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계화 운동의 지도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월든 벨로 필리핀대학 교수(사회학)는 26일 자신이 이끄는 국제시민단체 '남반구포커스(Focus on the Global South)'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도하라운드가 붕괴했다는 소식은 오랜만에 듣게 된, 개발도상국들에 좋은 일"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 글에서 벨로 교수는 도하라운드에 대해 "처음부터 선진국들의 목적은 자기들은 최소한의 양보만 하면서 개발도상국들로부터 더 많은 시장개방을 얻어내는 방향으로 협상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며 "그 명칭에 '개발'을 끌어다 붙인 것은 그와 같은 과정의 불쾌한 맛을 덜어내기 위한 냉소적인 술책일 뿐이었다"고 비난했다.
벨로 교수는 도하라운드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번에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와해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과제는 WTO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무역 메커니즘이 아닌 다른 대안의 틀과 제도, 즉 무역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대안의 틀과 제도를 창출해내는 쪽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의 전문을 번역해 옮겨 싣는다. 원문은 http://www.focusweb.org/content/view/984/36/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도하라운드의 붕괴가 개발도상국들에 최선의 결과인 이유>
지난 월요일 제네바에서 세계무역기구의 도하라운드가 붕괴한 것은 오랜만에 듣게 된, 개발도상국들에 좋은 일이다.
7월 27~28일로 예정된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를 앞두고 지난 2주 간 도하라운드라는 글로벌 무역협상을 붕괴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대대적인 구조 노력이 펼쳐졌다. 이런 노력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선진8개국(G8) 정상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8개 나라 지도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경제성장을 이루고, 개발의 잠재력을 창출하고,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라고 도하라운드를 묘사하며 이 라운드의 성공적인 타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묘사는 순전한 신화일 뿐이다. 도하라운드가 '개발 라운드'라는 생각보다 더 진실과 먼 것은 없다.
2001년 11월 도하에서 시작된 협상의 처음부터 선진국 정부들은 대다수 개발도상국들의 요구, 즉 "이번 협상에서는 새로운 라운드를 출범시키는 것은 피하고, 과거에 이미 약속된 것들을 실행하는 어려운 과제에 초점을 맞추자"는 요구를 거부했다. 처음부터 선진국들의 목적은 자기들은 최소한의 양보만 하면서 개발도상국들로부터 더 많은 시장개방을 얻어내는 방향으로 협상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 명칭에 '개발'을 끌어다 붙인 것은 그와 같은 과정의 불쾌한 맛을 덜어내기 위한 냉소적인 술책일 뿐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농업 협상
이는 이번의 협상 붕괴 직전에 농업 협상이 처해 있었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자국의 국내 보조금 지원을 줄이는 문제와 관련해 WTO 사무총장이 낸 절충안의 조건들을 수용했다고 하지만, 그 절충안은 200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한 다른 보조금들은 건드리지 않은 것이었다. 유럽연합(EU)의 경우도 수출보조금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데 동의했지만, 550억 유로에 해당하는 다른 형태의 수출보조금들은 방치된 상태였다. 미국과 EU를 비롯한 선진국들은 겨우 이런 최소한의 양보만 하는 대가로 개발도상국 시장에 자기네 농산물을 수출할 때 적용되는 관세를 대폭 낮출 수 있기를 원했다.
협상의 막판까지도 미국은 개발도상국 농민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모두 제거하려는 결의에 차 있는 듯했다. 수전 스워브 미국 무역대표는 2005년 12월에 발표된 홍콩 각료회의 선언에 이미 반영된, '특별제품' 및 '특별 세이프가드 메커니즘'과 관련된 조항들을 공격했다. 이런 장치들은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 각국 정부들로 하여금 일부 제품들을 관세인하의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해외에서 보조금 지급을 받아 생산된 제품의 수입에 대한 관세를 인상함으로써 국내 농업이 잠식되는 속도를 늦출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일방으로 기울어진 조건대로 결론이 내려진다면 WTO 협상은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안보를 저해하고, 그 가난한 나라들의 농산물 수입관세를 인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는 기아를 대대적으로 확산시키고, 전 세계에 걸쳐 수억 명의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한 처지로 몰아넣을 처방이다. 이런 처방이 개발도상국들에 초래할 결과는 WTO 농업위원회에서 필리핀 정부 협상대표가 한 다음과 같은 말로 가장 잘 요약될 것이다. "식량안보와 농촌의 고용 상 전략적인 부문인 우리의 농업은 소규모 생산자들이 국제 무역환경의 엄청난 불공정함에 의해 도살당하면서 이미 불안정해졌다. 우리의 소규모 생산자들은 이제 국내 시장에서도 도살당하고 있고, 가장 탄력적이고 효율적인 생산자들조차 곤경에 처해 있다."
산업 파괴의 유령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농산물 관세의 대폭적인 인하만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자기네 공업제품과 기타 비농업 제품이 개발도상국 시장에 최대한 많이 진출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비농업 시장접근(NAMA)' 협상에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 가운데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 비농산물 관세를 60~70% 삭감할 것을 요구한 반면, 자기네 비농산물 관세는 20~30%만 낮추겠다고 했다. 이런 태도는 GATT-WTO의 '불완전 상호주의 원칙'(개발도상국은 선진국보다 관세감축 및 개방의 정도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할 수 있다는 원칙-옮긴이)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불공평한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들에 의해 부과되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요구사항들을 수용해 국내 산업을 파괴하는 데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도하라운드 협상 과정에서 대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이 느껴 온 좌절감의 표현이다.
도하라운드의 성공적인 타결을 위해 개발도상국들이 부담하도록 요구받는 것에는 농업의 절멸과 산업의 파괴만 있는 게 아니다. 개발도상국들은 WTO의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 협상에서 국내 공공서비스를 구매하거나 통제할 권리를 외국 기업들에 더 많이 허용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며, 이런 요구는 개발도상국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필수 공공서비스를 약화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비용-편익 방정식
WTO에 의해 관리되는 세계화가 개발도상국들의 이익에 해로울 것이라는 경고는 더 이상 개발도상국들이나 세계 시민사회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무역 자유화에 그동안 가장 찬성하던 기관들도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도하라운드의 편익이 그동안 크게 부풀려졌음을 인정하고 있다. 세계은행이 2005년 가을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하라운드가 불러올 개혁을 전망해본 결과, 개발도상국들이 10년 간 얻게 될 이익은 16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이득은 개발도상국들의 국내총생산(GDP) 총액 중 0.16% 또는 개발도상국들의 국민 1인당 하루 1페니(센트)라는 미미한 금액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가난한 수십억 인구의 일인당 소득은 1년에 단지 2달러 정도만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도하라운드의 아젠다를 기업의 이익에 맞게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프로젝트를 홍보하고 그것을 개발도상국들에 수용시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명분으로 동원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2005년도 세계은행 연구보고서도 이전에 세계은행이 냈던 연구보고서들에 비하면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단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2005년도 연구보고서도 WTO 체제가 개발도상국들에 부과하는 많은 비용들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보고서는 WTO의 '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 하에서 생명 구호에 필요한 의약품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나게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기업의 특허독점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서술하고 있지 않다.
개발도상국들에 부과되는 이런 비용들은 자유화의 이득으로 주장되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추정도 있다. 예를 들어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의 최근 연구에서는 도하라운드 하에서 개발도상국들이 입게 될 '관세수입 손실'이 연간 320억 달러 내지 6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됐다. 이처럼 정부의 수입 손실이 예측된다는 것은 개발도상국들이 보건, 교육, 급수, 위생 등의 개선을 위한 예산을 그만큼 줄여야 한다는 뜻이며, 그 손실액 규모는 세계은행이 단지 16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한 자유화의 편익에 비해 2배 내지 4배에 이르는 것이다.
도하라운드가 성공적으로 타결될 경우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가 될 지역은 현재 개발이 가장 뒤진 아프리카다. 남반구포커스(Focus on the Global South)의 활동가인 에일린 크와(Aileen Kwa)는 카네기재단,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이 최근 발견해낸 사실들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들은 농산품과 공산품 양쪽의 자유화로 인해 손실에 직면할 것이다. 아프리카 농산물에 대해 다른 지역 국가들의 시장이 개방된다 하더라도 아프리카의 대다수 농민들, 즉 생계형 자급자족 농민들은 경쟁을 할 입장에 있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협상 과정에서 자기네 국내 시장을 개방해야 하고 이 때문에도 손실을 볼 것이다. 사하라 이남이나 동부 아프리카에 다수 존재하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최악의 타격을 입을 것이다."
WTO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종합해 말하면, 도하라운드의 잠재적 결과가 초래할 경제적 비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는 편익보다 클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이 정책 운영을 할 공간, 즉 산업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공서비스를 보장하고 농민들과 식량안보를 보호하는 등의 정책을 펼 공간이 상실될 것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개발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고, 선진국들이 과거에 빈곤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수단들을 지금의 개발도상국들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다.
자유무역이 이토록 분명하게 개발에 해롭기에 유엔개발계획(UNDP)이 최근에 낸 연구보고서는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일본과 한국이 과거에 성공적으로 시행했던 정책, 즉 주요 국내 산업들을 해외의 경쟁에 노출시키기 전에 관세로 그런 산업들을 보호했던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하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개발을 촉진하고 빈곤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국 정부가 보건, 교육, 급수, 기타 필수적인 공공서비스를 사적 이윤을 노리는 외국 기업들에 매각하도록 하는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분야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늘리라고 이 보고서는 권했다.
무역은 개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WTO의 틀은 개발을 기업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에 종속시키고 개발도상국들을 더욱 더 주변으로 밀어낸다. 도하라운드가 개발에 미친다고 주장되는 유리한 효과에 대한 환상을 품기를 중단할 때가 됐다. 도하라운드의 붕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다. 이번에 WTO 협상이 와해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과제는 WTO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무역 메커니즘이 아닌 다른 대안의 틀과 제도, 즉 무역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는 대안의 틀과 제도를 창출해내는 쪽으로 전환돼야 한다.
(번역=이주명 기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남반구포커스에 게재된 원문의 '크리에이티브 코먼스 라이선스' 조건에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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