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이란 스스로 지킬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다. 회계법인들은 더이상 자율을 누릴 권리가 없다."
분식회계 사태로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이 마침내 1929년 세계대공황이후 민간 회계법인들에게 부여했던 자율적인 기업 회계감사 권한을 다시 빼앗기로 해,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전세계 회계 관행에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 상원은 8일(현지시간) 전체회의를 소집해 상원 금융위원장인 폴 사베인스(민주당. 메릴랜드주)의원이 마련한 혁명적 내용의 회계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사베인스 법안'이라 명명된 이 법안은 그동안 공화, 민주 양당의 반대에 직면해 상정조차 못하고 있었으나, 최근 잇따라 초대형 분식회계사건이 터지자 마침내 지난달 상원 금융위원회에서 17대4로 채택되었고 8일 회의에서 압도적 표차로 통과가 확실시되고 있다.
***70년만의 자율권한 회수**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7일(현지시간) "사베인스 법안은 미국의 회계법인들에게 주었던 자율규제제도를 철폐하는 역사적인 법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WP에 따르면, '사베인스 법안'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후 증시개혁의 명분으로 회계법인에게 기업의 회계감독권을 넘겨주었던 미국연방의회의 조치를 백지화하는 전면적인 개혁법안이다.
사실 몇주 전만 하더라도 회계제도를 개혁하려던 상원의원들의 입법 노력은 실현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엔론사태를 능가하는 미국 제2위 장거리전화사업자 월드콤 분식회계 사건, 세계최대 사무용기기업체 제록스의 회계조작 사건 등 '부정회계 태풍'이 몰아치자 더이상 어물쩡거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최근 시카고의 휴런 컨설팅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 5년간 1천건에 달하는 기업회계 수정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에 따라 1997년 상장기업 1천개 중 11%였던 수정사례가 27%로 늘었다는 것을 보면 미국의 분식회계사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온 것이다.
WP에 따르면, 사베인스 법안의 골자는 "회계감독위원회를 별도로 신설해 회계사에 대한 징계, 회계법인에 대한 제도적 감독, 회계규정 설정 등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회계감독위원은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선출하며 위원 5명 중 2명은 회계사 출신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살벌한 회계감시 법안**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회계감사를 맡고 있는 기업에게서 컨설팅 서비스까지 맡아온 현재의 관행을 금지시킨 것이다. 회계감사와 컨설팅을 함께 맡는 데 따른 이해상충이 엔론의 회계법인이었던 앤더슨 등의 부정이 가능케 했던 주요인으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회계감사를 맡고 있는 기업에게 절세 등의 일부 서비스 제공은 현행대로 가능하지만, 몇몇 주요 서비스는 기업이사회의 회계위원회로부터 사전승인을 받도록 했다.
분식회계를 자행해온 경영진에 대한 견제 장치도 대폭 강화했다. 사베인스 법안은 또한 경영진으로부터 보다 독립적인 회계법인을 선정할 수 있도록 기업의 회계위원회에 회계법인 선정권한을 부여할 방침이다.
회계법인과 기업의 유착관계를 끊기 위해 회계법인이 전년도에 맡았던 고객사 출신의 최고경영자나 최고재무책임자를 영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담고 있다.
또한 최고경영자와 최고재무채임자는 결산보고서에 서명하도록 해 부정행위를 한 경영진이 다시는 상장기업에 고용되는 길을 차단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돈벌이에만 혈안이었던 회계법인과 공인회계사회**
회계감독위원회가 신설되면 그동안 회계사들의 이익단체로서 회계규정과 윤리규정을 마련해온 미국공인회계사회(AICPA)가 유명무실해진다.
아울러 그동안 한 기업으로부터 회계감사와 컨설팅업무를 동시에 맡아 배를 불려온 미국 회계법인들의 수익구조에도 큰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같은 결과는 그동안 회계업계가 자초한 것이었다.
WP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AICPA는 회계사의 부정행위에 대해 SEC의 제제를 받은 회계사 숫자의 5분의 1도 안되는 제제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책임정치연구센터(CRP)에 따르면, 회계업계가 1990년 이래 선거철 때마다 의원입후보자와 정당들에게 제공한 후원금은 5천7백40만달러에 달한다.
***"누가 감히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지랴"**
8일(현지시간) 상원에 상정될 예정인 이 법안에 대해 광범위한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일각의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미국의회 관계자들은 "사베인스 법안에 대해 감히 반대의사를 표명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 법안에 찬성한 척 헤이글(공화당.네브래스카)의원도 "분식회계사태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나쁘기 때문에 이 법안에 대해 신중히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다"라고 의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어느 상원의원이 이 법안이 만들어지게 한 기업과 회계법인의 부정행위를 옹호하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회계법인과 유착관계에 있는 피트 SEC위원장도 짤라야**
하원에서도 지난 4월 이미 회계제도 개혁법안을 통과시켰었다. 그러나 하원의 법안은 상원 법안에 비해서도 '솜방망이'에 불과한 개혁시늉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원의 법안은 구체적인 규정마련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게 위임하고 있다. 이에 대해 "SEC가 회계업계와 유착된 관계로 개혁에 대해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하원의 법안은 효과가 의심된다"는 여론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
대형회계법인 고문변호사 출신인 하비 피트 SEC 위원장은 이에 대해"SEC 산하의 감독위원회가 회계업계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투자자들은 SEC의 독립성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미국 상원의 대슐 상원 원내총무의 경우 7일(현지시간) CBS TV에 출연해 "피트 SEC위원장 자체를 짤라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오늘날처럼 미기업들이 겁없이 분식회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대형회계법인 출신으로 회계법인들과 깊은 유착관계를 맺어온 피트 SEC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부시 공화당정권의 반발**
그러나 회계법인 세력들이 가만히 손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그대로 있다가는 치명적 위상 격하와 수익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베인스 법안이 상원을 통과하더라도 '상하의원 합동회의'에서 법안 절충을 둘러싸고 한바탕 힘겨루기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특히 이들 회계법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공화당의 반격이 예상된다.
벌써부터 상원 금융위원회의 공화당 간사인 필 그램(텍사스)의원은 "향후 금융규제에 큰 영향을 미칠 좋은 정책이라면 모든 이가 동의한다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충분히 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상공회의소 로비스트 브루스 조스텐도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부시 대통령에게 이 법안이 그대로 결재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가닥 희망을 내비치고 있다.
요컨대 사베인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친기업적인 부시 공화당 정권은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며, 결국 이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간에 주요한 '대치전선'이 돼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