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아동의 어머니가 범인으로 지목한 집주인 할아버지는 자신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이 남성이 가해자라는 피해아동의 진술은 분명 있었지만, 그 당시에 피해아동의 진술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피해아동의 진술을 제외한 유일한 물증이었던 아동의 속옷에서 묻어나온 정액은 집주인의 것이 아니었다. 집주인은 10년째 신부전증을 앓아 발기부전 상태인 환자이므로 성폭행이 불가능하다고 항변하면서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 아동의 어머니가 합의금을 노리고 딸을 팔아먹으려는 '꽃뱀'이라고 비난했다. 사건을 취재하면서 기자가 만났던 한 경찰도 집주인의 주장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피해아동의 어머니와 집주인 사이의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피해아동은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외상후증후군' 현상을 보였다. 폭식과 잦은 신경질,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과도한 성적 호기심과 성기에 대한 집착 등 이상행동으로 다니던 유치원에서 "나가 달라"는 통보까지 받았다. 가해자가 누구이든 간에 피해아동에 대한 치료가 매우 시급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른들의 관심은 온통 '범인잡기'에만 쏠려있었고, 피해아동은 방치됐다. 혼자 아이를 키워 적잖은 돈이 드는 치료를 감당하기 힘든 어머니 입장에서는 더욱 '범인잡기'에 몰입했다. 또 이미 경찰까지 가세해 '멀쩡한 딸 팔아먹으려는 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어머니에게 '범인잡기'는 자신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였다.
결국 어머니는 집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집주인이 '범인'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피해아동의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의 주인공은 끝내 잡지 못했지만 피해아동과 그 가족의 끈질긴 사투 끝에 밝혀낸 소중한 '진실'이었다.
10년이 지난 사건을 새삼 복기하는 것은 최근 이 일을 떠오르게 만드는 일을 접했기 때문이다. 바로 민주당 소속인 이강수 고창군수의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민주당 윤리위원회에서 8월 31일 보낸 보도자료다.
민주당 여전히 "성희롱 아니다"
▲ 이강수 고창군수 ⓒ뉴시스 |
이미 여러차례 보도된 것처럼 이강수 군수의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것은 지난 5월초였다. 민주당 윤리위원회는 이 문제를 접하고 현지조사를 실시했지만 당 차원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민주당 윤리위는 31일 보도자료에서 "조사결과 양측의 입장이 매우 상반되어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지방선거가 임박해 있어 결정을 보류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조사 이후 이 군수를 지방선거에서 공천했고, 그는 당선됐다.
지방선거 이후 당 윤리위에서 내린 조치는 '구두 경고'라는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윤리위는 이런 결정 근거에 대해 "당시 이강수 군수와 박현규 전 군의장의 특수관계, 이강수 군수와 김00의 관계, 박현규 의장과 김00의 관계, 박현규 의장과 김00 부친이라는 분과의 관계, 박현규 의장이 누드사진작가라는 특수성 등을 종합해 성희롱으로 볼 수는 없지만 공직자로서 부주의한 처신이었다는 판단으로 '주의 조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윤리위는 이 사건을 '성희롱'으로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재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1차 조사 결과를 뒤집을만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명시한 것으로 볼때 성희롱이 아니라고 보는 민주당의 입장은 현재로선 변함이 없다.
성희롱 여부를 가리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관계를 살펴야 하는지, 특히 박현규 전 의장이 누드사진작가라는 특수성 성희롱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기자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제까지 사진작가로 알려졌던 박 전 의장을 누드사진작가라고 못 박은 것도 석연치 않다. 누드사진작가면 어느 여성에게나 "누드사진을 찍자", "속옷 자국을 지우기 위해 누드사진 찍기 전 사흘 동안은 속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해도 성희롱이 아니라는 게 민주당의 시각인가?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이 여대생에게 했다는 아나운서에 대한 성희롱 발언이 아나운서에 대한 모독인 것처럼 민주당의 이런 시각은 누드사진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여하튼 이런 점까지 종합해서 판단한 민주당의 결론은 여전히 "성희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박현규는 이강수의 '희생양'?
하지만 민주당의 이런 판단은 검찰과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을 보건데 납득하기 어렵다. 전주지검 정읍지청은 지난 8월 5일 이강수 군수가 자신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한 전 고창군 여직원 김 씨와 가족 등 6명을 공직선거법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에 대해 불기소 처분(혐의 없음)을 내리면서 "김 씨의 친구 박아무개 씨 등 참고인 진술 및 관련 증거들은 피의자 측의 주장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이 군수의 성희롱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관련기사 : 검찰 "이강수 성희롱, 관련 증거들이 피해여성 주장에 부합")
국가인권위도 지난 8월 20일 이 군수의 성희롱 발언 논란과 관련해 "사실로 판단된다"며 이 군수와 박 전 의장에게 손해배상 및 특별인권교육 등을 권고했다.(관련기사 : 인권위, 고창군수 '누드 촬영 권유 발언' 사실로 인정)
검찰과 인권위라는 국가기관의 성희롱 판정이 나온 이후에도 민주당은 31일 메일을 통해 여전히 성희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아직 당 윤리위 입장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당의 결정에 대해 크게 우려되는 대목은 보도자료를 통해 윤리위가 언급한 '새로운 상황'이다. 민주당은 인권위 결정이 나온 다음날인 21일 박지원 비상대책위 대표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면 당으로서 단호한 조치를 강구하겠다. 사과 드린다"고 다소 달라진 입장을 보였다. 26일 윤리위를 통해 재심 결과를 확정짓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26일 윤리위는 열리지 않았다.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 등 인사청문회 국면에 묻혀 여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민주당은 26일 윤리위가 열리지 못한 이유에 대해 25일 발생한 '새로운 상황'을 제시했다.
박현규 전 의장이 8월 25일 기자회견을 통해 "문제가 된 사진 찍자는 발언은 본인이 하였으며, 선거 등의 이유로 밝히지 못한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인 김 씨가 8월 26일 "문제의 발언은 박 의장이 한 것인데 그동안 정치적으로 확대됐으며, 더 이상 이 문제로 고창과 고창군수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담은 '사실확인서'를 인권위에 제출했다고 한다.
취재를 통해 검찰 조사 결과인 '불기소처분서'와 피해여성이 검찰에 제출했던 녹취록 등 관련증거를 모두 확보한 기자로선 민주당이 밝힌 '새로운 상황'을 접하고 다소 당황스러웠다.
고창 사정을 잘 아는 인사에게 확인한 결과, 이강수 군수가 어떻게든 사건을 최소화 하고자 피해여성 측에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이 민주당 윤리위가 예정된 전날 기자회견을 자처해 책임을 혼자 지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 피해여성이 그 다음날 인권위에 사실확인서를 보낸 것 모두 이 군수가 연관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민주당이 31일 '새로운 상황'을 강조하고 나선 것에 대해서도 박 전 의장만을 성희롱범으로 결론을 내리려는 정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치상황에 따라 출렁이는 민주당 입장
이 사건이 처음 제기된 이후 민주당을 둘러싼 정치 상황이 수시로 급변했다. 6.2 지방선거가 있었고 민주당은 선거에서 이겼다. 이어 7.28 재보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은 완패했다. 8.8개각과 인사청문회가 있었고, 민주당은 지난 29일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포함해 3명을 낙마시켰다. 7.28 재보선 패배로 빼앗긴 정국 주도권을 다시 찾아왔다. 이런 민주당의 부침과 이강수 군수 성희롱 사건을 대하는 민주당의 태도가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 보인다.
6.2 지방선거 승리 후 민주당은 이 군수에게 면죄부를 줬고, 7.28 재보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의 성희롱 사건과 함께 이 문제가 크게 불거졌지만 민주당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재보선에 패하고 선진당 등 다른 당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검찰, 인권위 조사 등으로 수세에 몰리자 민주당은 박지원 대표가 '사과'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청문회 정국에서 개가를 올린 민주당은 당초 예정했던 윤리위 일정을 뒤로 미루고 31일 '새로운 상황'을 전하는 메일을 기자들에게 발송하는 등 또다시 미심쩍은 태도로 돌아섰다.
한국에서 일반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소·고발율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성의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유교적 가부장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성폭력 사실을 밝히기는 여전히 어려운 사회 분위기다. 앞서 언급한 아동 성폭력 사건과 이강수 군수의 성희롱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성폭력 사실을 폭로하는 순간 피해 여성과 그를 지지하는 주변 사람들은 숱한 의혹의 눈초리와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기자가 웬만한 여성이 아니고는 자신의 성폭력 사실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부풀릴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강수 군수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기자가 다 알고 있지는 못하다. 어쨌든 25-26일 발생한 '새로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해여성에 대한 성희롱은 분명히 있었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니라 수차례 있었다. "누드 사진을 찍자"는 발언을 이강수 군수가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는 이 군수가 '주범'이냐, '종범'이냐 정도를 가려주는 문제일 뿐이다. 이 군수가 설령 이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발언을 한 누드사진작가 박현규 전 의장의 성희롱에 동조해 유사한 발언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민주당이 따질 문제는 정치적 책임이다
민주당이 따질 문제는 '주범'이 누구냐가 아니다. 민주당은 '범인을 잡는' 수사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희롱 자체에 대한 진위 논란이 끝난 상황에서 민주당 윤리위에서 판단할 문제는 도덕적, 정치적 책임의 문제다. 성희롱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된 자당 소속의 군수에 대해 민주당은 어떻게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하면 된다. 한나라당이 성희롱 발언을 한 강용석 의원에 대해 사실상 출당조치인 '제명' 결정을 내려 정치적 책임을 물은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자당 소속 정치인의 성희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국민들이 질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민주당은 아직까지 답하지 않고 있다. 선거, 검찰 조사, 인권위 결정 등 여러가지 이유로 답변을 미뤄왔다. '새로운 상황'을 또 하나의 핑계로 들고 있지만, 달라진 건 없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 즉 약자를 위한 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당이 먼저 귀기울여야할 이야기는 이강수 군수가 아니라 피해여성과 그 가족의 말이다. 서두에 아동성폭력 사건을 언급한 이유도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장 우선 고려할 것은 피해자이지만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무시되는 원칙이다. 이강수 성희롱 사건에 있어서도 민주당은 한번도 피해여성과 그 가족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정치적 음모' 등을 제기하면서 오히려 피해여성과 그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데 일조했다.
민주당은 '생존자'가 될 수 있을까
▲ 강성종 민주당 의원 ⓒ뉴시스 |
민주당이 자신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근근히 유지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생존자' 반열에 들 수 있을까? 1일 정기국회 시작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판단 잣대 중 하나가 이강수 군수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또 다른 하나는 학교돈 78억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주당 강성종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30일 의원연찬회에서 정기국회 처리 제1 안건으로 강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지목하는 등 단단히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현역 국회의원 신분인 만큼 도주 우려나 증거인멸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를 들어 체포동의안에 반대 입장이다.
박지원 대표는 김태호 후보자 낙마 등을 보면서 30일 "국민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겸손의 정치'를 주문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민주당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겸손'에 앞서 '정도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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