해 풍전등화와 같은 경영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해외 공장 착공이 연기됐고, 신차들을 잇따라 내놓았지만 내수도 기대만큼 못하다는 평가다. 당장 법원의 허가를 받아 미국으로, 체코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야 할 판이다.
게다가 어느 언론사의 표현에 의하면 '회장 구속에도 불구하고 파업하는 파렴치한 노조'도 있지 않은가. 파업 문제도 정 회장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정 회장은 '현장 경영' 전문가라고 한다.
정 회장 보석…현대차 문제 다 해결되나
이쯤 되면 정 회장은 잠깐 고민스러울 것 같다. '건강 악화'와 '경영 공백' 두 가지의 보석 이유 중에 어디에 비중을 둬야 할 것인가. 당장 출근을 하면 "아픈 것 맞냐"는 비난을 들을 수 있고, 병원에 오래 있으면 "회사가 어렵다더니…"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바로 출근하면 '현대차 회생'을 위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오래 있으면 '신촌 세브란스 병원 특실은 현대차 회장실'이라며 병상에서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기사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 회장의 보석이 결정되자 재계는 일제히 "국민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환영하고 있다. 그동안 현대차 위기론을 설파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일부 경제전문지들도 "이제 숨통이 트였다"고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등공신은 정 회장의 변호인단이다. 첫 공판이 있던 날부터 변호인단은 집요하게 보석 허가에 매달려 왔다. 화려한 경력의 변호사들은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사자떼와도 같았다. 듣기에는 다소 민망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노골적으로 재판부에 "보석 허가를 간청한다"는 표현을 거듭 사용했다.
보석 이유도 구구절절했다. 우선 '경영공백.' 변호인단이 주장하는 논리는 이랬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의 '품질 경영', '글로벌 경영', '현장 경영', '피고인의 남다른 열정' 등의 독자적 경영철학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는데, 정 회장이 구속되니 회사가 휘청거린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차그룹 경영 공백을 해소해 자동차 산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우리 경제의 먹구름이 걷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꾸로 말하면, '이대로 경영 공백이 계속되면 자동차 산업이 타격을 입게 되고, 우리 경제에 더 짙은 먹구름이 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협박에 가깝다.
보석 요청할 때는 "정 회장 있어야", 혐의 부인할 때는 "정 회장 없어도"
당시 독도 문제로 시끌하던 '극일 감정'을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일본 자동차 회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차를 전국민적으로 밀어줘야 할 상황에서 피고인이 없으면 자동차 업계 5위 도약이 아니라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월드컵 공식 스폰서로 '도요타'를 제치고 현대차가 선정됐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배임 등의 범죄 혐의에 관한 정 회장의 개입 정도는 애써 축소시켰다. '포괄적인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만, 정 회장은 해외 생산 마케팅에 주력하고 구체적 실무에 관한 것은 임직원들에게 맡겨 처리했기 때문에 잘 모른다는 것'이다.
검찰이 현대차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중요 내부 문서를 증거로 제시해도 정 회장은 역시 "잘 모르겠다"였다. 이는 물론 피고인의 방어권에 의한 것이지만, 이런 모습만 두고 볼 때 정 회장의 '경영공백'이 과연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정 회장은 회사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 수사도 이 정도에서 흐지부지 되는 모양이다. 법원은 보석을 허가하며 "관련자 기소가 이뤄졌고 수사가 마무리 단계"라는 이유를 들었다. 법원은 더 이상 구속수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검찰은 당초 "비자금 사용처 수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며 정 회장의 보석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 회장의 보석이 결정된 이후 검찰의 반응은 "필요할 때 소환하면 된다"이다. 1000억 원대에 달한다는 비자금의 사용처를 낱낱이 밝히리라 이제 아무도 기대 안 하는 분위기다.
"내가 구속되면 국민경제에 먹구름 낀다"고 주장해보자
물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정 회장도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면 불구속 상태에서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종결 선언도 있기 전에 보석을 허가한 것은 다소 이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보석을 허가하며 '경영공백', '국민경제'를 보석 이유로 내세운 것도 개운치 않다. 법원 스스로가 현대차가 정 회장 '1인 기업'임을 인정한 것이고, 경영 공백으로 국민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든 구속되면 "내가 구속되면 국민경제에 먹구름이 낀다"고 주장하고 싶어질 것 같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정 회장 불구속 소식에 한 법조계 인사는 "이 참에 법원의 불구속 사유 중 하나로 '구속으로 경영 공백이 초래해 국민경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업인'도 한 항목으로 끼워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씁쓸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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