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지배구조를 바꾸는 '모범'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삼성을 '국민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시민이나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재벌정책을 책임지는 대한민국 경쟁당국의 리더가 한 말이다.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18일 오전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삼성이 여러 가지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고, 특히 삼성전자는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받는 기업인데, 삼성이 지배구조 측면에서도 모범적인 지배구조로 바꾸는 사례를 보여줬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지난해 11월에도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결단을 내려줬으면 좋겠다"면서 "특히, 삼성그룹이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에버랜드 등 몇 개의 지주회사 체제로 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삼성의 지배구조, 이른바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는 현행법상 엄연한 불법이다. 그래서 이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던 SK, 금호아시아나 등 다른 재벌들은 지주회사 체제로 속속 전환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최근 공정위는 지주회사 요건을 완화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표 재벌'이자 '국민 기업'이라는 삼성그룹은 아직까지 요지부동이다. 무엇보다 몇 % 안 되는 지분밖에 가지지 않은 이건희 총수 일가가 그룹 전체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게 하는 이 불법적 지배구조를 '알아서' 버리기란 힘든 일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매각 사건'과 '삼성생명의 상장 및 삼성차 부채 문제' 등 온갖 문제들이 다 걸려 있다. 삼성 입장에서 보자면, '모범을 보이고' 싶어도 섣불리 손댈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다.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전날인 17일 "(한미 FTA 등으로) 경쟁원리 확산과 경쟁문화 창달을 주 임무로 하는 공정위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면서 "규제가 폐지·완화되는 영역에서의 규제 공백이 시장기능과 경쟁질서에 의해 채워지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정위가 앞으로 할 일이 많고, 또 열심히 하겠다는 책임감 있는 발언으로 들린다. 실제로 최근 공정위는 국내 4대 정유사들의 유가 담합을 밝혀내고 시정 조치를 내린 데 이어 교복 시장, 인터넷 포털 시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며 세간의 호평을 받아 왔다.
하지만 정작 공정위는 스스로 존재이유라 규정하는 '시장 경쟁'을 명백하게 저해하는 삼성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삼성이 알아서 모범을 보여줬으면' 하는 희망이나 피력할 뿐이다.
공정위가 재벌정책을 책임지는 곳이라면 삼성의 지배구조 전환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태를 면밀히 파악해 잘못된 것은 시정하라고 '명령'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게 안 먹힌다면 '처벌'이라도 감행하는 것이 '시장기능과 경쟁질서의 확산'이라는 공정위의 지상과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권 위원장은 이날 방송에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 상황에 대한 질문에는 "잘 모르겠고,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핵심 경영진을 만나볼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이래서야, 공정거래위원회를 '대한민국의 경쟁당국'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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