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칸 영화제의 화두 중 하나는 '섹스'다. 기자들 사이에서 "1년치 영화에서 볼 섹스 장면을 여기서 다 본 것 같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번 영화제 상영작들은 섹스 장면이 매우 많다. 그것도 하드코어 섹스 장면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몽상가들>이 영등위에서 무삭제로 심의를 통과했다고 법석을 떨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우리의 영화 문화는 여전히 너무 점잖고 근엄하며 보수적인 게 아닌가 싶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가령 비경쟁부문 초청작인 존 카메론 미첼(<헤드윅>)의 두 번째 영화 <숏버스 Shortbus>는 단순하게 말해 섹스에 관한 영화다. 오르가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섹스 치료사, 관계를 고민하는 게이 커플, 사도 마조히즘적인 성적 쾌감을 서비스하는 여성 사진가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숏버스'라 불리는 지하 살롱에 우연히 모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각자 감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예술과 정치와 섹스 담론을 소통하는 이 '숏버스'라는 공간에서 이 인물들은 금기와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는 해방감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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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버스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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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메론 미첼은 대단히 화사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헤드윅>에 버금가는 완벽한 음악을 선사하면서, 9.11 이후 미국인들의 정치적 위기를 섹슈얼리티를 통해 조명하려 한다. 하드 코어 자위 행위와 집단 성교, 미국 국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게이 남자들의 쓰리섬(threesome)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숏버스>는 분명 카니발적인 해방감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 칸, 섹스를 노래하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들도 섹스를 다루기는 마찬가지다. 영국영화 <레드 로드>는 CCTV 관리자인 한 여성이 과거에 자신을 불행에 빠뜨렸던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섹스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한당과 대적하기 위해 악의 소굴로 걸어들어가는 그녀는 이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한 뒤 섹스를 하고 이를 강간으로 위장한다. 이 영화 역시 성적 묘사의 수위에 있어서 거칠 것이 없다. 그 섬뜩한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은 상당히 혐오스럽고 불쾌한 반면, 처연하고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다른 경쟁부문 초청작 브뤼노 뒤몽의 <플랜더스> 역시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장면들이 나온다. 극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전쟁에 끌려간 한 남자가 경험하는 극단적인 체험과 과거 연인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 어떤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지만, 남자의 군복으로 봐서 이라크 전쟁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순간은 이 남자를 비롯한 일련의 군인들이 한 마을을 습격한 뒤 민간인 여자를 윤간하는데, 그 뒤 이 피해자 여성이 자신을 가해했던 남자의 성기를 뽑아버리는 장면이다. 덕분에 브뤼노 뒤몽의 전작 <위마니테>에 호응을 보냈던 이들로부터도 이번 영화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영화적 주제로 섹스를 다루는 데 있어서 현재 서구 영화인들의 극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비평가 주간에서 상영된 <디스트릭티드 Destricted>다. 섹스와 포르노를 주제로 일곱 명의 감독들이 짧은 단편을 만든 것을 모아 놓았는데, 그 면면이 상당히 흥미롭다. 가스파 노에, 매튜 바니, 래리 클락, 마르코 브람빌라, 리처드 프린스, 샘 테일러 우드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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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DVD 배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섹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포르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가 주간 프로그램 가운데 하이라이트였던 일요일 상영회는 감독들의 명성 때문인지 수많은 관객들로 발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무대 인사에는 래리 클락(<키즈><불리>)과 가스파 노에(<돌이킬 수 없는>) 감독이 나타나 열띤 호응을 얻기도 했다. 첫 번째 작품은 매튜 바니의 기괴한 단편. 커다란 공업용 차량이 기중기로 들어올려지는데, 그 차량 밑에서 한 남자가 매달린 채 빙빙 돌아가는 모터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면서 자위 행위를 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매튜 바니의 전작들(<크리매스터><구속의 드로잉>) 역시 기괴하긴 했지만, 이 영화는 매튜 바니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범한 소음과 결코 유쾌하지 않은 비주얼로 채워져 있다. 일곱 편의 단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은 래리 클락의 30분짜리 다큐멘터리. 래리 클락은 인터넷을 통해 20대 초반의 청년들을 모집한 뒤, 그들이 언제 처음 섹스를 했고 섹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인터뷰 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명을 뽑아서 포르노 업계의 직업 여성들을 직접 인터뷰한 뒤, 그 가운데 한 명을 택해 섹스에 대해 가진 판타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래리 클락이 선정한 주인공 청년은 40세의 발랄한 직업 여성을 선택해 항문 섹스에 대한 자신의 판타지와 욕구를 해소한다. 래리 클락의 단편은 객석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이끌어낸 작품. 하지만 세계 영화계의 저명한 감독들이 함께 만든 이 포르노 영화가 그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영화인지, 아니면 우리 시대의 섹스와 포르노에 대해 어떤 화두를 던지는지는 좀더 고민해야 할 문제다.
. 칸, 시대를 은유하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극단의 영화들은 종종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감독주간에 선보인 윌리엄 프리드킨의 신작 <버그 Bug>다. 전작 <헌티드>에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던 프리드킨은 트레이시 렛츠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이 작은 영화에서 대단히 밀도 높고 강도 높은 충격을 선사한다. 미국의 한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외로운 웨이트리스(애슐리 저드)와 잔혹한 그의 남편(해리 코닉 주니어), 그리고 이 호텔에 굴러들어온 한 남자(마이클 섀넌)의 이야기다. 남자는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뒤 정신분열증에 걸린 상태. 그는 자신의 몸 속에 벌레가 살고 있다는 환영에 사로잡힌 채, 벌레가 서식하는 위치를 찾아내야 한다며 신체에 상처를 낸다. 남편의 가해에 상처받고 아들을 잃어버린 슬픈 과거를 가진 여자는 점차 이 남자에게 동화되면서 함께 벌레 잡이에 나선다. 후반부 두 사람은 모텔 안을 알루미늄 호일로 완전히 도배한 채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미녀 스타인 애슐리 저드가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 못지않게 철저히 망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도 의외지만, 신체 상해와 편집증과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다. 그 충격이 테러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현 미국의 상황을 풍자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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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패스트푸드 네이션> 역시 극단의 영화라 할 만하다. 링클레이터의 전작들 가운데 가장 과격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영화는, 패스트푸드 산업의 이기적인 속성이 미국에 불법 이주한 남미 노동자들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자사의 인기 햄버거에 사용되는 쇠고기 패티가 오염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마케팅 담당자(그렉 키니어)가 그 원인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펼쳐진다. 여기에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와 쇠고기 패티 가공 업체에 취업하게 된 이주 노동자들의 사연이 겹쳐진다. 소를 도살하고 노동자들의 신체가 절단되는 상황을 가감없이 묘사하는 이 영화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폐단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한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소개된 링클레이터의 또 다른 신작 <스캐너 다클리> 역시 정치적인 함의를 던진다. 필립 K. 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링클레이터의 <웨이킹 라이프>와 같은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 후 미국을 배경으로, 마약 문제가 테러와 연관된 상황에서, 한 마약 담당 수사관이 자신의 친구들을 감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키아누 리브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위노나 라이더 등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한 실사 영화에 애니메이션 터치를 가하고 있는데, SF 애니메이션인 만큼 실사 영화보다 훨씬 자유롭고 극단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미국에서는 워너 인디펜턴트 픽처스가 배급을 맡고 있지만, 국내 개봉은 아직 불투명한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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