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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처음 외친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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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처음 외친 그녀는…

[장석준 칼럼] 고갱의 외할머니를 아십니까?

지난달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폴 고갱 전시회가 열렸다. 고갱이라면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타히티 여인들을 그린 그의 걸작들을 누구나 한 번쯤은 인쇄본으로나마 보았을 테고, 빈센트 반 고흐의 친구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쉽게도 전시회에는 가보지 못했다. 뒤늦게 광고를 봤는데, 이미 전시 일정이 끝난 뒤였다. 그런데 이 광고와 마주치고 나서 나는 한 여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고갱의 외할머니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라 트리스탕(1803~1844년). 1803년 생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페루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앙드레 카잘이라는 미술가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가정 폭력과 이혼 분쟁 그리고 영구적인 별거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가 카잘과의 사이에서 난 2남 1녀 중 딸 아린이 고갱의 어머니다.

여기까지는 19세기 현실주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불행한 여성의 삶이다. 그런데 그녀는 소설가의 모델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작가가 되고자 했다. 돈벌이를 위해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 방문한 영국에서 그녀는 반드시 책으로 써서 남기지 않으면 안 될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1830년대 런던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상이 그것이었다. 인간 존엄성의 토대를 모두 빼앗겨 버린 산업 자본주의의 첫 번째 노동자 세대의 모습에서 그녀는 고단한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 운명에 처한 동료 인간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격렬한 고발장이 트리스탕이 1840년에 낸 <런던 산책>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유명한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가 나온 게 그로부터 5년 후였다. 두 책 사이의 연관 관계는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아무튼 트리스탕이 엥겔스와 그의 동지 카를 마르크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두 사람의 가장 유명한 저서의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문구를 통해 드러난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것은 트리스탕이 처음 외친 슬로건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용 표시도 달지 않은 채 <공산당 선언>을 이 구호로 끝맺었다.

<런던 산책> 이후 트리스탕은 본격적으로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1843년에 자신의 실천 구상을 <노동자연합>이라는 팸플릿에 정리하고는 그 내용을 노동자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강연 여행에 나섰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여행 중 얻은 병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1848년 파리 노동자들이 참여한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이었다. 이후 한 동안 플로라 트리스탕이라는 이름은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그녀가 남긴 슬로건은 전 세계 노동 운동의 상징처럼 되었지만 말이다.

▲ 플로라 트리스탕(1803~1844년). ⓒwikipedia.org
우선은 이 망각을 걷어내는 게 중요하다. 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트리스탕이 남긴 '노동자연합(Worker's Union)'이라는 구상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노동자연합은 노동자들을 회원으로 하며 이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노동자연합은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 지역에 노동자 회관을 건설한다. 노동자 회관에는 노동자 학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여가 활동 공간이 들어선다. 노동자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고 여성과 노인, 아동을 위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노동자 회관의 주된 임무다. 한 세대 뒤쯤 유럽 곳곳에 등장하게 될 '민중의 집'의 선구적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트리스탕이 노동자연합을 한 나라 안에 국한된 조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국경을 뛰어넘은 결사체를 제안했다. 프랑스에서 걷은 돈으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복지 시설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이 맥락에서 나온 구호였다.

물론 시대의 한계에 따른 아쉬움도 있다. 트리스탕은 노동자의 회비만으로 이런 사업이 가능하리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당대 유럽의 재력가들로부터 기부를 받고자 했다. 귀족이나 자본가들에게 거액의 희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아직은 노동자 세력만의 역량으로 이 정도 사업을 추진하기 힘들었다는 당시 사정을 감안해도 이제 와서는 좀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반대로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면모도 있다. 무엇보다 여성 해방을 강조한 것이 그렇다. 트리스탕은 "인류를 단결시킬 유일한 수단"으로서 "여성과 남성의 권리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며 여성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그녀는 노동자 회관이 노동 해방의 거점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철저한 가부장 질서 속에서 여성 해방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랐다.

아무튼 '노동자연합'은 노동자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자 조직의 여러 형태들 중 어느 하나로 콕 집어 분류하기가 힘들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사이니 노동조합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본가와의 교섭에 치중하는 요즘 노동조합과는 사뭇 다르다. 트리스탕은 현대 복지 국가에서 보통 공공 부문이 맡는 사회 복지 기능을 노동자연합이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굳이 말하면, 복지 협동조합 성격이라고 할까. 또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동자연합의 지역 거점인 노동자 회관은 영락없이 민중의 집이다. 그런가 하면 트리스탕의 문맥에서는 후에 노동자 정당이 수행하게 될 전국적인 정치적 교섭 역시 노동자연합의 몫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연합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민중의 집, 복지 기관, 정당의 역할을 모두 망라한다. 이런 활동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 얽혀 있다. 이를 두고 아직 자본주의도, 노동 운동도 발전하기 전의 '미분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초기 노동 운동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한다고 보았던 과제들이 이제는 너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간 우리는 지나치게 노동조합이 할 일이 따로 있고 협동조합, 민중의 집, 정당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온 게 아닐까? 그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트리스탕이 노동자'연합'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의 그 '연합'이라는 목표 아니었을까?

요즘 노동 운동 일부에서 노동조합이 '민중의 집' 건설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또 실패한 진보 정당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면 정당에 대한 노동 대중의 참여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트리스탕의 '노동자연합' 구상을 되새기게 만드는 움직임들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 반가운 고민이고 모색이다.

흔히 오늘날 한국의 노동 운동은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 그 '처음'으로 1987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가야 할 '처음'이 단지 스물 몇 해 전 그 때인 것일까? 아니다. 그것보다는 더 거슬러 올라가고, 더 파봐야 한다. 나는 플로라 트리스탕과 그녀의 동지들이 노동자연합을 꿈꾸며 미래 세상(분명 지금의 현실과는 달랐을)을 그리던 그 시절 노동 운동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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