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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가해자 처벌은 복수가 아니다"

[왜 기업 처벌법인가 ⑥] 안전담론의 인권적 재구성을 향해

8월 20일 서울 양재동 코스트코, 지하 식품 코너 가스오븐에서 화재 발생. 불은 껐지만 연기가 심하게 나 방화셔터가 내려옴. 고객들 우왕좌왕하다 다침. 마트 측은 불이 난 사실 알리지 않고 경보기 오작동에 의한 방화벽 오작동이라고 거짓 안내 방송.

8월 22일 태안화력 9, 10호기 발전소의 옥외 탱크 밸브에서 소량(5리터)의 암모니아가 누출돼 점검자 경상 입고 병원으로 후송. 이 날 태안교육지원청에서는 국민안전처가 주관한 '2016 을지연습 1일차 위기 대응 실제 훈련'인 화생방 교육을 함. 화생방 교육은 북한의 화학 무기 공격 및 생물학 무기 공격에 대한 방호 요령에 대해 이론적인 교육과 방독면 착용법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 목적이었음.

최근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안전에 대한 생각이나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거나 왜곡돼 있음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860일이 넘었지만 여전히 안전은 기업의 이윤 앞에서 멈추며 안전은 국가 안보로 대체된다.

알 권리가 없이 안전?

세월호 침몰 사고가 참사가 된 이유가 승객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알리고 적절한 구조와 대처를 하지 않았던 것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마트 측은 고객들이 당황할까봐 거짓말 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코스트코 매장에 있었던 연기가 자욱해 건강이 취약한 누군가 연기라도 마시고 힘들어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는 위험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그에 따른 정확한 대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알 권리 없이 안전은 가능하지 않다. 세월호 참사처럼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안전에 대한 권리를 실현하려면 알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위험 정보를 알지 못하면 상황 대처 능력은 떨어질 뿐 아니라 위험을 예방하기도 어렵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까지 신고된 피해자만 4500명이 넘고, 사망자는 870명이다. 2011년 11월에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습기 살균제를 시중에서 회수하고, 유통을 중단시켰다. (기업 처벌을 위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만약 피해자가 발생하기 전에, 제품을 판매하기 전에 어떤 화학 물질이 들었는지, 위해 물질은 아닌지 정부가 충분히 검사하고 유통시켰다면, 최소한 어떤 화학 물질이 인체에 해로운지 시민들에게 알렸다면, 이렇게 엄청난 인명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위험한 물질도 기업 비밀-영업 비밀로 통용되는 한국 현실에서 알 권리는 안전에 대한 권리와 붙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생활화학용품들은 공산품 제조업자 등이 안전 기준에 적합하다고 '스스로 확인하여' 안전 인증 기관에 신고하는 수준('자율 안전 확인')의 안전 검사가 있을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정부가 안전 기준과 검사를 하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있었다면 이러한 일 애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업의 무한 이윤 추구를 보장하는 한국 사회에서 안전한 상품이나 위험을 야기한 기업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제도는 거의 없다.

이제라도 2007년 유럽연합이 세운 '독성과 용도의 정보가 없으면 시장 진입이 불가'하며 '안전을 입증할 책임은 기업에게' 있다는 원칙이 우리 사회에서도 통용돼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화학 물질 안전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사회, 사람을 위태롭게 만드는 제품에 대해 독성을 몰랐다고 하면 제조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불러일으킨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안전을 국가 안보로 대체?

정부는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위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그를 위한 제도를 만들기보다는 안전을 국가 안보로 대체하려 한다. 태안 화력 9, 10호기 발전소 암모니아 유출 사고가 일어나던 날 정부가 했던 일은 '북한의 테러를 가상한 을지연습'이다. 태안 화력 발전소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이미 화력 발전소의 미세 먼지로 가뜩이나 건강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부는 기업이 안전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보다는 '국가 안보 의식'을 높일 훈련만을 했다.

국가 안보는 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북한에 대한 긴장 의식을 높이는 일일 뿐이다. 국민안전처가 보도 자료로 말했듯이 을지연습은 안보 의식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국가는 안전을 국가 안보로 한정하려 했고, 국가가 생산하는 안전 담론은 시민들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역할만을 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시민의 자유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국가 안보에 대한 강조는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급증한 것으로, 사회 구성원의 인권을 제한하고 개인을 감시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개념이자 담론이었다. 그래서 유엔 인권 기구에서는 국가 안보를 인간 안보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인간 안보를 위해서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자력화할 권리, 의약품이나 교육 등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받을 권리 등을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전에 대한 권리는 1948년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함께 나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Everyone has the right to life, liberty and security of person).) 안전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사회 구성원이 안전하게 산다는 것은 제3자로부터 개인의 생명과 신체가 훼손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는 그것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안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이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사는 데 위험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삶에 필요한 식량, 주거, 의료 등이 보장돼야 한다. 이는 복지국가에서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위해 사회 보장(social security)을 중요시했던 이유다.

그런데 안전과 안보는 영어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 단어다. 국가 차원의 안전을 안보라는 말로 번역하며 우리는 '안전이 국가 안보로 치환'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안전에 대한 권리는 법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에서도 안전이란 개념 정의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안전이란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정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국민안전처가 그렇듯 국가 안보를 안전의 범위 속에 슬쩍 포함시켰다.

세월호 참사가 준 교훈, 인권 없는 안전은 없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안전'은 '국가 안보'와 비슷하게 인권과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더 좁게는 인권 활동가들에게 안전은 인권의 반대말로 들리기까지 했다. 왜냐면 국가는 안전을 내세워 표현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범죄자 DNA 수집이나 CCTV 등 감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안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의 불안함을 국가형벌권의 강화-국가권력의 강화로 귀결시키는 안전담론이 팽배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출범부터 정부 부처를 안전행정부로 개명하기까지 하면서 '안전'을 전면에 내세웠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서 안전에 대한 인식, 안전 담론은 바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뚜렷하지 않다. 안전을 권력과 통제의 언어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 안전을 상품으로 개인이 구입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기로에 놓였다. 전자가 인권이 지향하는 안전담론이라면, 후자는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이후 안전 대책이라고 내놓은 기업돈벌이 방안과 통한다. 특히 후자는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 독트린>(살림Biz 펴냄)에서 말한 재난 자본주의와 맞닿아있다. 참사 이전에 안전이 국가 권력의 통제와 감시, 안보의 언어에 치우쳤다면, 참사 이후에는 안전을 시장 권력을 융성하게 할 상품의 언어로 갈아치우려는 것이 불평등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대안이다.

인권의 언어로서 안전을 향유한다는 것은 위험의 위계화를 지우는 일이자,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리고 위험을 알 권리만이 아니라 위험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대처할 권리가 보장돼야 가능한 일이다.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과 비정규직 알바 승무원들에게 정보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선장과 선원들만 위험 정보가 주어졌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는 하청 노동자의 사망에서 볼 수 있듯이 불평등한 권리 체계 속에서 위험은 심화되고 지속된다. 국민의 기본권보다 기업의 이윤이 중심이 되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사회 구성원의 안전에 대한 권리는 축소되거나 무시된다.

그래서 기업 처벌법에서 원청 기업과 경영진을 처벌하려 하는 것은 위험을 위계화하며 책임을 하청 업체에 떠넘기는 일을 막아 안전 담론이 담지해야 할 평등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기업 처벌법이 국가의 안전관리 업무를 시장에 내다파는 국가와 공무원을 처벌하려하는 내용을 담은 이유도 사회 구성원의 안전권을 국가의 의무로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연합뉴스

위험을 양산한 인권침해자 처벌해야

위험을 양산한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묻지 않고 인권에 기반한 안전 담론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노동자와 시민들이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위험을 양산하는 기업과 기술을 규제해야 하며, 그러한 기업들을 국가가 처벌해야 한다.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으로 안전 관리 업무를 민간에 위탁(외주화)하고, 과적과 과승을 단속하지 않은 부실한 감독이 만들어낸 참사는 아직도 곳곳에서 진행형이다. 위험을 양산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한 구체적인 정황과 맥락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이 있는 경영진과 공무원의 잘못을 묻지 않고서는 구체적인 안전대책이 나올 수 없다. 구조 변화를 이끌 인적 청산은 필수적이다. 그래야 안전을 위한 예방대책이 수립되고 위험의 사회 구조가 안전의 사회질서로 바뀔 수 있다.

가해자의 처벌은 복수가 아니다. 가해자가 사법적 처벌을 받을 때 피해자가 인권침해 상태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사법적 처리가 용서와 화해의 전제라는 '인권 침해자 불처벌과 투쟁하려는 국제 사회의 인권 원칙'에도 명시돼있다. 1993년 세계비엔나인권행동에서 논의하고 1995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채택한 '인권 침해자의 불처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한 일련의 원칙'(약칭 불처벌 투쟁 원칙)에 따르면, 인권 침해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며 이를 통해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인권 침해를 예방하는 일이다.

불처벌과의 투쟁을 안전 담론에 들여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처벌 투쟁 원칙에서는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 등도 포함돼 있어 안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정의에 대한 권리를 국가가 보장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그러므로 20대 국회에서 기업 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은 안전 담론의 재구성을 위한 첫발이 될 것이다.

(명숙 님은 기업처벌법제정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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