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4일 오후, 한국은 온통 흥분의 느낌으로 가득했다. 야구로 미국을 누르는 역사적인 사건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건장한 청년들이 푸른 들판에 나서 몽둥이를 마음껏 휘두르고 야물고 하얀 공을 힘껏 던져 이들보다 덩치가 더 큰 미국의 거인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 속 한 구석에 가지고 있었을 법한 미국 콤플렉스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이겼다, 이겼어!
***야구로 미국을 한방 먹이는 동안 평택에서는**
정확히 같은 시간, 평택의 대추리 들판에서는 미군 기지로 사용할 땅을 확보할 목적으로 한국의 경찰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다는 숨 가쁜 소식이 인터넷을 타고 계속 날라들고 있었다. 이 들판에는 안타깝게도 텔레비전 화면 속의 '거포'도, 든든한 마무리 '해결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평생 농사일 밖에는 모르는 농투성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활동가들이 거대한 미국의 힘을 대신 집행하려는 경찰의 물리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무 소리 말고 남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주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일까? 수십 년간 한 마을을 이루고 밭을 함께 일구며 서로서로 고된 삶을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살아온 공간을 포기하고 돈 몇 푼 쥐어주면서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떠날 결심을 해야 될 당사자들과 충분한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결정과 정책만 통보받는 형식이라면 뉘라도 분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농민들에게 땅과 마을은 존재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들에게만 뿌리인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상실한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의 도시적 환경과 근대적인 경제 체제의 무분별한 확장을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삶을 이리저리 낚아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될 때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없애버려도 상관없다는 그릇된 마음가짐일 뿐이다. 농민들이 전체를 위해서라면 제발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주길 바랄 수 있는, 그런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다.
때로는 북한을 선제공격할 목적으로, 때로는 중국을 위협할 목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중동의 어느 지역을 초토화시킬 목적으로 굉음을 울리며 미군의 전투기를 출격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우리의 기름진 옥토 285만 평을 새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땅에 서려 있는 농민들의 삶의 흔적과 문화, 그리고 슬픈 우리 현대사의 숨결을 아스팔트 활주로로 덮어버리려 하니, 그 자리에서 아무 소리 말고 비켜달라는 요구를 담고 있는 종이쪽지 한 장이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대추리 농민들에게 날아든 것이다. 종이 한 장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지금 대추리 황새울 들판에는 경찰의 위협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대추리 농민들에게도 전 국민의 응원을**
'국익'과 '전체의 이익'은 언제나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미심쩍기 그지없다. 국익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라고 명령 내릴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희생을 감수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당사자들뿐이다. 주민투표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이다. 우리에게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터를 결정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한 경험이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는 공권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법 집행을 하려는 생각을 물리고 주민투표와 같은 민주적 절차를 밟을 것을 권고한다. 그래야 지금이 광주 학살이 있었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지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시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부 당국자들뿐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힘없는 한국의 농민들이 한국 경찰복을 빌려 입은 미국의 거인들과 힘겨운 싸움을 현재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한국 야구가 미국을 넘어 세계 제일을 향해 나아가려 하니 2002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거리응원을 하자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응원구호가 꼭 스포츠를 통한 국민통합의 촉매제로만 쓰이라는 법도 없다. 한걸음에 평택까지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이제 "대~한민국"의 구호를 대추리 황새울 들판에서 고투를 벌이고 있는 농민들에게도 전해드리자. 거리 응원에서 "대~한민국"의 구호를 외칠 때 한 번은 우리 야구팀을 위해서, 또 한 번은 대추리의 농민들을 위해서 그 구호를 외쳐보자. 대추리의 어르신들, 올 한 해도 농사 꼭 지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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