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간판 개혁 프로그램인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의 일부 관계자들이 SBS의 대주주인 (주)태영측으로부터 고가의 향응접대와 선물을 받은 것이 내부 고발형태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MBC는 프로그램 진행자인 신강균 차장과 강성주 보도국장 등이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보직 사퇴함에 따라 7일 저녁 방영분을 전격적으로 취소하는 한편, 당일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 끝에서 앵커멘트를 통해 시청자에게 공식사과했다. MBC는 관계자들의 징계여부를 조만간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호 기자, 홈페이지에 “고가접대·선물 받았다” 고백**
이번 사건은 지난해 12월 28일 <…사실은> 제작팀에 속해 있는 이상호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기자와 아내'라는 글을 통해 취재대상자로부터 고가의 향응접대와 선물을 받은 사실을 ‘고백’, 네티즌들 사이에 폭발적 관심을 끌면서 비롯됐다.
이 기자는 당시 글에서 “회사 선배의 주선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날 서울의 한 고급 음식점에 나갔더니 또다른 회사 선배와 취재대상자였던 회사의 고위 관계자가 나와 있었다”며 “이 자리에서 고급 양주와 음식을 함께 먹었고 나중에 1백만원 상당의 ‘구찌’ 핸드백을 받았으나 핸드백은 고심 끝에 3일 뒤 우편을 통해 제공자에게 다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나중에 당시 자리를 함께 했던 이들은 <…사실은>의 진행자인 신강균 차장과 강성주 보도국장인 것으로 밝혀졌고, 이 자리를 마련한 이는 신 차장, 강 국장과 학연을 갖고 있는 (주)태영의 변탁 부회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변 부회장은 윤세영 회장의 처남이다.
이같은 사실은 <한겨레신문>이 지난 7일자에서 첫 보도를 한 뒤 세간에 알려지게 됐고, 이후 다른 언론사들이 이를 집중 보도하면서 관계자들의 이름이 속속 확인됐다. 신 차장과 강 국장은 변 부회장으로부터 받은 고가의 핸드백을 다음날 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자는 현재 취재를 위해 미국에 출장 중이며 오는 9일 귀국할 예정이다.
***MBC “언론 윤리 통김하며 머리 숙여 사과”**
이번 고가접대·사건은 지난해 MBC-SBS간에 벌어졌던 ‘보도전쟁’에서 비롯됐다.
MBC는 지난해 방송위원회의 지상파방송 재허가 과정에서 SBS의 대주주인 (주)태영과 윤세영 회장이 공공재인 방송을 사적인 이익 창출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연일 비판했고, 이에 맞서 SBS도 국정감사 등에서 제기된 MBC의 일산 땅투기 의혹 등을 중심으로 공세를 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사실은>은 △(주)태영이 SBS의 간판 공익 캠페인 프로그램인 ‘물은 생명이다’를 이용해 경기도 일대의 하수처리장 공사권을 따냈고(10월 22일 방영) △SBS가 재허가 추천보류를 받은 이유는 순이익의 15%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대주주가 방송사를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며(10월 29일 방영) △SBS는 허가당시부터 정권의 특혜시비가 일었다(11월 5일 방영)고 세 차례에 걸쳐 비판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신 차장은 파문이 확산되자 “연말을 맞아 그동안 불편한 관계를 털어보자는 차원에서 모임에 나갔던 것이었다”고 해명했으나, MBC 내부에서는“보도와는 무관하게 이뤄진 만남이라고 해도 원칙적으로 보면 이는 잘못된 것이며, 앞으로 이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사후 재발방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파문이 확산되자 MBC는 7일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에서 “언론의 도덕적 책임과 윤리를 다시 한번 통감하며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보도했으며, 조만간 내부 인사위원회도 열어 관련자들의 징계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실은>은 MBC가 지난 2001년 5월 <미디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신설했던 대표적인 언론개혁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방송이 담보하지 못했던 미디어비평 영역을 안방으로 끌어들여 언론계와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아왔다. <…사실은>은 지난해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과 관련한 오보사건으로 한 차례 큰 위기를 맞으면서도 지금까지 1백67회를 방영해 오고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프로그램의 존폐 위기까지 내몰리게 됐다.
***SBS노조 “(주)태영 의도 철저한 진상조사 필요” 촉구**
한편 SBS노조(위원장 최상재)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7일 저녁 성명을 내어 (주)태영의 반성과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SBS노조는 ‘(주)태영의 구시대적 작태를 규탄한다’ 제하의 성명에서 “SBS의 대주주인 (주)태영의 최고위급 인사가 지난해 (주)태영에 대해 비판 보도한 바 있는 모 방송사의 보도부문 간부와 일선 기자 등을 만나 향응을 제공하고 금품을 건넨 의혹이 제기됐다”며 “이번 사태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과 함께 (주)태영의 뼈를 깎는 반성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SBS 노조는 “정확한 진상은 추후 밝혀질 것이지만, 언론사와 관계된 기업의 고위 임원이 자사를 비판해온 언론사의 담당기자와 간부를 만나려고 시도한 것만으로도 ‘자본’으로 사실과 진실을 막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 한다”고 덧붙였다. SBS는 이날 메인뉴스인 <8시뉴스>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다음은 애초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됐던 이상호 MBC 기자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의 전문이다.
***<기자와 아내>**
사회생활 만 10년째. 일에 묻혀 세월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사랑한 일이란 다름 아닌 고발기자질. 탐사전문 기자라고 치켜세워봤자 허망하긴 마찬가지다. 본질은 그저 ‘고발’일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탐사기자도 본질적으로는 ‘고자질쟁이’에 불과한 것이다.
스스로를 ‘언론인’이라 칭하며 무리지어 대접받기 원하는 자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고발의 소명을 잊은 사람이 많다. 기자됨의 소명을 잊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때로 그들이 나는 낯설다. 스스로 낮아지려 하지 않으면서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고자질하겠다는 것인지.
기자란 무엇일까? 끊임없이 던져본 질문이지만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돈과 권력 또는 정보를 지닌 자들, 나아가 사회적 가치를 과점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反공동체적 행태를 집어내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시민에게 알리는 일.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기자됨의 기본이다.
10년을 고발기자로 흐르다보니 이런저런 애환도 많았다. 남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일이란 게 그 자체가 내겐 멍에가 된다. 남에게 혹시 싫은 소리라도 듣지 않을까, 나를 노리는 사람에게 약점이나 잡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지만 때린 놈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얼굴이 알려질수록 세상에서 나의 영역은 더욱 좁아진다. 나도 모를 그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이 괴롭다. 그래도 나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그렇다 쳐도, 내 기자생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나의 아내일 것이다.
나의 아내와 내가 결혼한지는 올해로 9년째다. 제 갈길 잘 가고 있는 사람을 꼬드겨 내 삶의 길에 눌러 앉혀놓고, 나는 그동안 기자질에 들떠 밖으로 잘도 떠돌았다. 뒷모습뿐인 남편의 존재, 그런 나를 아내는 지금껏 참 잘 참아주었다. 월급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에 또 나머지를 각종 이자로 떼이고 뼈다귀만 남은 월급봉투를 쥐어줬지만, 여태껏 불평 한마디 없던 사람이다. 혹시나 남편에게 해가 될까봐 남들 다 하는 부동산이나 증권에도 손 한번 못 대본 바보다.
나는 그런 바보 아내에게 아직 변변한 선물 한번 해준 적이 없다. 옷 한 벌은 물론이고 스카프 하나 제대로 사줘보지 못했다. 이따금 ‘소품’이라도 하나 걸치라며 노동조합에서 받은 백화점 상품권을 건내준 게 전부다. 그때면 얼굴가득 기쁜 미소를 내게 보내주는 나의 아내. 그런 날마다 저녁 식사가 풍성해진다. 상품권이 몇 시간 만에 후다닥 식탁 위의 찬거리로 잘게 부서져 올려진 것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며칠 전 기회가 왔다. 아내를 기쁘게 해줄 절호의 찬스였다. 회사 선배 A가 모처럼 저녁을 내겠다고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는 서울시내 최고급 레스토랑. 그 장소에는 또 다른 회사선배 B도 미리 나와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들과 함께 있는 노신사는 얼마 전까지 내가 고발해온 C사의 D사장이었던 것이다.
문득 A선배가 몇 차례 내게 건냈던 말이 생각났다. C사 D사장이 나를 보자는데 함께 나가지 않겠냐는 얘기었다. 나는 그때마다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A선배는 그런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D사장과 약속을 잡았고 그 장소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선배의 처사를 이해해 보려했지만 왠지 모를 처연함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도록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나는 무모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은 없어보였다. 연신 술을 들이켰다. 술 탓인지 어색하기만 했던 나의 미소는 점점 크고 자연스럽게 내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창녀’라는 단어가 자의식의 저편에서 꿈틀거렸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니 어느새 경직된 나의 자세만큼이나 나의 경계심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발렌타인 21년의 맛이 아직도 혀끝으로 전해온다. 그래, 좋은 술은 확실히 부드럽다. 문득 ‘천박한’ 고자질쟁이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틈입한다. ‘젊잖은’ 언론인의 모습을 흉내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모레면 나이가 40인데,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또 뭐가 있겠는가. 짐짓 목소리를 깔아본다. 낮고 침착하게 깔리는 나의 목소리. 그럴듯하게 들려 적잖이 만족스럽다.
경계가 풀리자 비로소 방안을 둘러봤다. C사의 쇼핑백 3개가 나란히 방구석에 정렬된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묘한 흥분감에 휩싸인다. 이 방에서 나가게 될 때쯤 저 쇼핑백중 하나가 내게 전달될 것이다. 과연 저 안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비릿한 욕정으로 내 몸을 탐닉하는 손, 그 손끝에 쥐어진 돈다발의 출렁거림. 금지된 것이 주는 은밀한 속삭임과 끈적거리는 유혹.
술자리를 통해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었다. 정말이지 술은 위대했다. 취하지 않겠다는 나의 자의식 너머로 쇼핑백이 출렁거린다. 그래, 적당한 타협은 필요해. 사실 난 너무 심하잖아? 그래 약간만 타협하자. 너무 전면적으로 싸우게 되면 삶이 너무 피폐해져. 지켜져야 할 온갖 금조들이 너무 불편하다. 내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세상 모두와 모든 자본과 맞서 싸울 순 없잖아? 한 두개쯤 자본과는 친구해도 될 거야. 맞아, 업체와 술 한잔 먹고 기념품 하나 받았다고 흔들릴 신념이면 아예 시작할 필요도 없어. 적당한 어울림 없이 어떻게 ‘그들’의 세상을 알 수 있겠어? 적당한 관계는 오히려 약이지. 잔바리 기자도 아니고 낼 모레면 차장인데. 그래, 내게 쇼핑백이 전달될 때까지 너무도 많은 상념이 나를 빠져나갔다. 아내들을 위한 선물이란다. 묵직한 가방을 손에 들고 나는 그 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미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아내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아내에게 쇼핑백을 전했다. 포장을 열자 그 안에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찌 핸드백이 들어있었다. 일순 아내의 얼굴에서 ‘불안감’과 ‘설레임’이 교차했다. 나는 아내의 ‘불안감’을 해소시켜보려 서둘러 이런저런 말을 펼쳐놓았다. 하지만 실패! 나는 특히 아내에게 거짓말을 잘 못한다.
생전 처음 보는 명품. 구찌 핸드백을 사이에 두고 우리 부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 말고 그냥 쓰라고 아내 쪽에 밀어 넣고서 나는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고발기자의 아내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연예계 ‘노예계약’을 고발해 촉발됐던 연제협 사건. 당시 기자생활에 깊은 회의와 수렁에 빠진 나를 세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아내였다. 당시 연제협은 소속 톱가수 백여명을 동원해 집회를 갖고 나의 처벌을 요구했었다. 기자생활을 접고 어디론가 떠나자는 나의 손을 잡아주던 아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당신 소신대로 싸우다 죽으라고. 아이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말이다. 현관문을 닫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며 흘렸던 엉터리 가장의 눈물을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 한마디는 난리통의 나를 흔들림 없이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몇 차례 재산증식의 기회를 고스란히 놓쳐버린 나는 사실 빵점짜리 가장이다. 결혼 전 아내에겐 한강변 잠원동에 조그마한 아파트가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의 피해자인 아내는 당시 받은 보상금에 약간의 저축을 합쳐 제 살집을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를 임신했을 무렵 우리는 첫 번째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내는 극구 아파트 처분을 반대했다.
그런데 아내의 한마디가 문제였다. 조만간 이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는 얘기가 있으니 팔아도 그때 팔자는 것이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재개발’이라. 강남 복부인들이 할 만한 이야기를 지금 내 아내가 하고 있지 않는가. 아내는 이 말 안 통하는 사내로부터 한참동안 ‘경제정의’에 관한 ‘훈시’를 들어야만 했다. 결국 그날 이후 우리는 전셋집 생활을 시작했고, 헐값에 매각한 우리의 신혼집은 이후 4년 만에 7배나 가격이 상승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지금도 가급적 잠원동 근처를 가지 않으려 애쓴다. 아내의 슬픈 표정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전셋집 생활은 기자인 내겐 집 없는 서민의 입장에 주택정책을 볼 수 있도록 해준 점에서 매우 고마운 일이었으나, ‘기자가 아닌’ 아내에겐 견디기 힘든 불편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정확히 2년 마다 전세값은 절반 가까이 꾸준히 인상돼 주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강남에서 조금 더 먼 곳으로 밀려나는 엄혹한 사회현상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화장품 사건은 그러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날 아내의 옷장에서 우연히 화장품 세트를 발견했다. 그런데 화장품 세트는 한 두개가 아니라 7~8개에 달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살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왠 사치란 말인가. 더구나 화장품을 사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줄터 인데 한 개도 아니고 이렇게 사재기를 해가면서까지 필요했냐 말이다. 아내에게 추궁하자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욱 더 화가나 큰 소리가 나왔다. 그제서야 아내는 무너지듯 말했다. 부업으로 화장품 장사를 해보려고 물건을 받아둔 것이라고.
그리곤 집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나는 그저 걷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울컥 울고 싶어지기도 하고, 자신이 무능하다 싶어 화가나기도 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까지 생각났다. 쌀이 없어 감자인가 고구마로 상을 차린 아내. 그 아내를 멋모르고 혼냈다가 당황해하던 수필 속의 그 남자. 훗날 자라나 내가 그 어리석은 남자가 되리라곤 상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차라리 아내를 돕기로 했다. 부족한 것을 떳떳하게 여겨보자고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단 한 세트의 화장품도 팔지 못했다. 세일즈가 아니라 기자질 하기를 너무도 잘했다고 위안했다. 아내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다른 부업거리를 찾기로 했다. 사내아이를 둘씩 키우며 할 수 있는 부업은 없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내게 포장마차 이야기를 꺼냈다. 쇼핑센터 부근에 오징어를 구워파는 간이 매대를 내면 짭짤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당시는 보증을 섰다가 생긴 빚에다가 그나마 적은 월급도 소송 때문에 절반이 가압류된 상태여서 몹시 견디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어차피 구겨진 스타일.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러자 모든 게 차라리 떳떳하다는 생각이들었다. 나의 곤란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어떻게 남의 궁핍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기자에게 가난만큼 좋은 스승이 어디있겠는가 생각도 되었다.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는 금언도 도움이 되었다.
한 선배의 배려로 포장마차 자리를 보러다녔다. 관념과 실제는 천양지차였다. 그저 건물 입구쯤에 예쁜 매대를 내면 아내도 별 어려움 없이 일을 할 수 있으리라던 나의 기대는 처절히 무너졌다.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 다니면서,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수많은 포장마차를 새롭게 발견했다. 거리에서 오뎅을 파는 아줌마나 떡볶이를 파는 할머니, 오징어를 구워파는 아저씨…. 그들에게서 모두 나의 아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선배는 그들 대부분 적지 않은 자릿새 까지 내고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지저분한 길거리를 벗어나 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다. 자꾸만 길거리에 있을 나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장을 열고 심호흡을 크게 해봤지만 자꾸만 코가 맵게 느껴졌다.
목이 말라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탁자엔 악몽같은 구찌 핸드백이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출근길 나는 아내에게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속없이 주섬주섬 핸드백을 꺼내본다. 천진난만한 나의 아내는 핸드백이 맘에 드는지 작은 행복감을 내비친다. 그저 잘 어울린다고 나는 말해주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핸드백을 중심에 두고 우리 집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은 일종의 집행유예 같은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우리부부는 핸드백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꺼내지 않았다.
핸드백 이야기를 다시 꺼낸 건 어제 아침이었다. 아내도 마음의 준비가 된 듯 내 말을 맞아주었다. 핸드백을 돌려주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며칠 만에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 우체국에서 핸드백을 돌려보내며 나는 작은 시험을 이겨낸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제 2시간 후면 먼 나라 미국으로 출장을 떠난다. 그곳엔 더 큰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시험과 나는 맞서게 될 것이다. 아내에게 핸드백 이야기를 미룰 수 없었던 것도 모두 이번 출장 때문이다. 또한 밤잠을 포기해가며 지금껏 구찌 핸드백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번 출장의 성격 때문이다.
이번 출장은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반하는 일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향후 기자의 숙명은 자본을 경계하는 일이다. 기자의 본분은 시장을 감시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기자가 자본으로부터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 자본과 시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기자라면 젖어서는 안될 일이다. 자본의 공세에 한번 젖게 되면, 해일에 몰디브가 잠기듯 한순간에 끝난다. 자본에 젖은 기자는 앞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기자상을 자임할 수 없는 것이다. 시장 안에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시장을 넘어선 통찰과 감시를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얘기다.
오늘 떠나면 나는 내년 초에 돌아올 계획이다. 나의 출장계획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경우,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리고 각오한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 일. 이를 위해 기자는 어쩌면 목숨 보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할 수도 있다. 불명예와 누명.. 자본은 자기 보호를 위해 그 보다 더한 오명을 기자에게 씌우려할 것이다. 두려운 가운데 형용할 수 없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나의 삶은 이번 출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 분기점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대의 좌판 위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활은 시위를 떠났다. 그저 담대하게 운명의 길을 걸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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