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정몽준 회장의 결정으로 이른바 '월드컵 포상금 파동'은 일단락됐다. 대한축구협회 이사회가 결정했던 포상금 차등지급을 정 회장이 백지화시키고 똑같이 지급키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파동을 지켜본 대다수 국민들의 입맛은 씁쓸하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축구협회를 믿고 앞으로 4년뒤, 아니 당장 오늘 이후 한국축구의 장래를 어떻게 자신할 수 있겠냐는 우려다.
반면에 축구협회는 협회대로 입이 석자는 튀어나와 있는 상태다. 돈 주고 뺨 맞은 꼴이라는 식의 불만이다. '협회의 권위'가 무너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축구행정을 이끌지 걱정이라는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는 그러나 일개 협회의 해프닝으로 보기엔 그 안에 내포된 사회적 함의가 너무 크다. 축구협회가 안고 있는 모순구조야말로 우리 사회 일반이 안고 있는 모순구조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회장단은 정치인 3명, 70세 이상 축구원로 4명으로 구성**
한 축구전문가는 "축구협회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노후화된 대표적 양로원 조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선 회장단의 '고령화''정치화'를 문제점으로 꼽았다.
현재 정몽준 회장(52) 밑에는 6명의 부회장이 있다. 이 전문가는 "50대 회장 밑에 있는 6명의 부회장단 중 70세가 넘는 고령의 노인이 4명이나 버티고 있으며 축구 문외한인 정치인 2명이 섞여 있는 이런 조직 속에서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는 한국축구의 청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고 일침을 놓았다.
구체적으로 부회장단을 살펴보면 상근 부회장인 김상진씨는 1930년생으로 한국일보 정치부장, 의원보좌관을 거쳐 93년부터 축협 부회장을 맡고 있다.
오완건 부회장은 1929년생으로 1966년부터 축협 총무이사를 거쳐 77년부터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종환 부회장은 1930년생으로 80년 축협부회장, 90년 한국 실업축구연맹 초대 회장, 93년부터 다시 축협 부회장을 맡고 있다.
문정식 부회장은 1930년생으로 전 한국대표팀 감독이다.
장영달 부회장은 1948년생으로 98년부터 축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현역 민주당 국회의원이다.
이갑진 부회장은 1944년생,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군 출신으로 2000년 민주당에 입당했으며 지난해부터 축협 부회장을 맡고 있다.
여기에 현역 국회의원인 정몽준 의원까지 합하면, 현재 축구협회 회장단은 70대의 고령 축구원로 4인과 정치인 3명으로 구성돼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정몽준 의원을 중심축으로 하는 들러리가 아니냐는 인식을 하게 만드는 구조다.
***이사회는 정 회장의 거수기**
정몽준 회장의 측근으로 사실상 축구협회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실세가 다름아닌 조중연 전무(56)이다. 조 전무는 사실상의 이사회 의장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표상의 이사회 의장은 정몽준 회장이 겸임하고 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이사회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아, 이사회의 사회를 보는 조중연 전무가 사실상 의장 역할을 맡고 있는 까닭에 내부 관계자들은 조 전무를 이사회 의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선 이같이 애매한 구조 자체가 문제다. 경영학적 측면에서 볼 때 회장과 이사회 의장을 한 사람이 겸직하는 조직은 가장 낙후한 조직이다. 이런 조직구조는 필연적으로 '독재'를 초래한다. 이사회는 회장단의 독주를 견제해야 하는 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하에서는 견제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왕적 독재'를 초래하는 전근대적 조직구조다.
또한 축구협회처럼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면서 실제 이사회 운영은 밑에 사람에게 맡기면, 공(功)은 모두 회장에게 돌아가고 책임은 모두 밑의 실무자가 떠맡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번 포상금 차등지급 파동이 그런 대표적 예에 속한다. 조중연 전무는 사실상의 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2일 차등지급을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과 선수단의 반발여론이 거세자, 4일 정몽준 회장은 "국민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명분 아래 균등지급으로 급선회했다. 이 과정에 조중연 전무만 시쳇말로 '죽일 놈'이 됐다. 그러나 조직표상의 이사회 최고 책임자는 다름아닌 정몽준 회장이다.
이사회라는 것이 실제로는 회장 말 한마디에 기존의 결정을 뒤집어질 수 있는 거수기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축구인들로 이사회를 구성했다고 이사회가 활성화됐나"**
이사회의 '거수기'화는 지난 2000년 11월9일 방영됐던 MBC 100분토론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당시 토론은 과연 한국축구의 8강진출이 가능한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였다.
당시 조중연 전무는 100분토론에서 "축구협회라는 단체는 이사회로 구성돼 있다"면서 "이사회는 지금 30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한 25~26명의 축구인으로 구성돼 있다"며 "과거보다는 훨씬 발전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병주 전 안양LG 감독은 무슨 소리냐고 냉소적으로 반박했다.
"이사회가 완전히 축구인으로 구성돼서 활성화됐다고 지금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지금 축구협회 이사회라는 것은 형식적인 사항이지 실질적으로 이사회에서 거론돼서 거기서 중지를 모아서 (정몽준)회장님한테 전달이 돼서 그것이 시행되는 과정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조 전무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사회 구성 자체는 축구인들로 대부분 돼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축구협회를 이끌고 나가는 모든 제반 문제는 회장님을 비롯해서 그 몇몇 분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나간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무국은 현대중공업 파견직원들로 구성**
그러면 협회 사무국은 어떠한가.
축구협회는 축구발전을 위한 발전적 체제 구축을 명분으로 지난해 남광우 사무국장을 사무총장으로 격상시켜 전무이사-사무총장 체제로 사무국을 바꾸고, 3개 부서도 경기국, 홍보국, 국제국으로 각각 격을 높이는 등의 개편조치를 취했다. 이들 3개국과는 별도로 기획실, 기술부, 지원부, 사업부 등도 갖추었다.
그러나 외형과는 달리 실상은 '정몽준 사단'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국제국을 예로 들면, 히딩크 감독 영입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가삼현 국제국장을 비롯해 고승환 부장 등 국제국 대부분의 직원이 정몽준씨가 회장으로 있는 현대중공업에서 파견나온 직원들이고 김완식 차장 등 일부만 협회 정식직원으로 구성돼 있다.
때문에 정몽준 회장이 만일 협회에서 손을 떼게 될 경우 이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국제국 업무가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지경이다.
한 축구협회 관계자는 "한국축구가 4강에 오른 것도 실제로는 정몽준 회장이 지난 몇년간 해마다 수십억원씩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개인적으로는 히딩크 감독보다는 정 회장의 공이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이 백번 옳더라도 문제는 과연 정 회장이 개인 쌈짓돈을 집어넣은 것인지, 자신이 전체주식의 10%밖에 안 갖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직원들을 마음대로 협회에 파견근무케 해도 좋은지이다.
현대중공업은 정몽준 회장의 대선출마설이 나돌면서 투자가들의 불안감이 확산되자, 얼마 전 IR(투자설명회)에서 정 회장이 출마해도 회사돈을 갖다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축구협회 사무국 운영상황을 보면 이같은 해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후임 회장으로는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회장설도 나돌아**
정몽준 회장은 월드컵 4강 진출을 계기로 국민적 호감도가 많이 높아졌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회장의 연말 대선 출마를 가정할 경우 지지도가 20%대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축구협회에서는 이미 정회장이 구체적인 출마 준비작업에 착수한 상태이며, 오는 8월말, 9월초로 예상되는 출마선언때 세간의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축구협회장직을 내놓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축구협회장 후임으로는 정 회장의 큰 형님인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회장을 의중에 두고 있으며, 정몽구 회장측도 이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가 떠돈다.
과연 이같은 시나리오대로 작동할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금명간 정몽준 회장이 자신의 정치일정 때문에 축구협회를 떠날 가능성이 높고 이 과정에 축구협회는 한차례 대대적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남는 문제는 정 회장의 후임자로 누가 오든 간에 축구협회를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이다. 후임자에게 맡겨진 부담은 엄청나다. 이미 4강에 진출한 만큼 2004년 올림픽, 2006년 월드컵때 그 이상의 성적을 내야 하는 짐을 떠맡게 된 때문이다. 만약 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비난은 모조리 후임자와 축구협회에게 돌아갈 것이다. 후임자가 축구협회장을 생색나는 '감투'로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위임한 무거운 짐을 떠맡는 자리로 생각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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