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적인 법관 인사제도
나는 이러한 불신의 핵심 원인으로 사법권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을 든다. 특히 법관에 대한 구시대적 인사제도로 인하여 판사들이 제대로 재판을 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판사의 신분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재판장으로서 1988년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에 대한 위헌제청 결정과 1997년 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에 관한 위헌제청 결정을 했을 때 나는 법원 내외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압력을 받게 되었고, 그 압력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연수 기간과 헌법재판소 재판연구관으로서의 근무 기간에 세계 각국의 헌법제도를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우리나라 법관인사 시스템이 매우 후진적임을 깨닫게 되었고, 법원의 많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나는 줄기차게 사법부의 독립 내지 선진화를 위한 사법개혁을 주장해 왔다
판사의 신분을 불안정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다단계 승진제도다. 법률적으로는 판사는 대법원장, 대법관, 판사 정도로 간단하게 분류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분류가 매우 복잡하다. 예비판사를 최하부로 하여 지방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단독판사, 고등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부장판사, 재판연구관, 고등법원 부장판사, 지방법원장, 고등법원장, 대법관 등으로 단계가 세분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단계를 훨씬 더 세분하는 경우도 있다. 각 단계는 사법연수원 기수와 성적에 따라서 분류된 동질적 판사들로 구성된다. 판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다단계 구조를 한 단계씩 밟아가면서 승진하고, 정해진 시점에 승진하지 못하는 판사는 퇴직하게 된다.
특히 고등법원 부장판사로의 승진은 판사 승진제도의 꽃이다. 대개 20~30년 정도 판사로서 근무한 사람들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다. 일단 고등부장이 되면 차관급의 대우를 받으면서 고급 관용차와 운전사를 제공받는다. 고등부장에 발탁되지 못한 판사는 판사로서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상하게 되고 대부분 불명예스럽게 자진 퇴직한다. 이런 제도 때문에 고등부장이 아니면서 평판사로 남아 있는 유능한 판사는 거의 없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러한 다단계 승진제도로 인한 부조리는 지극히 심각하다.
판사의 평균연령이 40세 전후라니
우선, 이 제도는 사실상 법관에 대한 강제퇴직 제도로 작용한다. 승진에서 제외된 판사는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기 때문에 더 이상 법원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승진에서 탈락한 판사라 하더라도 그에게 퇴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궁색한 변명을 할지 모르지만, 이는 현실을 무시한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승진명부가 살생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판사로 임용된 후 판사로 정년을 맞는 비율이 1%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판사직은 평생직업이 아니고, 고급 변호사로 개업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그치게 된다.
둘째, 유능한 법관이 강제퇴직함으로써 법원 판결의 질이 떨어지고, 판사의 평균연령이 매우 연소하게 된다. 판사가 반드시 연령이 높을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법원의 판결이 판결로서의 권위를 갖추고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판사가 사회적인 분쟁을 해결할 만한 경륜과 권위를 갖출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재의 다단계 승진구조에서는 법원에 남는 유능한 경력판사는 극소수에 머물게 되고, 판사의 평균연령은 40세 전후에 그친다.
셋째, 법관의 중도퇴직은 전관예우 문제를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경력이 많은 판사가 변호사로 개업하여 사건을 수임한 경우 그 사건에 대해서는 그와 동료였던 판사, 그의 배석에서 판사생활을 했던 판사, 신출내기 판사 등이 공정하게 재판을 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대법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대법관들은 법관으로서 정년을 맞지 많고 대개 60대 초반에 퇴직하여 변호사로 개업하는데, 이들이 상고사건을 독점한다. 현재 대법원장인 이용훈은 대법원장이 되기 직전 4~5년 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65억 원을 벌었다고 인사청문회에서 밝혔다. 현재의 대법관인 박시환은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13억 원을 벌었다고 했다. 이것이 전관예우의 현실이며, 법원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넷째, 다단계 승진제도는 재판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승진제도 하에서라면 어떤 판사든지 승진을 염두에 두고 재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승진제도 아래에서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판결을 하는 판사는 도태될 수밖에 없고, 예의바르고 고분고분한 성향의 판사들만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이들만이 대법관 승진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결국 대법원조차 보수적이고 동질적인 판사들로만 구성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다단계 승진제도는 합의부 재판을 무력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법원조직법에서 중요한 사건을 합의제로 재판하도록 규정한 취지는 3인의 판사가 대등한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합의함으로써 신중한 결론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법원의 경우 재판장과 배석판사의 경력차이가 너무나 크고 승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근무평정을 부장판사가 하도록 되어 있는 까닭에 실질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석판사는 마치 학생이 지도교수를 대하듯이 부장판사를 따르고 배우는 도제에 불과하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는 폐지돼야
이상에서 보듯이 다단계의 승진구조는 판사의 신분을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재판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판사가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것이 제도와 관행으로써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단계의 위계구조와 승진제도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판사들 간에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고, 일단 판사가 되면 정년에 이르러 명예스럽게 퇴직하는 아름다운 관행이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즉 고등법원에서 합의재판은 대등한 고등법원 판사들 간의 실질적 논의에 의해서 진행되어야 하며, 지금처럼 부장판사가 연하의 배석판사를 거느리고 지시·통제하는 방식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대법원에서는 다단계 승진제도의 문제점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법관의 단일호봉제를 도입했지만, 다단계 승진제도가 약화되거나 폐지되도록 하지는 못했다. 최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의 사법개혁 법안은 법관의 다단계 승진제도에 대한 조치를 담고 있지 않다. 다만 2012년까지 판사의 50%를 변호사 중에서 배출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게 되면, 연수원 기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판사의 위계구조는 파괴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개추위의 안은 판사들의 위계적 서열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변호사 중에서 임용되는 일부 판사들은 법원의 주류가 되지 못한 채 법원의 과중한 업무를 보충적으로 처리해주는 보조자의 역할만 수행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제도로는 유능한 판사를 구할 수도 없고, 재판의 권위를 높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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