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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은 결국 언론ㆍ국민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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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은 결국 언론ㆍ국민 탓?

<기자의 눈>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이 우려스런 이유

'소비자 주권.'
  
  노무현 대통령은 5.31 지방선거 패배 이후 정치와 경제를 이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2일 인터넷 포털사이트 관계자들과의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시장에서나 정치에서나 '소비자 주권'이 실현될 때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다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도 "소비자가 지배하는 정치와 소비자가 지배하는 시장을 만드는 게 개혁의 진정한 방향"이라며 "이를 위해 언론의 공정한 정보 제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우선 드는 의문은, 정치와 경제를 동일한 작동기제를 가진 장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대의 민주주의제 하의 유권자를 시장에서의 소비자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주체로 볼 수 있을까? 왜 노 대통령은 유권자를 소비자로 치환시켜 설명하고 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5.31 지방선거는 불공정 거래로 인한 비합리적 결정?
  
  노 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은 일단 비유 또는 추상적 제언 정도로 보자면 큰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은 "정치에 있어서도 소비자인 유권자의 주권이 성립될 때 그 정치가 민주주의"라면서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자인가, 아니면 가치와 관계없이 오로지 (개인 또는 특정 이해 집단의) 분산된 이익을 추구하는 소비자인가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성숙한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으로 소비자(유권자)가 집단적 행동이 가능할 것, 특정한 가치를 지향할 것, 가치 실현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 가능할 것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추상적인 노 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을 5.31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노 대통령의 기왕의 해석에 대입시켜 보면 이해하기 매우 쉽다.
  
  사상 초유의 집권 여당의 참패인 이번 지방선거는 보수 언론이 공론의 장을 주도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과 성과를 끊임없이 왜곡해 소비자(유권자)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 막았고, 이런 흐름이 민심으로 둔갑해 현 정부에 대한 심판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 모든 게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미디어 세계에서 전부 결정 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이번 지방선거가 '불공정 거래'로 인한 소비자(유권자)들의 비합리적 결정이며, 우리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인식은 지난 해 한나라당과 대연정에 대한 반대 여론이 쏟아지자 "역사 속에서 구현된 민심과 그 시기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된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대연정을 고집하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 '역사적 민심'과 '감정적 민심'을 구별하는 보다 정교한 장치를 이 소비자 주권론에서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정치는 의지의 발현...소비 행위와는 다르다"
  
  하지만 시장에서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하는 행위와 선거에서 유권자가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선택하는 행위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정치학자 찰스 린블럼이 <정치와 시장>(주성수 역. 인간사랑 펴냄)에서 지적했듯이 정치는 정당한 것에 대한 인식을 강한 의지로 심판하고 판단하는 행위다. 따라서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유권자의 선택도 정치적으로는 무의미하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폄훼될 수 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유권자들의 의지(volition)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이처럼 표출된 유권자들의 의지를 받아들여 정치적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즉, '소비자 주권'의 합리성을 넘어선 지점에 정치 또는 선거의 역동성이 있는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 정치 지도자의 역량과 책임도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노 대통령의 '소비자 주권론'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현란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은 이번 선거가 유권자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을 빙빙 돌려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정보를 왜곡시킨 언론과 집단적 가치를 추구하지도, 전략적이지도 못한 수준 낮은(?) 유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런 판단을 지방선거 직후에는 직설적으로 밝혔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일 선거 결과에 대해 '민심'이 아니라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고, 지난 2일 "선거 결과가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대통령, "FTA 추진은 국민 역량 믿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이처럼 정치적 영역에서는 국민들의 수준이 형편없이 낮다고 보면서, 경제적 영역에서는 어떤 외부적 쇼크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근거 없이 높게 평가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졸속 추진 반대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마찬가지의 배타적 국수주의라고 비판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역량'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노 대통령은 12일 "FTA는 찬반이 다 있지만, 아주 원론적으로 얘기해서 개방한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은 나라 중엔 흥한 나라가 없다"면서 "과거 많은 나라가 중국에 동화됐지만 베트남과 한국은 조공을 바쳤을 뿐이지 동화되지 않았다. 개혁과 개방에 있어 한국 사람들의 역량에 대한 믿음은 역사적으로도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한미 FTA가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서비스 시장을 열어서 우리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라면서 "문 열어놓으면 힘센 사람들이 들어올 텐데 감당 못 하면 무너지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감당 못하면 무너질" 수도 있는 한미 FTA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추진하는 것은 '국민들의 역량'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감당 못하고 무너진다'면 국민들의 역량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노대통령의 '낙관론', 미래학 서적의 영향?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낙관론'은 최근 읽은 몇몇 미래학 서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최근 '도덕적 자본주의'의 출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메가트렌드 2010>(패트리셔 애버딘 지음. 청림출판 펴냄), 지식이 새로운 부의 창출 기반이라며 이 같은 부의 창출을 주도하는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한 <지식의 지배>(레스터 서로우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등을 탐독했다고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전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한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자'라는 개념은 <메가트렌드 2010>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또 지난 12일 포털사이트 관계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지식의 지배>라는 책을 보면 완벽한 질서 속에서는 창의가 나오지 않는다"며 이 책 내용을 길게 인용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자신이 최근에 읽은 책을 인용해 현 정국을 설명하고 국민들을 가르치려는 경향도 지난 해 '대연정' 제안 이후 계속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미래학자나 미래학도가 아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식의 자조 어린 뒷말을 남기는, 갈릴레이 같은 인물일 수도 없다. 더 이상 '나만이 옳다'는 식의 도덕적 우월의식이나 계몽군주적 태도로는 국민들의 지지나 이해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을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확연히 보여준 것이 아닐까?
  
  대통령은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지도자다. 문제는 소비자건 유권자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선거 참패 후 갑자기 '소비자 주권론'을 설파하는 게 안타까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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