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툭 던진 한 마디가 정부와 한국통신(KT)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회장은 9일 저녁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회의에 모처럼 참석했다. 이 회장은 주위에 몰려든 기자들이 최근 현안중 하나인 KT 지분 참여여부를 묻자 단 한 마디만 했다.
"내 사업도 바쁜데 남의 사업에 참여할 여력이 없다."
***이건희 회장 한마디의 위력**
이 회장의 이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KT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도 한 방 맞았다는 듯한 반응이다.
KT 주식 인수를 위한 그동안의 물밑협상 과정에 삼성측은 여러 차례 KT지분 인수 불가 방침을 흘려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는 보다 좋은 조건으로 주식을 인수하기 위한 줄다리기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룹 최고오너가 공개석상에서 이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KT와 정부는 삼성의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다행히(?) 이날 밤 삼성구조조정본부측은 "이 회장이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삼성전자 등이 경영권 인수를 염두에 둔 전략적 투자자로서 KT에 지분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금융계열사들이 투자 목적으로는 KT 지분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 KT 관계자들을 일단 안도케 했다.
삼성은 그러나 이 회장 언급에 따라 그동안의 예상과는 달리 단순투자 목적 차원에서도 KT주식 매입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삼성그룹 계열사 가운데 자금여력이 풍부한 곳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다. 그러나 이 회장이 경영권 인수 경쟁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밝힘에 따라 단순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매입할 곳은 삼성생명이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삼성 금융계열사들은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28.3% 가운데 최대 3% 미만만 구입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이상 매입할 경우 갖게 될 사외이사 선임권, 즉 경영권에 관심없다는 이 회장의 입장 표명에 따른 후속조치다.
KT의 민영화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한마디 하는 바람에 일이 생각보다 어렵게 됐다"며 곤혹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삼성이 한걸음 뒤로 빠지면서 SK등 다른 기업들과 협상에서 KT가 협상주도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삼성의 KT 경영권 참여 포기의 세 가지 이유**
삼성의 이같은 KT경영권 인수포기 배경은 무엇인가.
그동안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삼성이 KT마저 삼키는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제기해왔었다. 이번에 정부가 국내시장에 내놓는 5조5천억원규모의 정부보유 주식을 사들일 자금여력이 있는 기업은 삼성그룹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문제제기였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이같은 압박이 경영권 포기의 한 요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원인은 보다 복합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삼성이 KT 경영권 인수를 포기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KT 노조이다. 현재의 KT 노조는 공기업 최대 강성노조다. 모두가 알다시피 삼성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른 회사를 인수할 때에도 노조는 주요변수다. 더욱 현재 KT노조는 삼성의 참여에 대단히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두번째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의혹제기다. 특히 참여연대는 지난 7일 성명에서 특정 대기업을 KT의 지배주주가 되게끔 하는 정부 지분매각 계획에 대해 반대한다는 성명을 밝혔다. 여기서 특정 대기업이란 삼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치 KT 지분인수가 특혜인양 비치는 게 싫다.
세번째는, 설령 KT지분 인수에 참여해 최대주주가 되더라도 정부 입김없이 독자적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정통부는 특정 대기업이 지배주주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뒤집어 보면 앞으로 계속해 정부가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회장이 KT 경영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참여연대의 특혜 의혹 제기**
삼성의 철수로 오는 17~18일 양일간 실시될 KT 정부지분 매각 입찰이 순탄하게 끝날지가 재계의 비상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공기업 민영화 계획에 따라 이번에 정부가 내놓는 지분은 KT 전체주식의 28.37%로, 주식숫자로는 8천8백57만4천4백29주에 달하며 액수로는 5조원대를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30대 기업에 15%, 기관투자가에 4%, 일반투자가에 3.7%, 우리사주에 5.7%를 각각 배정했다. 예정대로 주식이 모두 팔리면 KT는 지난 2000년 10월 민영화된 포스코(구 포항제철)에 이어 두번째로 완전민영화되는 대형공기업이 된다.
그런데 매각 과정에 적잖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대목은 30대 기업에 팔기로 내놓은 15%의 물량이다. 정부는 30대 기업에 배정된 15%의 물량 가운데 5%는 이번 입찰때 직접 매각하고 나머지 10%는 1개월뒤 주식교환을 할 수 있는 교환사채(EB)로 판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주식과 EB를 합쳐 3% 이상 지분을 매입하는 기업중 상위 2개 주주에 대해선 사외이사 선임권을 주기로 했다.
참여연대는 7일 논평을 통해 정부의 이같은 지분매각 방식이 특정기업이 지배주주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참여연대가 문제삼은 부분은 정부가 주식청약납입금을 청약일 당일 전액 납입토록 한 대목. 이는 자금력이 있는 특정 대기업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처라는 게 참여연대의 문제제기다. 참여연대는 또 3% 이상 지분 보유자중 상위 2개사에 사실상의 사외이사 선임권을 준 점이나, 당초 EB의 주식전환 시기를 3년으로 잡았다가 1개월후로 단축한 대목도 특정기업을 의식한 조처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요컨대 국내기업중 가장 자금력이 막강한 삼성에게 KT를 넘기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다.
***포스코가 될 것인가, 국민은행이 될 것인가**
정부는 그러나 이런 의혹에 대해 '기우'라는 입장이다. 양승택 정통부장관은 "특정 대기업이 지배주주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누차 말해 왔다. 정부는 또 논란이 되고 있는 경영지배구조와 관련,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7명인 사외이사 비중을 9명으로 늘리고,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 중에서 선출토록 해 경영투명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방침에 대해 갸우뚱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과연 '임자없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가능하냐는 식의 의구심이다. 이런 반응은 주로 대기업쪽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론적으로는 소유와 경영 분리가 가능해 보인다"며 "그러나 최근 포스코(구 포항제철)의 비리 연루 의혹에서 볼 수 있듯 임자없는 회사의 주인은 결국 정부나 정치권력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길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포스코는 KT 민영화의 교과서"라며 "그러나 외국인 지분이 60%나 되는 포스코는 결국은 정치권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이번 포스코 비리의혹에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임자없는 민영화 계획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KT의 관계자는 그러나 '하기 나름'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포스코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포스코와 마찬가지로 민영화된 국민은행의 경우는 전혀 그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고 잘 나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국민은행의 경우 외국계가 7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는 국내 최고의 기업"이라며 "김정태 행장처럼 외압을 철저히 끊을 수 있는 최고경영자(CEO)를 선출해 투명경영을 하면 KT의 민영화도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포스코 모델과 국민은행 모델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KT 민영화의 성공여부를 가늠할 잣대라는 주장이다.
맞는 주장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러했듯 정부나 정치권력의 의지다. 이들중 상당수는 아직도 많은 민영화 기업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정부 계열사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민영화의 핵심은 정부입김으로부터 자유로와 '시장 법칙'에 따라 경영을 한다는 데 있다. 정부가 이같은 민영화 원칙에 충실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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