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가 이념적으로 퇴색했다지만 칸은 여전히 칸이다. 우리 시간으로 29일 새벽에 폐막된 제59회 행사가 그걸 증명한다. 올해 칸영화제의 수상작 면면을 보면 칸이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식이 여전히 남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올해 칸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 그에 따른 인류의 고통을 그린 작품에 힘을 실어줬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지금의 세상에 대해 칸은 계속해서 그 해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칸영화제가 종종 상업성 논란에 휘말리면서도 세계 영화계에서 제1의 파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칸 최고의 영광인 황금종려상은 영국의 거장 켄 로치에게로 돌아갔다. 켄 로치는 세계 영화계에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정통 좌파 감독이며 근본주의적인 맑시스트로 분류된다. 이번 그의 신작은 <보리를 흔드는 바람>.
. 영웅이 아닌 민중의 투쟁으로 그려 이 영화는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루는 내용이다. 언뜻 닐 조단이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든 1995년 작 <마이클 콜린즈>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좌파 감독답게 당시의 상황을 마이클 콜린즈의 영웅담으로 포장하지 않고 이름없는 두 형제,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의 투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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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흔드는 바람 ⓒ프레시안무비 |
하지만 칸영화제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무장 조직인 IRA의 노선 갈등을 그렸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켄 로치는 192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2000년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국제분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민중과 국가, 식민지와 피식민지, 억압하는 자들과 피억압 계층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켄 로치는 역설한다. 그리고 바로 그점에서 칸이 그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문제가 복잡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이 20세기 맑시스트가 제기하는 해법이다.
. 히스패닉계의 두드러진 약진 올해 칸영화제의 또 다른 특징은 전례없이 히스패닉계의 감독과 작품들에게 시상의 상당 부분을 돌렸다는 점이다. 각본상을 받은 <귀환>의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비롯해서 감독상을 수상한 <바벨>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등등,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 히스패닉계 감독들이다. 여자 연기상 역시 <귀환>의 페넬로페 크루즈와 카르멘 마우라 등에게 돌아갔다. 수상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역시 히스패닉계인 기요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역시 경쟁부문 작품 가운데 영화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40년대 중반의 스페인 내전을 기묘한 판타지로 그려낸 작품이다. <미믹>과 <블레이드2><헬 보이> 등을 만들며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번 영화를 통해 히스패닉계 감독들이 얼마나 뛰어난 상상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입증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칸이 히스패닉계 감독과 이들의 작품에 새삼 주목해낸 것은, 이 영화제가 세계 영화계를 미학적으로 구원할 인물과 영화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칸은 구로자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등 일본 거장들과 첸 카이거나 장이모우 등 중국 제5세대 감독 등 늘 새로운 영화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 서 왔다.
. 유럽중심주의에 매몰됐다는 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칸은 기묘하게도 자폐적이고 유럽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수상작 면면은 모두가 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계에 집중됐으며 이는 칸영화제가 갖고 있는 反할리우드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강박증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지적이다. 올해 칸이 선택한 영화들은 곧 세계 일반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검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세계 관객들이 이번 영화제만큼 수상작들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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