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근거지로 알려진 파키스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서 미국과 중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치열한 '4각관계'가 펼쳐지고 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최근 정권의 명운을 걸고 북서부 와지리스탄 지역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고 미국이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지만, 정작 파키스탄은 이 기회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 역내 경쟁자인 인도를 견제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샤라프로 하여금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거처인 붉은사원을 공격하게 하고 탈레반 소탕을 명분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의 군자금을 대주고 있는 미국은 이로써 파키스탄-중국 관계를 뒷받침해주는 '물주' 노릇만 하는 셈이 됐다.
중국인 납치·살해 후 벌어진 붉은사원 사태
무샤라프 정권이 붉은사원 진압 후 탈레반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것은 파키스탄 내 탈레반을 척결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무샤라프를 대리인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파키스탄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타리크 니아지 교수는 16일 미국의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에 이번 사태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놨다. 무샤라프가 미국의 압력에 밀려 미국의 자금으로 군사 행동을 시작했지만, 이번 공격이 실제로는 파키스탄 내 중국인을 납치·살해한 탈레반을 응징하라는 중국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무샤라프 정권은 지난 2일 붉은사원을 공격했다. 지난달 23일 붉은사원 무장단체가 중국인 7명을 납치한지 열흘 후의 일이었다. 중국인들이 이슬라마바드에 안마시술소를 차려놓고 매춘을 했다는 게 납치의 이유였다. 이에 중국은 강한 어조로 자국민들의 보호를 파키스탄 정부에 요청했다.
그 후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 부근에서는 지난 8일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기업에 무장대원들이 들이닥쳐 중국인 3명을 처형 방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붉은사원을 포위하고 진압군 투입을 준비하던 무샤라프 정권에 대한 탈레반의 보복공격이었다.
이에 이슬라마바드 주재 중국 대사는 성명서까지 발표해 범인들을 체포하고 파키스탄 내 중국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그 후 파키스탄 정부는 10일 새벽 붉은사원에 군대를 전격 투입해 사태를 진압했고 이어 북서부 지역에 병력을 증강했다.
타리크 니아지 교수는 중국이 자국민 보호를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며 "붉은사원 공격 명령은 중국의 압력에 따른 것으로, 무샤라프는 그간 '파키스탄의 미국인'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최근 행동 뒤에는 중국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 미국-중국-탈레반에 '세 다리 걸치기'
파키스탄이 중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행동을 감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파키스탄은 지난 2004년 10월 '중국의 오사마 빈 라덴'으로 불리는 하산 마흐숨을 살해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중국 내 유일한 이슬람 자치구인 신장 독립운동을 벌이던 마흐숨은 탈레반과의 연계하에 파키스탄 남(南)와지리스탄 지역에 숨어 있었다. 무샤라프는 마흐숨 사망 7일 후 탈레반 무장단체들이 중국인 2명을 납치해가자 그 지역에 8만명의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탈레반 소탕이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할 정도로 만만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이 중국의 요청에 이처럼 즉각 반응한 것은 앙숙인 인도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데 이어 인접국인 타지키스탄에 최초로 국외 군사기지를 건설한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무샤라프는 판단한 것이다.
중국 역시 타지키스탄의 인도 군사기지는 물론 아프간에 장기 주둔할 것으로 보이는 미군의 존재까지도 껄끄러워하고 있어 파키스탄과 전략적 이익이 일치했다.
탈레반에 대한 최근의 공격으로 일단은 등을 돌리게 됐지만 얼마 전까지 무샤라프 정권이 탈레반과 선을 대고 있었던 것도 인도 견제를 위한 성격이 강했다. 무샤라프는 탈레반 소탕이라는 미국의 목적에 겉으로는 동조하고 있었지만 탈레반이 머잖아 아프간 정부를 다시 장악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아프간 내 인도의 영향력을 축소할 수 있다고 여겼다.
9.11 이후 중국 경제의 파키스탄 진출이 급속히 확대됐던 것도 중국의 요청에 민감해진 이유였다. 양국은 올해 자유무역협정(FTA)까지 발표시켜 지경학적인 관계를 강화했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미국-인도간 연간 무역액인 2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연 150억 달러의 무역 거래를 기대하고 있다.
니아지 교수는 "붉은사원에 대한 무샤라프의 탄압은 중국-파키스탄 전략관계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중국의 이익은 무조건 지켜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로써 무샤라프 정권은 탈레반 소탕 명목으로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고, 인도 견제를 위해 중국과 손잡고,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 재등장을 대비해 탈레반과 관계를 맺어 오는 등 '세 다리 걸치기'의 절묘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샤라프 정권 무너져도 파키스탄-중국 관계는 이어져
그러나 무샤라프의 줄타기 외교가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탈레반의 위력이 만만치 않아 소탕 작전이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지 않을뿐더러 붉은사원에 대한 강경 진압이 부른 민심 이반은 그의 정권 기반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붉은사원 진압 후 보복성 자살폭탄 테러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무샤라프 정권은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고려할 정도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붉은사원 사태를 포함해 이달 들어 130명 이상이 무샤라프의 탈레반 타격 작전으로 사망했다. 정정 불안이 이어지면서 주가도 3% 이상 하락했다.
무샤라프는 지난 봄 초우더리 대법원장을 전격 경질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야당 및 민주화운동세력의 반발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정부 비리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도 기다리고 있다.
무샤라프가 올 가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이 자초한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권을 잃게 된다면 미국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탈레반 공격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무샤라프에 대한 여론의 반작용으로 강경 이슬람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대테러전의 강력한 협조자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세력이 집권하건 인도와의 역내 경쟁을 포기할 수 없는 파키스탄의 속성상 무샤라프가 탈레반과의 충돌을 불사하며 발전시켜 온 중국과의 관계는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미국이 제공한 수십억 달러의 자금은 탈레반 소탕이 아닌 파키스탄-중국 관계를 강화하는 밑천으로 귀결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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