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거대 양당 모두 비례위성정당 창당을 선택했다. 미래통합당 진영과 달리 그 반대편에서는 비록 수줍게 연합정당이라 자처하기는 하지만, 내용을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다름 아니다. 민주당계 위성정당 추진 세력은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망가뜨리는 세력에 맞서려면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취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댄다. 한국 정치에는 양당 독점 구도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려니 이렇게 난해해진다.
또 다른 논리도 있다. 이쪽은 좀 식상하기는 해도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다. 극우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 제21대 국회를 좌우하지 못하게 막으려면 더불어민주당부터 원외 진보정당들까지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계 위성정당을 굳이 연합정당이라 부르는 이들은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정당 투표용지에서 양대 세력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를 모조리 지워버리려 한다. 그리고 정의당처럼 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세력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연합의 방해자로 낙인찍는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민주대연합'론이다.
저마다 여러 근거와 경험을 대며 민주대연합을 강변하며, 거기에는 영미식 양당 정치 추종, 김영삼-김대중 시대 이래의 상식 등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한데 그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1980년대 운동권의 도식적 사회과학 학습의 잔재다. 이 시기에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가 갈렸다고 하지만, 둘이 내세우는 혁명론에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것은 '반파시즘 민주혁명'이었다. 그리고 '반파시즘'은 흔히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최대 결집을 요청한다고 이해됐다. 이것이 대중적 관념으로 자리 잡으면 민주대연합 논리가 된다.
그러나 이참에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정말 파시즘만 아니면 모든 세력이 다 연합해야 한다는 게 전 세계 반파시즘 투쟁의 핵심 교훈인가? 지금 시점에 굳이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단지 민주당계 위성정당이 내세우는 민주대연합론을 논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늘날 불평등과 기후 재앙, 신종 바이러스 대유행 같은 지구자본주의의 실패 속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면, 100년 전 지구자본주의의 첫 번째 위기 속에 전개된 역사적 경험을 제대로 재구성-재평가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막기는커녕 키운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
늘 그렇듯이 역사는 선과 악, 정통과 오류의 단순 도식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역동적이다. 왕년의 운동권이 해외 교과서들을 통해 접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논리는 지극히 단순 명쾌했지만, 역사를 따져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의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세력들과 파시즘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흔히 파시즘이 1929년 대공황 이후에 급격히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휩쓸고 지나간 유럽 대륙에서는 1920년대부터 숱한 원시-파시즘, 정통-파시즘, 유사-파시즘 세력들이 활개 쳤다. 또한 이들에 맞서 의회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나선 리버럴(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연합도 이미 1920년대에 각국에서 집권하고 있었다.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에도 이런 세력 구성의 연립정부들이 들어섰고, 프랑스에서도 '좌파 카르텔'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정부가 1920-1930년대에 걸쳐 두 차례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좌파 카르텔을 구성한 양대 세력은 급진사회(주의)당과 사회(주의)당이었다. 급진사회당은 비록 당명은 아주 급진적이지만, 실제 성격은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았다. 이 당은 프랑스 리버럴의 결집체로서, 지금 대한민국의 더불어민주당과 아주 유사한 정당이었다. 더불어민주당에 전두환 독재에 맞섰던 86세대가 결집해 있는 것처럼, 급진사회당에는 세기 전환기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에서 왕당파-군부-가톨릭교회-반유대주의 동맹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 투쟁을 벌인 경험이 있는 정치가, 지식인, 중산층이 모여 있었다.
급진사회당은 1923년에 처음으로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맺었다. 나날이 강성해지던 우파 블록에 맞선다는 게 명분이었다. 우파 블록은 단지 당세가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점점 해외 파시즘의 영향을 받으며 드레퓌스 사건 이전의 수구 세력으로 회귀하려 했다.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은 이런 극우파의 집권을 막겠다며 제1차 좌파 카르텔을 결성했다. 당시 프랑스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원의원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실시했고, 좌파 카르텔은 결선투표에서 급진사회당-사회당 후보 단일화를 통해 위력을 발휘했다. 1924년 5월 좌파 카르텔의 총선 승리로 사회당까지 참여한 중도 좌우파 연정이 출범했다.
다음 총선에서는 우파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좌파 카르텔의 힘이 소진된 것은 아니었다.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이 제2차 좌파 카르텔을 결성해 1932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런 잇단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급진사회당이 주도하는 정부가 통치하던 그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이웃 나라 이탈리아와 독일처럼 현대화된 극우 대중운동, 즉 파시즘이 급성장했다. 급기야 1934년 2월 6일에는 파시스트 행동대가 의사당을 급습해 거의 쿠데타 성공 일보 직전까지 가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극우파의 성장을 막겠다며 리버럴-사회민주주의 대연합을 만들어 선거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는데, 왜 극우 파시스트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는가? 우선, 좌파 카르텔을 주도하던 급진사회당의 부패와 위선 때문이었다. 급진사회당 정치가들은 선거 때는 “200대 가문 타도”를 외치며 사회당보다 더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부를 늘려가는 금융 자본(200대 가문)과 대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집권하고 나서는 금융계의 이익에 자기들도 한 발 걸쳐보려고 온갖 모략을 일삼았다. 1934년에 의문사(많이 이들이 자살'당했다'고 믿은)한 금융 브로커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의 배후에는 급진사회당 정치인들이 있었다. 이 추악한 스캔들은 대중을 격앙시켰고, 극우파를 단결시켰으며, 프랑스판 파시즘을 급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런 '민주-좌파' 세력의 부정부패는 단지 더 근본적인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었다. 그 질병이란 좌파 카르텔이 지키자고 부르짖는 '민주주의'가 텅 빈 상징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좌파 카르텔은 극우파를 '반민주' 세력이라 규정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자신들을 지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켜야 할 '민주주의'가 막상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보면 아리송하기만 했다. 스타비스키 사건 따위의 추문들로 얼룩진 의회제, 1789년 대혁명의 기억을 닳고 닳을 정도로 반복하는 시민-종교적 의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가톨릭교회와의 문화 투쟁 ... 이런 것들뿐이었다.
좌파 카르텔이 수호하자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질수록 파시즘의 매력은 커져만 갔다. 파시즘은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공허하기만 한 이 민주주의를 폐기하자고 외쳤기 때문이다. 대신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안정된 새 체제를 수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옆 나라 독일에서는 새 정권(나치당)이 실업 문제 해결에 성공하고 있었다. 1930년대 어느 시점을 살아가던 대중에게는 이쪽이 훨씬 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구도에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수록 지게 돼 있었다. 그것은 그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중의 상당수는 파시스트들에게 박수를 치면서 민주-좌파의 '민주주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것이 지구자본주의의 첫 번째 대위기 시대에 리버럴-사회민주주의 대연합이 만들어놓은 필패(必敗)의 대립 구도였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진짜 혁신 – 민주주의에 내용 채우기
그러나 혁신이 나타났다. 1920년대식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 대신에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등장했다. 좌파 카르텔이 파시즘의 토양을 만들어준 나라, 프랑스가 그 탄생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좌파 카르텔과 반파시즘 인민전선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의 측면이 더 눈에 띈다. 좌파 카르텔의 두 축인 급진사회당과 사회당이 고스란히 반파시즘 인민전선 구성 세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공산당이 새로운 요소로 추가됐을 뿐이다. 그래서 흔히 급진좌파의 결합을 인민전선의 주된 혁신 지점으로 들기도 한다.
한데 공산당이 참여했다는 것은 더 중요한 혁신의 부수 효과일 따름이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진정한 민중운동에 바탕을 두고 등장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전에 없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사건이 벌어지자 노동자들이 곧바로 거리로 나왔다. 조합원들은 이미 나치 독일에서 노동조합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치당 집권 몇 달만에 모든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금지됐다. 그런 일이 여기에서도 반복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2월 6일 당일에는 노동자들과 파시스트 행동대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1주일 뒤에는 사회당 지지 노총과 공산당 지지 노총이 함께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 참가자는 500만 명에 육박했다.
좌파 카르텔의 기존 구성 요소에 공산당까지 추가돼 인민전선이 결성된 것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의 압력 때문이었다. 급진사회당은 좀처럼 공산당과 함께 하려 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가는 각 당 지휘부보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노동 대중이 급진사회당을 심판할 기세였다. 그래서 1935년에 급진사회당-사회당-공산당 3당 선거연합('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결성됐고, 1년 뒤 총선에서 집권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프랑스 사회는 전쟁으로 나치 독일에 점령되기 전까지 일단 파시즘의 득세를 막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대중운동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아직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성취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민전선의 혁신은 좌파 카르텔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제시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 좌파 카르텔은 실체 없는 '민주주의'만을 되뇌었고,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런 유령 같은 상태에 머물길 바랐다. 적어도 급진사회당의 경우는 이쪽이 자신들이 바라는 질서, 즉 주기적으로 “200대 가문 타도”를 복창하면서도 일상적으로는 현 상태 그대로(status quo) 돌아가는 자본주의에 더 어울렸다.
반면에 인민전선은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전면에 내세웠다. 노동권 강화와 구매력 향상을 강령 맨 앞에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국가의 노력을 '민주주의'와 등치시켰다. 이로써 '민주주의'에는 전에 없던 실질적 내용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3당 협약에 따르면, 이제부터 국가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완전고용과 경기 활성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중앙은행도 국유화(지금은 상식이지만)하고 누진소득세와 독점기업 법인세도 강화하며 외환과 무역도 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럴 때에야 대중은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선택(파시즘)에 더 이상 끌리지 않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이런 '민주주의'를 약속만 했지 실제 실현하지는 못했다.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로 들어선 레옹 블룸의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공산당은 입각하지 못했다)는 (극우파가 아니라) 급진사회당 내 보수파의 반대 때문에 인민전선 강령이 내세운 과제들을 대부분 실현하지 못했다. 다만 총선 승리 직후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대중파업을 벌인 덕분에 프랑스 현대사에 길이 기록될 유급 휴가와 주 40시간 노동, 산업별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과 산업별 단체교섭이 처음 제도화될 수 있었다.
텅 빈 '민주주의'라는 상징에 대중이 바라는 사회경제적 내용을 채우려 한 노력은 슬프게도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서야 일정하게 실현됐다. 뉴딜 체제의 미국과 5개년 계획 체제의 소련을 두 축으로 한 군사 동맹이 전 지구적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역할을 했다. 이후 한 동안 지구자본주의의 일부에서나마 '민주주의'는 완전고용과 보편복지를 보장하는 체제와 동일시됐다. 지금의 대혼돈을 낳게 될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민주대연합 이전에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내용을 말하라
100년 전 먼 나라 이야기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급박한 총선 정국에 무슨 세계사 학습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지난 번 지구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에 닥친 시험이 지금 우리가 처한 시련과 결코 멀어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우리 모습을 너무나 진실에 가깝게 비춰주는 섬뜩한 우화 같기만 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대연합 논리는 1920년대 리버럴-사회민주주의 연합을 닮았다. 프랑스 사례와 견준다면, 반파시즘 인민전선보다는 좌파 카르텔을 연상시킨다.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라는 늑대가 '민주주의'를 빼앗으러 온다고 외치지만, 정작 빼앗길 위험에 놓인 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민주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그치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내놓아야 할 대안은 무엇인가? 불평등을 뒤집기 위해 민주주의가 대결해야 마땅한 상대는 누구인가? 전염병의 지구화 시대에 민주주의가 공허한 이상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100년 전에 완전고용과 보편복지의 임무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실체를 갖추었다면, 오늘날은 어떤 무기로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총선이 한 달 앞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대파국과 대전환의 갈림길을 앞에 둔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답부터 내놓으라. 연합은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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