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조서를 던져버려라."
"변호사가 제출한 서면을 믿지 말라."
최근 이용훈 대법원장이 던진 말이다. 검찰과 대한변협이 감정적으로 반발하기도 했지만, 이 말은 그동안 우리의 형사재판이 어떠한 모습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판사들은 법정에서 피고인이 하는 주장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검찰이 제출하는 피의자 신문조서 등 각종 조서와 변호사가 제출한 변론서면을 사무실에서 읽으며 재판에 임했던 것이다. 이른바 '조서재판'이다. 이같은 재판관행에 대해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각성과 변화를 촉구했다.
일제 하 '예심판사'의 역할이 검사에게 넘어간 꼴
공판중심주의는 형사재판의 모든 증거조사와 심리를 공개된 법정에서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법정에서 형사재판의 당사자인 검사와 피고인(그리고 변호인)이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고 날카로운 법리공방을 벌인다. 판사는(국민참여 재판이 도입되면 배심원들이)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피고인의 유죄 여부에 대해 심증을 형성해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재판의 모습이라 생각하겠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형사법정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사법개혁에 있어 공판중심주의는 중요한 개혁과제의 하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판중심주의는 건국 이래 형사소송의 대원칙이었는데, 왜 이제야 우리는 공판중심주의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인가? 공판중심주의는 그동안 어찌하여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제 하의 예심제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예심판사가 공판이 열리기 전에 비공개로 피고사건에 대한 심리를 했고, 이를 조서로 기재하여 제출하면 공판정에서 공판판사가 조서를 기초로 재판을 했다. 그리하여 법정의 심리는 사실상 예심판사의 조서를 확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예심제도는 1948년에 폐지됐고, 1954년 제정된 형사소송법은 재판의 공개와 법정에서의 구두변론 및 증거조사를 원칙으로 규정하여 소위 공판중심주의를 천명했다.
하지만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예심판사의 역할이 검사에게 넘어갔을 뿐이다. 검사가 밀실에서 받은 자백조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해도 판사들은 검사가 밀실에서 작성한 조서를 더 믿었다. 이렇게 된 데는 '법조삼륜'이라는 표현처럼 판사와 검사, 변호사 사이의 끈끈한 동료의식과 엘리트주의가 밑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과거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서 경찰과 검찰이 온갖 불법 구금과 잔혹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한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검찰에서는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데 혈안이었다. 이는 피의자신문조서가 형사재판에서 막강한 위력을 가진 증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고문에 의해 자백을 강요받았음을 주장해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자백의 신빙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최근 여러 과거사위원회들의 조사를 통해 과거 군사독재와 권위주의정권 시절에 자행된 각종 조작사건이 하나둘 베일을 벗고 있다. 2006년 봄에 재심이 받아들여진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검찰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법원이 권력의 주문대로 재판을 선고한 사건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날 새벽에 그들은 처형당했다. 법정에서 하는 재판이 오로지 조서의 신빙성을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로 전락해버리고 피고인이 법정에서 하는 주장보다 각종 고문과 회유, 협박으로 얻어진 검찰조서를 더 믿는 재판 현실에서 이와 같은 한국 사법사의 치욕적인 조작사건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판 현실은 국민의 인권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적법절차를 유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증거 분리제출 방안은 '검찰편의주의'
반성이 우선이다. 공판중심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법 부정의에 대해 철저하게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최근 공판중심주의의 실현 방법을 두고 검찰과 법원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면, 그 어디에서도 오욕의 사법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공판중심주의를 마치 검찰과 법원 사이의 권한분배의 룰을 바꾸는 정도로 인식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그들끼리 만의 권한다툼이 있을 뿐 국민은 없다.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감당해야 했는데도 말이다.
공판중심주의는 그저 공판정에서 판사의 주도권을 강화하고 모든 재판심리를 판사의 지휘 아래 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헌법에 보장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막강한 증거수집 능력과 강제처분 권한을 가진 검사에 대응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충실하게 보장하고 적법절차와 원칙을 실질적으로 실현하고자 할 때 비로소 공판중심주의라는 명제가 개혁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
검찰은 공판중심주의의 실현이라는 이름 하에 증거분리제출 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겠다고 한다. 공판정에서 피고인이 어떤 전략을 펼지 모르니까 조서 등 증거와 자료를 재판 초기에 한꺼번에 제출하지 않고 재판의 추이를 보아가며 분리해서 제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검찰은 체포, 구속, 압수수색 등의 강제처분 권한과 참고인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 막강한 증거수집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하면 피고인의 지위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헌법은 형사피고인에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방어권의 보장을 천명하고 있으며,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에게 검찰이 제출한 증거서류와 자료를 열람복사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검찰의 증거분리제출 제도는 결국 검찰이 확보한 증거와 자료를 피고인 측에 하나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피고인의 기록열람권을 무력화시키고 방어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검찰은 증거분리제출 제도가 공판중심주의 실현 방안이라고 강변하지만, 사실 이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는 반헌법적인 것이며 공판중심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검찰편의주의 발상에 불과하다.
공판중심주의가 잘 발전된 영미의 형사재판에서는 증거개시 제도가 정착되어 있다. 본격적인 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판사의 지휘 아래 검찰이 확보한 모든 증거서류와 자료를 공개하고 피고인 측에 제공한다. 그 이유가 향후의 법정공방에 대비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충실히 보장하기 위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검사가 사전에 공개하지 않은 증거를 재판 도중에 기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및 방어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되어 허용되지 않는다. 사개추위에서 마련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이러한 증거개시 제도를 도입하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피고인의 기록열람등사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동안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서의 증거 사용 폐지가 첫걸음
첫째, 증거법의 개혁이 시급히 필요하다. 공판중심주의는 법정에서의 주장과 구두변론이 재판의 기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혐의사실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밀실에서 작성된 자백조서를 손쉽게 증거로 인정하도록 하는 현행 형사소송법은 공판중심주의의 실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다.
물론 수사기관에서 피고인이 한 발언이나 자백은 유죄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는 피고인이 수사과정에서 한 자백진술이 증거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그 피고인을 조사한 수사관이 직접 법원에 출석해 증언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피고인과 변호인은 수사관을 상대로 강압 여부나 진술 당시의 상황 등을 법정에서 조목조목 따질 수 있고 수사관이 작성한 조서의 신빙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판사는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외국에서는 조사했던 수사관의 법정증언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수사절차에서 작성된 조서를 공판정에서 낭독하고 피고인이 이에 대해 성립의 진정을 인정하는 식으로 대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공판중심주의의 첫걸음은 조서의 증거 사용을 폐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다 충실하게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판중심주의 재판절차에서는 피고인의 방어능력의 정도가 재판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커지게 될 것이다.
구두변론을 위주로 하는 공판절차에서 피고인의 방어능력은 사전에 공판절차의 증거조사에 얼마나 잘 대비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사절차에서부터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다 강화하고 피의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공판중심주의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셋째, 사법시스템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보강하는 것도 급선무다. 법정에서 증거조사를 충실하게 하려면 사건당 재판시간이 지연되는 것은 다소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판사 수와 법정 수를 대폭 늘려야 할 것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347개 형사재판부가 145개의 형사법정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법원은 앞으로 재판부 대 법정의 비율을 2대1로 맞추기 위해 28개 형사법정을 증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법정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판사 1인당 사건 수가 수십 내지 수백 건에 이르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고 중요하다.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주장에 귀기울이면서 충실한 심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판사 수를 대폭 늘려야만 한다.
아울러 변호사 수도 대폭 늘려야 한다. 현재처럼 변론서면을 법원에 제출하는 것이 주 업무인 상황은 앞으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진상을 꿰뚫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피고인의 주장을 충실히 반영하는 논리로 무장해야 한다. 이로 인해 변호사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과 노력도 증대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가뜩이나 비싼 수임료가 증액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국민들이 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저해하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판중심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변호사를 필요로 한다.
며칠 전 법원의 한 중견판사는 한 언론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피고인이 하는 두서없는 말보다 논리정연하게 작성된 조서가 더욱 믿음직스럽다는 것이다. 조서에 의존하면 판사들은 편할 것이다. 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보장은 법정에서 하는 피고인의 언변이 다소 어눌하고 법적으로 정교하지 못하더라도 그 주장을 세심히 경청하고 그 속에서 법적 쟁점을 추출해내는 것에서 시작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률전문가에게는 다소 불편할지라도 말이다. 국민은 그러라고 당신을 법조인의 자리에 앉혀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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