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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릎 아래 우리 딸들이

[문학의 현장]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 낭송시

일본의 무릎 아래 우리 딸들이

엄동설한 풍찬노숙은 만주벌판 독립군을 묘사하는 말이려니
오늘은 그렇지 않다
어린 딸들이 일본 대사관 무릎 아래 풍찬노숙 중이라니

미국의 압력 못 이기는 정부 입장을 이해한다고
택시 기사는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정부는 미국의 어여쁜 정부가 되어도 괜찮은지 모르나
오천 년 조선 사람들 자식인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소녀 아닌 소녀들도 성노예로 갔으니 소녀상 무효라는 말은
시취 묻은 입술소리

저기 거리에
나비처럼 당나귀처럼 꽃처럼 부엉이처럼
걸어가는 여자들 중
소녀 아닌 여자는 없다
나비와 꽃 안에 팔랑거리는 소녀
당나귀와 부엉이 안에 팔랑거리는 소녀
모든 어미 슬하에서 맑고 애틋하고 고귀했던 모든 소녀
죽은 여자 안에도 소녀는 있다

우리를 기억하라
세상의 거리여
삿자리에 누워 하루 서른 번씩 나라를 잃던 소녀들이 없게 하라
외치는 소녀상이 보기 싫은 자들은
새로운 침략을 준비하는 자들뿐이며
새로운 침략과 손잡고 싶은 자들뿐이다

달아날 길이 없어서 달아나지 못했던
위안소 문을 덧달고 서있는
일본대사관의 문이여
봄이 오면 씀바귀 꽃들 금빛으로 살랑이는 들판이 아직
우리 땅에 빛난다
우리가 쓰디쓴 치욕의 맛을
꽃피우고 있다

일본의 공주를 미군 위안소에 위안협력 보내는 일이
치욕이라면
우리도 꼭 그러했고
여전히 그러한 줄 알아라

ⓒ프레시안(최형락)

시작 노트

공연한 붉은 여우가 목멱을 내려와 시구문에서 사흘 밤낮을 짖더라는 속보도 없었는데, 한 여인이 제국의 어쩌고 하는 책을 추켜들고 나타나 저자를 소란케 하였다.

얼마 후 한일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를 상징하는 일본 대사관 건너 소녀상을 철거키로 했다는 속보가 떴다.

동쪽 바다가 덧정없이 얼어붙는 엄동설한이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소녀상을 지키려는 청년 아기씨들이 길잠자기를 시작했고, 겨울 거리에서 비닐 덮어쓰고 풍찬노숙하는 모습이 언론에 드러났다.

우리 땅에 우리가 만들어 세운 소녀상을 일본이 왜 치워라 부숴라하는지 얼척 없었다.

우리를 노예화했던 전범국가가 언감생심 우리 표현의 자유를 저지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우리 딸들로 상징되는, 지상의 어떤 여성이라도 전쟁터의 성노예로 소모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며 세운 소녀상이다.

따따부따, 민족주의 과잉이네, 자발적 매춘부도 있었네, 객관적 시선을 가진 지성인의 자세가 필요하네, 소녀상 따위 세우는 한국의 촌스러움이 부끄럽네까지, 별별 소리가 회자되던 2015년에 이어 2016년 겨울이었다.

일본이 부수란다고 그 강요에 고개 끄덕이는 정부라는 물건은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다.

제국의 자발적 은근짜라 생각되는 여성을 상당한 선각자라도 되는 양 부추기는 이들도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모양이었다.

매주 수요 집회에서 자기 문학으로 발언할 명단을 김응교 시인이 꾸렸다.

나도 어느 하루, 씀바귀 한 줄기를 씹으며 중학동 한파 속으로 걸어갔다.

공감이건 설득이건 위로건 별무소용일 것만 같은 시를 들고 갔다.

오지게 추웠고, 집회를 마치자 청년 아기씨들은 다시 비닐을 깔고 제가끔 체온으로 소녀상을 감싸고 앉았다.

조선 청년의 피가 일본으로 인해 얼어붙는 일이 언제쯤 사라질까. 사라지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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