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분식회계로 '신뢰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 기업들에 대해 미 언론들이 본격적인 자기해부 작업에 나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겨난 것이며, 이번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선 어떤 조치가 단행돼야 할 것인가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대표적 예가 미국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이다.
뉴욕타임스는 27일(현지시간) "오늘날 질타를 받는 것은 월드콤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체이며 기업경영의 복음이라고 자랑했던 미국식 모델"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작금의 기업회계에서 투명하다고 자랑해온 미국이 도덕적 암에 걸렸다"까지 지적했다.
다음은 뉴욕타임스의 에드먼드 L. 앤드류 기자가 독일 프랑크푸르트발로 쓴 '외국의 모델로서 미국기업의 위상이 희미해지고 있다'라는 기사의 주요내용이다. 편집자
***"미국에 없는 것은 수치심의 문화. 지금 미국은 도덕적 암에 걸려 있다"**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긴 외국투자자들이 지난 수년간 수천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했으나, 이제 투자금 회수에 나섰다. 또한 미국을 개방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기업경영의 모델로 존경해온 전세계인들이 월가에서 터져나오는 끝없는 추문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드레스드너 투자신탁의 해외투자담당임원 볼프람 게르데스는 "내 평생 미국에 대해 이처럼 비관적 정서가 퍼진 것은 처음 겪는 일"이라면서 "모든 사람들이 미국은 더 이상 최고의 투자처가 아니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으로 돈이 들어오지 않거나 빠져나간다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분식회계와 경영진의 부정행위가 '미국식 모델'에 지속적으로 큰 오점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식 모델이란 동등한 조건에서의 경쟁, 공격적인 협상, 수준높은 공시제도, 경영진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 등으로 부러움을 샀던 미국식 경영풍토를 뜻한다.
유럽에서도 닷컴기업들이 붐을 이뤘을 때 사고를 친 기업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통신 회장을 지내고 현재 유럽기업 경영 현대화의 주창자로 널리 알려진 기도 로시는 "미국에 없는 것은 수치심의 문화"라면서 "미국의 경영자들은 나쁜 짓을 해도 도둑놈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도덕적 암의 일종이다"라고 개탄했다.
이에 따라 미국식 기업회계에 대한 비판여론이 유럽경영자들 사이에서 고조되고 있다. 엔론, 글로벌 크로싱, 월드콤의 분식회계사건이 있기 전에는 미국의 회계기준에 대한 반론은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식 회계기준이 너무 복잡하고 조작하기 쉽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영국의 한 자산운용 경영자는 "사실 미국의 제도가 현실적이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면서 "이번 사태로 우리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미국식 회계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기업의 경영성과를 왜곡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일본에서는 투명경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의 분식회계사태를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게이오대 경제학 교수로 일본의 자유시장 도입에 앞장섰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자문을 맡았던 시마다 하루오는 "미국의 분식회계사태는 미국식 모델을 따라 현대화를 시도한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고 아쉬워했다.
기업지배구조가 부정부패와 동일시됐던 러시아에서조차 "러시아나 미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기업경영자들의 비아냥이 터져나오고 있다.
러시아 최대 정보기술회사로 꼽히는 정보기업시스템스의 아나톨리 카라친스키 대표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지만 이상적인 제도라는 것은 원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분식회계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모델은 이미 전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려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특히 최근 기업경영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온 인도같은 개발도상국 경영자들은 "10년전에 엔론이나 월드콤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모르지만 '경제 서구화 정책'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인도, 러시아 등지에서는 그 대신 미국기업들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와 회계사들이 얼굴을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KPMG 인도지사 대표인 과우탐 달랄은 "고객들의 평판과 이에 따르는 신뢰를 먹고 사는 우리 같은 직업인들에게 미국의 분식회계사태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서유럽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식 경영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이들 기업은 월 스트리트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점차 많은 기업들이 뉴욕증권거래소나 나스닥에 상장을 하면서 미국식 회계기준에 따라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있다.
***확산되고 있는 미국식 경영에 대한 불신과 저항**
그러나 미국식 회계기준에 대한 저항도 증가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가 최근 포르셰의 상장을 권유했지만 포르셰 경영진은 상장 요구조건 일부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포르셰는 분기마다 결산보고를 하는 의무를 거부하고 있다. 단기 실적에 대한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경영진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 관행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통해 엔론 등 여러 기업들의 경영진이 엄청난 돈을 챙겼다는 사실에 경악한 독일 최대 철강업체 회장은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독일의 경영자들에게 경고했다.
폭스바겐 등 독일 기업들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보다 쉽게 하려는 유럽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이 법안을 추진하는 진영에서는 "새로운 법안이 주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일의 지도자들은 "이 법안은 불공정한 경쟁을 조장한다"고 일축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국제회계기준'으로 알려진 자체회계법안을 미국식 회계기준의 대안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5년 모든 유럽연합(EU)기업들이 채택할 것으로 알려진 '국제회계기준'은 단순하면서 공정한 기본원칙만 담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큰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미국식회계기준은 오랜 기간에 걸쳐 사안별로 미세한 의미 차이까지 구별하는 방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유럽투자가 32%만이 미국을 선호**
국제회계기준이 미국식 회계기준보다 우위에 설 것이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국제투자가들은 미국에 대한 투자를 재개하기에 앞서 미국의 회계제도에 상당한 개혁이 가해지길 고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UBS워버그와 갤럽이 이달 공동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의 투자자 중 불과 32%만이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투자시장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투자가들이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유럽의 경제성장률은 당분간 미국보다는 낮을 것으로 예상되며, 일본의 상황도 지지부진한 반면 그 외의 시장들은 리스크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이코노미스트 위르겐 뮐러는 "세계 주요통화지역으로 안전한 항구 역할을 해온 곳은 미국"이라며 "모든 사람들이 미국 경제를 주시하고 있으며 미국경제가 다시 활기를 찾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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