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폭염을 경험했던 작년에 비해 올해 폭염 수준이 낮아 다행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경향성 상, 위험 수준을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기후재난의 예측 정확성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회복력이다.
우리 사회의 기후변화 적응은 안일한 수준이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햇빛 가림막은 스마트 가림막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빈곤층과 취약계층의 여름 나기는 변함없이 힘겹다. 노동 현장에서는 여전히 생존 투쟁이 이어진다. 노동자들의 폭염 노출 실태에서 그 단면을 살펴보자.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지난 13일 청와대 앞에서 '건설현장 폭염 실태 폭로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폭염 대비 실태에 대한 노동자 설문조사 결과, 고용노동부의 가이드라인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그들은 지적했다.
'열사병 예방 3대(물, 그늘, 휴식) 기본수칙 이행지침'은 폭염 위험의 경계단계(35도)의 무더위 시간대(오후 2시~오후 5시)에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옥외 작업 중지를 권고한다. 그러나 설문조사 응답자의 78%가 작업을 계속한다고 답변했고, 56%가 자신이나 동료가 실신 등 이상 징후를 보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건설노조와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옥외 작업 사업장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산업안전보건기준을 더 엄격히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설만이 아니라 배달, 환경, 검침, 농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현장 작업 노동 전반에 대한 온열질환 예방 조치가 강화되어야 한다. 소극적인 권고 조치로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노동자의 작업 중지권을 적극 보장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서울시는 자체 발주한 공사의 작업 중단 시 노동자 임금을 보존해주는 공공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를 전국에 확대할 필요가 있다. 민간사업의 경우 시행사와 시공사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법도 중요하다. 기후변화라는 사회재난이 산업재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할 시점이다.
더 능동적인 구조 변화가 강요되는 시대가 우리 앞에 있다. 기후과학은 우리 편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고 기후 비상사태의 비상구는 없다. 기후위기는 비상하고 급진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성적, 인종적 불평등에 주목하지 않고 탄소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기후변화와 불평등은 악순환 관계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국제관계가 기후변화를 낳고, 기후변화는 온갖 불평등을 악화시켜 현 체제의 모순과 적대 상태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는 행성적 파국으로 전망된다. 생태주의, 급진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거의 모든 사상의 공통된 인식이다. 기후회의론을 신념화화지 않는 자유주의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이들 사이에 타협하기 어려운 차이도 많지만, 유엔 경제사회국의 2016년 세계 경제사회조사 보고서 <기후변화 회복력: 불평등 해소의 기회>에는 누구나 대체로 공감할 것이다. 기후변화가 국가 간, 계층 간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는 최근의 분석들 또한 탄소의 추상화가 아니라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가 된다.
경제와 정치와 기후는 하나로 묶여 있어 21세기 경제-정치-기후 위기를 폭넓게 조망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실패, 민주주의 후퇴, 기후 비상사태 국면이라는 지구-지역적 문명의 변화상은 과거와 단절된 어떤 새로운 체제를 예비하도록 하는 자연-사회가 보내는 신호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노동의 의미와 노동운동의 비전은 핵심 질문이 돼야 한다. 사회 내외부의 많은 것을 매개하는 노동의 의미와 역할은 복합 위기 상황에서 변화해야 하고, 노동운동의 성격과 위상 역시 새롭게 정립돼야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21세기 체제를 기획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전 세계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나 미래 전망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이 환경이라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출현한 노동조합의 정의로운 전환 관점과 그 전략은 기후위기 시대의 비상행동이 필요한 지금, 더 빛을 발하는 선구적 실험이었고 현재 진행 중인 노동운동의 혁신이라 할 만하다. 노동조합의 환경주의와 사회적 노조주의의 경험과 시도들도 노동운동의 자기 갱신의 모습이다. 최근에 선보인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노라 래첼・데이비드 우젤 엮음, 김현우 옮김, 2019)를 통해 이런 '정의로운 전환의 이론과 현장'을 훑어볼 수 있다.
환경운동과 지역사회의 연대, 나아가 계급적 이해와 사회적 필요의 일치는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삼중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노동자가 중요한 사회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지점이다. 물론 녹색경제와 그린뉴딜, 성장과 탈성장,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을 둘러싼 입장 차이와 노선 경쟁도 있고, 많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조직이 여전히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녹색 노동조합이 되길 주저하는 노동진영에 기후변화가 더는 피할 수 없는 미션이다.
우리와 달리, 기후정의가 대세가 되고 있는 추세에서 국제적, 국가적, 지방적 수준의 많은 노동조직이 정의로운 전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오는 9월 20~27일 열릴 국제기후파업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여러 나라의 노동조합이 연대파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학생운동으로 시작해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이 결집하고 있는 파업대오에서 노동운동은 '빵과 장미'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있다.
이제 한국 노동운동도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구조적, 조직적 관성 탓에 당장 녹색 대열의 주력이 될 수 없더라도, 다수의 노동조합이 '기후위기 비상생동'에 함께 할 명분과 실리는 충분하다. 진보냐 보수냐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기후정의의 칼이 될지, 아니면 기후변화의 포로가 될지 선택해야 한다.
과거 10년 넘는 동안 이어진, 국내외 회의에 참석하고 성명서와 보고서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의 관행이 더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초대받지 않더라도 손님이 돼야 하고, 주인의 입장에서 자기 프로그램과 계획을 제안해야 한다. 기후침묵 속에서 과거의 영광은 퇴색하고 현재의 난관은 가중되고 미래의 전환은 강요받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없다. 누구도 기후재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기후범죄를 방조한다면 악마의 맷돌을 더 사악하게 돌게 만들 것이다. 고탄소 불매운동과 탈탄소 생산전환이 지속가능한 정치의 지반을 넓혀 2045년 녹색평화 국가의 가능성을 키울 것이다. 정부와 기술과 시장의 역할도 있겠지만, 모든 불평등과 부정의에 저항하는 기후정의 적록동맹과 헤게모니 동맹이야 말로 더 좋은 사회-자연을 위한 전환의 입구를 발견하거나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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