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미래를 예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의 운동이 앞서서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이런 노동개악을 무려 1년 넘게 준비해 왔다는 점에서,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이 곳곳에서 징후처럼 나타나고 있다.
1년 전 한정애 의원 노동개악 입법안
"무슨 노동개악 입법을 1년씩이나 준비해?" 사실이 그렇다. 문재인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로 국회에 보낸 법안과 대동소이한 법안을 이미 작년 12월에 한정애 의원이 발의한 바 있다. 한정애 의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 환경노동위 여당 간사라는 점에서 단순한 입법발의가 아니라 정부·여당 의견을 대표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한정애 의원 입법안과 올해 정부 입법안 모두 △해고자·실업자의 경우 노조 가입을 허용하긴 하지만 사업장 단위 노조의 임원·대의원으로 선출 불가 △해고자·실업자의 경우 사업장 내 노조활동 제한 등으로 요약되는 독소조항을 안고 있다. 그냥 ILO 협약에 따라 자유로운 노조 가입과 노조 활동을 보장하면 되는데 자꾸 뭔가 금지하고 제한하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행 노동조합법 5조는 누구나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으나(5조 1항), 한정애 입법안에 따르면 굳이 2항과 3항을 아래와 같이 신설하여 실업자·해고자 등의 사업장 내 노조활동을 사용자에게 사전 보고하고 허락을 얻도록 정하고 있다.
상급단체 간부, 간접고용 비정규직도 제한
우선 신설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종사자)"라는 단어 뜻부터 살펴야 한다. (뭔놈의 말이 이렇게 복잡하단 말인가.) 현재 사업주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은 당연히 ‘종사자’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다른 사업주에게 고용된 노동자 또는 실업자는 이 사업장의 종사자에서 제외되어 노조 활동이 제한된다.
그럼 이 사업장에서 노조 활동을 벌일 만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그런 사례에 속할까? 우선 금속노조·민주노총처럼 산별노조나 총연합단체의 임원이나 간부들이 있다. 다음으로 이 사업장의 사내협력업체 노동자들 역시 직접 고용된 ‘종사자’가 아니게 된다. 용역·파견·도급·사내하청 등 간접고용 비정규직 모두가 노조 활동 제한 대상이 된다.
그럼 해고자의 경우는 어떨까? 이게 문제인데 한국의 노동조합법은 중앙노동위원회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만 종사자로 본다. 즉 중노위에서 해고가 확정되면 종사자 자격을 잃게 되므로, 중노위 판정이 지난 해고자 역시 한정애 입법안이 통과될 경우 노조 활동에 제한이 따르게 된다.
목적·시기·장소·인원 모두 사업주에 허락받아라
그럼 상급단체 임원·간부, 간접고용 비정규직, 실업자, 중노위 판정이 지난 해고자 등의 사업장 내 노조활동에 어떤 제약이 따르는 걸까? 한정애 입법안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노조활동의 목적·시기·장소·인원 등을 사전에 사용자에 통보하고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법 규정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없지 않냐고? 잘 보시라. 노조활동 관련 내용을 통보받은 사용자는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해선 안 된다"는 조항이 있지 않은가. 뒤집어서 해석하면 합리적 이유가 있을 경우 사용자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 도대체 어떤 것들이 ‘합리적 이유’에 해당할까? 사용자는 "시설관리에 침해가 된다" "영업기밀 누출이 우려된다" "작업 분위기에 저해된다" 등 말도 안 되는 온갖 이유를 다 들이밀며 거부할 것이다. 그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구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합리적 이유에 기준이 없으니 결국 법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대법원 판결이 나기까지 최소 3년에서 최대 5년까지 상급단체 임원·간부, 간접고용 비정규직, 실업자, 중노위 판정이 지난 해고자 등은 사업장 내 조합활동에 엄청난 제약이 따르게 될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개악안인가. 지금까지 노사 간 단체협약을 통해 자유롭게 노조활동을 해온 상급단체 임원·간부들의 활동까지 가로막힌다는 것이니 말이다.
GM이 정부 노동개악안을 응용하다
지난해 연말 GM은 한국 사업에서 연구·개발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하는 일을 밀어붙였다. 한국GM의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은 처음에는 일방적 의사결정에 항의하는 시늉을 했지만, 결국엔 GM과 손잡고 연구·개발 법인 분리에 합의해주고 만다. 멀쩡한 종합 자동차회사가 생산법인과 연구법인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생산직이건 연구직이건 차별 없이 모두 한국GM 단체협약을 적용받았지만, 연구·개발 법인으로 넘어간 조합원들은 하루아침에 무단협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법인을 분리하면서 고용은 승계하지만 단체협약은 승계하지 않겠다는 것이 GM의 태도였다. 즉, GM의 법인 분리는 노골적인 노조 탄압 수단이었던 것이다.
연구·개발 법인으로 넘어간 조합원들은 어쩔 수없이 새로운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GM은 70여 개에 달하는 단체협약 개악안을 내놓았다. 너무 황당한 개악안이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인데, 그 중 한정애 입법안과 너무 유사한 조항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근무시간 중 조합활동’ 항목이었다. (아래 내용)
노동조합 전임자의 경우에는 당연히 근무시간 중 조합활동이 자유롭지만, 전임자가 아닌 경우 근무시간에 노조활동을 하려면 활동사항·활동시간·인원까지 명시한 활동계획서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다. 종사자가 아닌 경우 사업장 내 노조활동을 하려면 목적·시기·장소·인원을 미리 통보하고 허락받으라는 한정애 입법안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허락받으란 얘기가 어디에 있냐고? 한정애 입법안처럼 여기서도 뒷부분을 잘 봐야 한다. “활동계획서를 회사와 협의하지 않을 경우” 유급 인정도 안하고 사규에 따라 징계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회사 마음에 들지 않는 활동계획서가 제출되면 돈도 안 주고 징계 때릴 수 있는 거다. 심지어 담당 부서장과 노무담당 부서장 양쪽 모두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정규직 조합원에게도 저 정도라면…
GM이 내놓은 개악안은 해고자도, 실업자도, 상급단체 임원·간부도 아닌, 현재 고용되어 아무 문제없이 근무하고 있는 정규직 조합원을 상대로 한 것이다. 만일 한정애 입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경우, 정규직 조합원도 아닌 해고자, 실업자, 간접고용 비정규직, 상급단체 임원·간부에게 사용자들이 보장할 노조 활동이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저런 노조 활동을 위해 사업장에 출입하겠다고 통보하면? 일단 사용자들은 무조건 거부하고 본다. 노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하면? 사용자들은 "억울하면 소송해"라며 버티면 된다.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하면 안 된다며? 이렇게 거부하면 처벌해야지!" 천만의 말씀, 한정애 입법안 어디에도 처벌조항은 없다! 그러니 사용자들은 무조건 버티기만 하면 된다.
진짜로 소송이라도 걸게 되면 재벌과 전범기업을 비호해온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 김&장을 비롯한 수많은 로펌들을 상대해야 한다. GM이 내놓은 단체협약 개악안 역시 GM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김&장 손을 거친 내용일 것이다. 김&장 등의 로펌은 수임료로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으고, 노동자들은 3~4년은 족히 걸릴 소송에 몸도 마음도 지쳐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1년 사이 더 나빠진 개악안
그래서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법률단체·인권단체들까지 모두 나서서 한정애 입법안을 규탄하는 입장을 발표하고 나섰다. 저 개악안이 통과되면 임원도 대의원도 선출할 수 없고, 원청 사업장 내에서 노조 활동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릴 간접고용 비정규노조들도 함께 규탄의 대열에 섰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쁜 개악안으로 만들어왔다. 10월 초에 국회로 넘긴 정부 입법안에는 한정애 입법안에도 없었던 △단체협약 유효기간 최장한도를 2년에서 3년으로 연장 △사업장 일부 및 전부를 점거하는 쟁의행위 금지 등 ILO 협약에 배치되는 조항들, 그동안 자본가들이 요구해왔던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다만 사업장 내 노조활동에 대해 목적·시기·장소·인원을 미리 통보해야 한다는 부분은 사라지고 "사업장 출입 및 시설 사용에 관한 사업장의 내부 규칙 또는 노사 간 합의된 절차 등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바뀌었으나, 여전히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사용자가 모든 것을 허락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은 그대로 두었다. 합리적 이유 없이 거부할 경우 사용자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GM의 단체협약 개악안은 어찌 되었을까? 지난 8개월 사이 십 수 차례의 교섭이 있었고, 2차례 GM의 수정안이 제시되긴 했지만 본질적인 내용의 수정이 없었다. 특히 징계·해고와 관련한 조항들을 개악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고, 앞에 사례로 든 노조활동 관련해서도 일체의 수정안 제시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동안 생산직·사무직의 공동 투쟁과 공동 교섭으로 동일한 임금인상률과 성과급을 적용받아 왔는데, 갑자기 ‘팀GM 성과급제’를 도입하자는 엄청난 개악안을 추가로 들고 왔다. 미국식 업적연봉제를 폐지하고 호봉제 적용을 요구한 것이 한국GM 사무지회가 탄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노동조합의 존재이유를 상실케 할 차등성과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ILO 협약 비준을 위해 노동관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문재인 정부 주장의 목적이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조 할 권리를 없애려는데 있었음이 드러났다. 한국GM 연구개발 법인 분리의 목적이 민주노조 말살에 있었음 또한 드러나고 있다. 지난 1년간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해왔건만, 문재인 정부와 GM 자본은 ‘추가적인 개악’으로 답한 것이다.
ILO 협약에 어떤 원리가 있기에?
문재인 정부는 노동개악안을 국회에 보내면서 기존 ILO 협약 원리에 배치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ILO 협약 어디에 실업자·해고자는 노조 임원·대의원으로 선출되면 안 된다는 원리가 있단 말인가. 협약 어느 구석에 사업장 내 노조활동은 사용자의 허락을 얻으라고 명시되어 있단 말인가.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 내용을 직접 살펴보자. "사전인가 없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데 왜 사용자의 허락을 받아야 할까?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할 권리가 있는데 어째서 해고자·실업자는 대표자가 될 수 없고 사업장 내 노조활동에 제한이 따른단 말인가.
87호 협약의 제3조 2항 "공공기관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하여야 한다"는 얘기는, 마치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서 규정해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노동조합 스스로 규약을 만들어서 진행하면 될 일을, 어째서 법으로 누구는 임원·대의원으로 뽑아선 안 된다는 간섭과 제한을 한단 말인가.
1991년 노태우 정권이 ILO 가입을 추진하면서 국회에서 비준한 ILO 헌장에도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문구 하나가 있다. ILO 협약 비준이라는 미명 아래 기존 노동법을 개악시키거나, 기존 권리를 저하시키는 방향으로 해석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군사독재 정권이 비준한 ILO 헌장의 정신조차 무시하려 들다니, 문재인 정부는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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