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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정치' 대신 '군사 행동'을 선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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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정치' 대신 '군사 행동'을 선택했나?

[장석준 칼럼] 이석기를 위한 변명

개인 사정으로 한 달 동안 <프레시안>에 글을 싣지 못했다. 한 달밖에 안 되는 그 시간에도 한국 사회는 특유의 역동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진보' 정당 중 한 곳에서 벌어진 다소 기묘한 행태가 국가정보원에 의해 '내란 음모'로 포장돼 정국을 강타했다. 추석이 끝나고 나서도 통합진보당 소속 지방의원으로 수사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이야 더 말해 뭐할까. 국정원 대선 개입에 항의하는 촛불 집회와 야당의 장외 투쟁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선거 공약 철회 등 정권의 잇단 악재들이 모두 통합진보당 수사 하나와 동등한 무게로 취급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당분간은 이 사건 하나만 방패삼아도 밀려오는 파도에 능히 맞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회가 이석기 의원 체포 동의안의 너무나 손쉬운 처리로 제 역할을 포기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국회 안에서 이렇게 무참히 끌려갈 거였다면 시청 광장에 천막은 왜 친 걸까.

각설하고, 지난 5월에 모처에서 희한한 모임을 했다는 분들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소위 '내란 음모' 혐의란 게 보도되고 나서 모처럼 기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딴인즉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당 내 종북주의, 패권주의에 대해 앞장서서 문제 제기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사태를 어찌 보느냐는 것이었다. 원외 정당의 당직자를 취재원으로 호출해주는 것이야 고마운 일이었지만, 인터뷰 자체는 난감했다.

몇 마디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심각한 질병을 가장 먼저 진단했다는 게 반드시 영예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질병을 치료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면 말이다. 진보 정당 운동(혹은 희망을 섞어 말하면, 그 한 시대)의 병사(病死)에 대한 공동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다시 몇 주가 흘렀다. 수많은 말들이 토해졌고, 처음 당황했던 이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이 시점에 말 한 마디 더하는 게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국정원이 모든 혐의의 알파요 오메가로 내세우는 5월 회합에 대해서는 몇 마디 거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한 마디로 기묘한 모임이었다. 당사자들은 통합진보당의 당원 교육 행사였다고 한다는데, 오랫동안 진보 정당의 교육 담당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교육 내용과 진행이라는 게 다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다. 흡사 사이비 종교의 집회나 다단계 회사 행사를 연상시킨다.

한데 이런 모임이 제 정신 박힌 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기는 할망정 보통 '내란 음모'로 엮이지는 않는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전쟁이 발발하면 후방에서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몇 마디 녹취 내용이다. 일단 이게 광신의 토로일 수는 있을망정 실질적인 '내란 음모'는 되지 못한다는 상식적 판단을 전제로, 이 행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진보 진영 내의 생각 깊은 분들이 이미 지적한 바이지만, 이 행태는 전쟁 위험을 평화 운동으로 막으려 한 게 아니라 또 다른 전쟁 행위로 대응하려 한 점에서 철저한 비판 대상이자 심각한 일탈이었다. 좀 달리 말하면, 한반도 전쟁 위기를 '정치'로 풀려 한 게 아니라 '군사' 행동으로 풀려(?) 한 것이다. 정치인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정체성 혼란에 이르렀는가?

ⓒ연합뉴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주체 사상파를 차마 '주체 사상파'라 부르지 못하고 '종북주의'라 칭하는 데 함께 했지만, 사실 냉정히 보면 '종북주의'가 꼭 한국 진보 진영에만 나타나는 풍토병은 아니다. 종북주의의 원형은 본래 종'소련'주의이고 지난 세기에는 수백만, 수십만 당원을 자랑하던 서구 자본주의 세계의 좌파 정당조차 이 프레임 안에 갇혀 있기도 했다. 한때는 종'소련'주의의 대안을 종'중국'주의에서 찾은 사람들이 있었고, 라틴아메리카에는 종'쿠바'주의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흐름이 다 역사적 극복 대상이지만, 어쨌든 '종북주의' 자체로는 희귀 질병이라고 호들갑을 떨 일까지는 아니다.

문제는 종북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유난히 특이한 행로다. 한때의 종'소련'주의, 종'중국'주의는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흐름에 속했던 좌파 정치 세력도 이제는 저마다 자기네 사회의 토양에 맞는 정치 노선을 걷고 있다. 자기 혁신에 성공해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이들마저 있다. 한데 유독 한국에서만 종'북한'주의가 지금껏 극복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자신이 정치인인지 군인인지 헷갈리면서 말이다.

이 차이를 따지자면, 결국 북한을 시야에 넣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소련, 동유럽과 달리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만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쿠바도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차이는 여기부터다. 라틴아메리카의 종'쿠바'주의는 본래 다른 어떤 좌파 이념보다 더 군사적이었다. 한 마디로 게릴라 노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쿠바가 미국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게릴라 항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흐름은 없다. 거의 유일한 예외인 콜롬비아의 게릴라 세력조차 요즘은 평화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각 나라의 현실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쿠바 쪽의 변화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쿠바는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위기를 다양한 사회적 실험들로 돌파했다. 한편에서는 세계 시장과의 통로를 일정하게 열어두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에너지 절약, 대안 농업, 의료 및 교육 영역에 축적된 사회적 역량의 지속적 강화를 추진했다. 비슷한 위기를 핵무기 개발을 통한 미국과의 협상으로 풀려 한 북한과는 사뭇 달랐다.

미국의 위협으로 따지자면, 쿠바가 북한에 댈 게 아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코앞에 있는 게 쿠바이고, 쿠바 섬 안에는 미군 해병대 기지까지 있다. 쿠바에게는 중국도 없다. 석유를 제공해주는 베네수엘라가 있다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쿠바 쪽이 도와줘야 할 나라다. 그런데도 쿠바는 버텼고, 북한보다 더 잘 버텼다. 이 나라는 어쨌든 '존경 받는' 국가다.

쿠바가 이렇게 '군사' 노선에서 '정치'적인 생존 통로 확보 및 국제 연대 구축 쪽으로 돌아선 데 반해 북한은 정확히 그 반대로 움직였다. 농업이 붕괴하고 지역 사회가 무정부 상태가 되는데도 경제 사회적 대안을 찾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핵개발을 통한 국가 유지에 모든 것이 쏠렸다. 이것이 북한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논리적 귀결이 '선군(先軍) 정치'였다. '정치'에 대해 '군사'를 우위에 놓는 이상한 '정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 정권은 이미 1950년에 통일을 '정치'가 아닌 '전쟁'으로 해결하려다가 분단을 무서운 숙명으로 만들어버린 전력이 있다. 그때 이후 지금의 제3대 수령까지 참 한결같다.

5월 모임의 참여자들 중 일부가 보인 행태는 이러한 북한의 선택을 개인 수준에서 내면화하고 반복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그 모임은 그런 선택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수련의 기회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이들에게 진보 정당 운동이 건네야 할 말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깨어나시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군사' 행동이 아니라 '정치'요!"

폭약이 아니라 민심을 살피라는 말이 100년도 더 전의 러시아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이런 절실함을 갖게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충고가 그다지 효과는 없을 거라는 익숙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상 행동의 원형이 실은 북한의 역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 선택의 궤도에서 벗어나야만, 이곳 진보 정당 운동 일부의 이상 행동도 자연 치유될 수 있다.

누구는 그래서 북한이 무너져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선군 정치나 5월 모임만큼이나 '정치'를 '군사'로 대체하는 행태라 고려의 가치가 없다. 또 어떤 이는 주체 사상파의 치유를 위해 '진보' 정당들을 다시 통합해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진보 정당이 무슨 운동권 사회 재적응 훈련 기관은 아니다. 그런다고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지만, 답은 오직 '평화'에 있다. 평화 체제 수립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의 한반도 현실보다는 나아진 어떤 상태 말이다. 그래야만 한반도 역사의 궤도 이탈의 진원지인 북한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또 북한이 그런 여유를 누릴 때에만 남한 안의 일탈 행동들도 자가 치료된다.

어떤 숙명의 인정 같아 괴롭지만, 진보 정당 운동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의 전성기는 남북관계의 해빙기와 겹친다. 둘 사이에 인과 관계까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해빙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서 진보 정당이 성장하기 좋은 예외적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이런 상관성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북한은 숱한 외국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해야 봐야 이 역사성을 떨칠 수는 없다.

통합진보당 내 일부의 수준을 뛰어넘기 위해, 더 근본적으로는 1950년의 잘못된 결정이 더 이상 우리 운명의 규정 요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국의 진보 세력은 '평화'를 더욱더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수밖에는 없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평화적 수단을!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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