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대 옆 유리창을 한 노인이 두드렸다. 김 씨는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은 없네요"라고 말했다. 폐품을 모아 생계를 충당하는 노인이다. 김 씨는 보름마다 들어오는 과자 등을 정리하고 나면 남는 종이상자를 접어 가게 앞에 쌓아놓는다. 대형마트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한 동네에서 조금씩 도우면서 사는 거죠. '아버님'들 오실 때 딸처럼 대하면 굳이 안사도 되는 걸 조금씩 사가시고, '아들'들이 용돈이 모자라면 다른 아이들 모르게 조금씩 깎아주기도 하고, 박스를 모아서 생계 이으시는 '할머님'들도 조금씩 도와드리고……."
김 씨는 2007년 인천 연수구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을 넘겨받았다. 15평 규모의 작은 가게지만 김 씨에게는 지난 20여 년의 경제활동으로 마련한 삶의 터전이었고, 가족과 함께 여생을 버텨갈 희망이었다. 더 이상의 욕심은 없었다.
"4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이 가게를 얻을 생각을 했어요.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남편이랑 둘이서 멀리 나가 일하는 것도 부담이고 해서 집 근처에서 가게를 하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 정도 가게에서 나는 벌이면 부부가 각자 나가서 봉급 벌어오는 정도는 될 거라고 봤어요."
"텔레비전에서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하지만…"
김 씨는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160만 원을 내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권리금과 재고를 받는 것까지 합해 그 동안 벌어놓았던 1억1000만 원을 투자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에 문을 열고 새벽 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몸이 견디지 못하자 남편이 하던 개인 사업을 접고 합류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안정적이었다. 월세를 제하고 한 달 평균 300만 원의 매상을 올렸다.
하지만 2008년 하반기 경제 위기가 시작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당장 손님들의 지갑이 얇아졌다. 용돈이 줄어든 아이들도 발길이 뜸해졌다. 2009년에 들어서자 매상이 30~40% 줄어들었다.
"경기를 타는 업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죠. 사실 요새 텔레비전에서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지갑 사정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와 닿지 않아요. 다들 힘드니까 나도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뿐이죠."
줄어든 수입을 만회하기 위해 남편이 다시 구직에 뛰어들었다. '막노동'을 통해 그가 벌어오는 수입은 100만 원 남짓. 한 달 내내 일하면 수입은 더 늘겠지만 고된 노동 강도에 다른 구직자들도 많아 한 달에 보름 정도밖에 일감을 찾지 못했다. 김 씨는 김 씨대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혼자 장사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 ⓒ프레시안(김봉규) |
아직까진 근근이 버티지만…
김 씨는 처음부터 '장사꾼'이었다. 젊은 시절 호텔 매점으로 시작해 모든 돈으로 커피숍을 차렸고, 여기서 모든 돈으로 다시 목욕탕 매점을 임대했다. 한 번에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었지만 살림이 조금씩 나아지는 보람이 있었다.
"변변히 배운 건 없지만 한 계통에서 계속 일을 하다보면 경험이 쌓이잖아요. 자영업을 하면 하루하루 벌어들인 돈 만지는 재미도 있고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돈은 조금씩 쌓이기 마련이고, 이걸로 좀 더 잘 할 수 있는 가게를 알아보는 식이었죠."
현재 김 씨 가족의 생계는 지출과 수입이 비슷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김 씨는 30대 후반에 남편과 만나 결혼해 초등학생 6학년인 아들을 두고 전세 8000만 원의 아파트에 거주한다. 슈퍼 임대료를 제외하고 남는 월 300만 원의 매상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세 대출금 이자 40만 원, 아이의 피아노‧태권도 학원비 40만 원, 아파트 관리비 25만 원을 뺀 200여 만 원에서 부가가치세 등을 제하면 딱 세식구의 생활비가 나온다. 연금성 보험에 다달이 50만 원씩 붓는 것이 유일한 노후 대책이다. 하지만 매상이 줄자 당장 이자 부담이 와서 남편이 밖에서 버는 돈으로 간신히 메우고 있다.
"아이가 아무리 어려도 요새 학부모들이 학원 한 두 개 정도는 기본으로 보내잖아요. 곧 중학교에 진학할 거고 대학교도 보내야 하는 데 그런 장래까지 생각해서 준비할 만한 여유는 전혀 없는 상황이라 갈수록 불안해요. 집안 어른들한테도 마찬가지죠. 지난달에 어머니 수술 때문에 형제끼리 돈을 모았는데 그날그날 벌어 쓰는 처지에 목돈 내기가 쉽지 않아요."
새로운 위기, SSM
근근이 버텨가던 김 씨 가족에 더 큰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중순 김 씨의 가게 건너편에 입점을 시도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는 경기 한파에 비교할 수 없는 결정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는 인천에서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대한 사업조정 신청이 처음 접수된 곳이기도 하다.
"일 때문에 아이가 혼자 자란 탓인지 조숙한 편이에요. 가게에 와서도 자기 용돈으로 과자 값 내고 먹을 정도로 착한 아이에요. 지난해 SSM 때문에 밤마다 울다가 잔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아들 일기장을 보니 엄마 얘길 쓰면서 '잘은 모르지만 홈플러스가 들어온다는데 나쁜 건가 보다'라고 적어놓더라고요."
김 씨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입점 소식이 들린 직후 인근 슈퍼와 연합해 이를 저지해왔다.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우며 홈플러스 측이 언제 개장을 감행할 지 감시하며 생업을 이어왔다.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SSM은 경기 불황 같은 것과는 달라요. 한 번 입점이 허용되면 장사를 접고 나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이곳은 도심이 아니라서 유동인구도 없고 아파트 주민들이 주 고객들이에요. 저도 그렇고 요새 사람들이 동네 슈퍼에서 장을 보진 않잖아요. 인근 대형마트에서 한꺼번에 사놨다가 당장 라면이나 간장이 떨어지면 급하게 내려와 사가는 식이죠. 근처 학교에서 아이들이 하굣길에 들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먹거나.
그런 곳에 SSM이 들어서면 경쟁이 안 되는 거죠. 이제는 마음을 비웠어요.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요. 입점을 막으면 다행이고, 결국 막지 못하면 장사를 접는 수밖에 없죠."
김 씨는 반년 전에 상가 주인에게 부탁해 임대료를 월 100만 원으로 낮췄다.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정이 어려운데다 SSM 입점 소식이 알려지면서 가게를 내놔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도 별 수가 없었다.
김 씨 자신 역시 장사를 접고 취직할 마음도 조금씩 들고 있다. 평소 여유가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봉사활동에 참여하던 그는 얼마 전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다. 박봉의 직업이지만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열고 있어야 하는 슈퍼보다는 편하겠다는 생각에서다.
50원짜리 조그만 초콜릿 10개를 집어든 한 초등학생이 내민 500원짜리 동전을 받으며 김 씨가 말했다.
"남편과 난 큰 욕심은 없었어요. 미래가 불안한 건 있지만 당장 아이를 건강하게 커가는 것만 지탱하고 싶었죠. 동네 어르신들 오면 차나 한 잔 대접하면서 말벗해 드리고. SSM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영업 구조조정의 승자는 대기업? 한국의 고용시장에서 자영업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를 합한 비임금 근로자는 746만3000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30%를 넘었다. OECD 국가 평균의 2배다. 2009년 기준으로 자영업자 중 고용원을 둔 이들은 전체 자영업자 중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영세 점포의 난립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영업에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여 왔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고용창출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자영업의 구조조정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경기에 민감한 자영업의 특성상 2008년 경제위기의 충격 역시 컸다. 경제위기가 발발했던 2008년 4분기에서 2009년 1분기로 넘어오는 사이 자영업자는 약 32만 명, 전체 비임금 근로자는 47만 명이 줄었다. 별도의 수익원이나 안전망 없이 하루하루의 매출로 생계를 잇는 이들에게 매출 감소는 바로 폐업으로 이어진다. 김지선 씨의 말처럼 "배운것도 변변찮은" 이들이 장사를 접고 뛰어들 곳은 일용직이나 임시직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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