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세탁법, 정치자금법, 검찰청법 등 시민단체와 선관위 등이 요구한 정치개혁 입법이 모두 물건너갔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7일 선거전략회의에서 정치개혁법과 관련, "부패방지법, 인권위법,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국회법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우리 당이 주도적으로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며 오는 14일 국회에서의 처리를 지시했다.
이 후보는 그러나 "시민단체가 요구한 정치개혁안 가운데 공직자윤리법, 자금세탁법, 정치자금법, 선거법, 검찰청법, 형사소송법 등은 여야간 견해차가 크고 시민단체 요구도 다른 만큼 당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후보가 연내 처리 불가 방침을 밝힌 법안은 시민단체가 요구한 5대 정치개혁법안과 선관위가 요구한 선거공영제 확대안이어서, 벌써부터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등 앞으로 적잖은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연내통과를 지시한 4개 법안**
한나라당은 현재 원내의석의 절반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이회창 후보의 말은 곧 '법'이다. 이후보가 통과를 지시하는 법은 통과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법은 애당초 불가능한 게 현재의 국회 역학구도다.
이후보가 이날 통과토록 지시한 4개 법안은 나름대로 의미를 띄고 있다.
이 후보는 우선 부패방지법과 관련, "부패방지법은 부패방지위원회의 중립성을 보장하고 실질적인 조사가 이뤄지도록 특별검사 임명 요청권 등 권한을 부여하고, 부방위에 대통령 친인척비리에 대한 조사권한을 갖는 기구를 두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인사청문회법과 관련해선 "인사청문회법은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빅4'의 인사청문회가 실시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당초에 한나라당은 금융감독위원장까지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포함시켰었으나, 이후보의 이날 지시에서는 배제됐다.
이후보는 이어 의문사진상조사특별법과 국회법에 대해선 "의문사진상조사특별법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가 이뤄져야 하고, 국회법도 박관용 국회의장이 제출한 좋은 안을 담아 회기내 처리해 달라"고 말했다.
***통과거부한 6개 법이야말로 정치개혁의 핵심**
이회창 후보의 이같은 지시에 대해 일부 언론은 "정치개혁 통과 주도" 등의 호의적 보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야간, 시민단체와의 견해차'를 이유로 추후 검토과제로 넘긴 6개 법안들이야말로 정치개혁 법안의 핵심이라는 게 지배적 여론이다.
아울러 그동안 이들 법안에 대한 당의 안을 내놓았던 한나라당이 '견해차'를 이유로 당안의 입법 자체도 미룸에 따라, 최근의 '이회창 대세론'에 고무돼 여론을 도외시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는 그동안 특검제 도입을 위시해 검찰 중립화 실현을 위한 검찰청법 개정, 부패정치자금을 차단하기 위한 돈세탁방지법 및 정치자금법 개정, 공직자 부패 방지를 위한 공직자 윤리법 개정을 요구해왔다. 이른바 5대 정치개혁 입법 주문이다.
이회창 후보는 그러나 이날 '수용 불가' 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우선 검찰의 중립성을 높이기 위한 검찰청법과 관련해 당초 한나라당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퇴임검찰총장 2년간 법무장관 취임금지, 청와대 파견검사 2년간 검찰복귀 금지" 등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한나라당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만 도입키로 하고, 나머지 조항은 슬그머니 뺐다.
현재 구멍투성이인 돈세탁방지법 및 정치자금법 개정과 관련해 한나라당은 "선관위에 등록된 단일계좌 사용, 선관위에 정치자금 감시권 부여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또한 백지화됐다.
공직자윤리법 개정과 관련해 한나라당은 "재산등록 및 공개의무 대상자 범위 확대, 재산 거래내역 취득경위 공개, 고위공직자의 주식 및 부동산 등 재테크 제한 검토 등"을 제시했었다. 이 또한 사라졌다.
이밖에 "상설적 특검제 도입, 권력비리조사특위 국회내 설치"를 약속했던 특검제 도입법안도 백지화했다.
이뿐이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영제 확대 및 미디어선거 활성화를 위해 제출한 선거법 개정안도 개정불가 방침을 밝혔다.
***법치주의자는 법으로 말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서청원 대표는 지난 7월3일 부패척결을 위한 5대 개혁과제의 연내 입법화를 촉구한 참여연대와 만난 자리에서 이들 법안의 연내처리를 약속했다. 당시는 한나라당이 비록 국회의원 총선과 지방자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선거과정에 드러난 국민들의 '반부패 요구'가 대단하던 시점이었기에 한나라당으로서 이같은 민의를 거부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이회창 후보도 지난 10월 17일 대선유권자연대 대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부패 법안 중 현재 국회 상임위에 계류되어 있거나 심의 중인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 회기내에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또 지난 10월 19일과 25일 TV토론에서 반부패 법안의 연내 통과와 대선자금 공개를 주요 내용으로 대선유권자연대에서 제시한 '국민과의 약속문'에 서명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가 2위와 큰 표차로 앞서 나가면서 '이회창 대세론'이 확산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집권후'를 생각하기 시작한 눈치다.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집권후 발목을 잡힐 공산이 크다. 따라서 '집권 메리트(이권)'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음직 하다. 이회창 후보의 7일 발언은 이같은 한나라당내 공감대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회창 후보는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부"를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모든 위정자들도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예외없이 똑같이 참담했다.
대법관 출신인 이후보는 '법치주의자'임을 자부하고 있다. 법치주의자는 법으로 말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개혁입법-만약 시간이 촉박해 여야간, 시민단체간 이견을 좁힐 시간이 없다면 일단 연내에 한나라당이 공약한 개혁법안이라도 통과시켜야 하는 게 법치주의자의 도리라는 게 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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