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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거리 1.5km…벼랑 끝에 사는 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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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거리 1.5km…벼랑 끝에 사는 아빠들

참사 2주기 '세월호 인양 감시' 동거차도 1박2일 르포

안산보다도 가깝고, 팽목항보다도 가까웠다. 딸 아이가 누워 있던 그곳과 가장 가까운 곳을 더듬거리며 찾아왔더니 벼랑이었다. 그러나 벼랑 끝까지 와도 닿을 수는 없었다. 바다 건너, 아니 무지개 건너야만 사랑하는 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윤민아…"

딸 아이를 집어삼킨 바다를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가슴이 일렁이지만, 그래도 제 뺨을 때려서라도 지켜봐야 한다. 저 바다 어딘가, 윤민이의 친구였던, 윤민이의 선생님이었던 이들이 여전히 누워있다. 그리고 윤민이를 비롯한 304명의 죽음을 밝혀줄 진실이 잠겨있다.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던, 진실을 인양하겠다던 누군가가 사실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닌지, 아빠는 밤새 두 눈이 새빨개지도록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운데, 한 명을 못 구했어요"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에서 배로 꼬박 세 시간 반 걸려 도착한 섬의 이름은 동거차도. 말린 미역이 즐비하게 늘어선 해안을 지나 산길의 초입을 밟으니, 나뭇가지에서 휘날리는 노란 리본이 보인다.

노란 이정표를 따라 다시 오르기를 십여 분, 드디어 희고 둥근 막사 두 개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구, 어서와유."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어눌한 말투의 남자와, 약간 까칠한듯한 말투의 남자가 취재진을 반겼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3반 고(故)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 씨와 고(故)박예슬 학생의 아버지 박종범 씨다.

"어라? 손님이 오셨네?"

장난기 가득한 말투의 이 남자는 같은 2학년 3반 희생자 고(故) 최윤민 학생의 아버지 최성용 씨. 뒤늦게 취재진을 맞은 윤민 아빠는 잠시 산 아래에 다녀온 참이었다.

세 아빠가 동거차도에 들어온 건 지난 8일, 금요일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가족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한 반씩 돌아가며 이곳을 찾는다. 세월호 2주기를 일 주일여 앞둔 그 주 당번은 3반이었고, 이번엔 소연 아빠, 예슬 아빠, 윤민 아빠가 자원했다. 소연 아빠와 윤민 아빠는 벌써 이번이 세 번째였다.

"여기 와서 하는 일이요? 계속, 하루종일 저것만 쳐다보는 거예요."

윤민 아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끝에 대형 선박과 크레인이 보였다. 세월호 인양 작업을 맡은 인양 업체 상하이샐비지의 바지선이었다.

"봐, 크레인이랑 배 모양이 또렷이 보이잖아요. 그게 보일 정도면 얼마나 가깝다는 거야."

이곳에서 바지선까지 거리는 1.5킬로미터.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지척이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한 명을 못 구했어요. 나오라고만 말만 했어도 됐는데. 그때 애들 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때 애들 구했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바다만 보고 있으면 막 울화가 치밀어."

"우리가 속는 게 한두번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던 윤민 아빠는 "더 자세히 보고 싶으면 들어와"라며 비닐 천막을 걷어 젖혔다.

천막 입구에는 기다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천막 안에서도 바다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천막에 동그랗게 렌즈 부분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윤민 아빠는 카메라 앞에 놓인 텐트용 의자에 털썩 앉아 바지선이 클로즈업 된 LCD 화면을 보여줬다.

"가운데가 바지선, 저 오른쪽은 유실 방지 펜스 작업하는 데. 오늘은 보령호(한국 바지선)도 와 있네."

윤민 아빠는 LCD 화면을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화면 속 모습은 정지된 것처럼 잠잠했다.

"도대체 뭣 때문인지 작업을 밤에만 한단 말야. 멀쩡한 대낮에 할 것이지. 말로는 정조기 때 맞추느라 그런 거라는데,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가 속는 게 한두 번이야? 작업하는 거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해도 방해된다고 오지 말라고 하고. 대체 뭘 하는지 부모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예전에 하도 부모들이 속이 폭폭하니까 여기 주민분 배를 얻어 타고서 바지선 근처까지 갔단 말야. 그랬더니 못 오게 하고, 우리 태워줬던 분은 불이익 받는다는 얘기나 듣고."

윤민 아빠는 다시 천막을 걷고 나갔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오후 들어서며 바람이 세졌다. 담뱃불도 잘 붙지 않았다.

"바람이 이렇게 불어가지고는 오늘은 영 작업을 못 하겠는데?"

고작 담배 한 개비가 타들어간 사이, 바람이 더 거세졌다. 밖에 세워 둔 철제 간이 의자가 기우뚱하더니 뒤로 넘어갔다.

"음? 쟤네 뭘 하는 것 같은데?" 하더니 윤민 아빠는 다시금 천막을 열고 들어가 다시 LCD 화면을 들여다봤다.

"결국 크레인 접었네. 하기야 이렇게 바람이 심하면 위험해서 안 돼. 오늘은 버튼 누를 일 없겠어."

평상시에는 카메라를 STBY(대기) 상태로 놓다가,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REC(녹화) 버튼을 누르는데, 오늘은 별일 없을 테니 녹화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의자 오른쪽에는 카메라 조작법이 적힌 종이가 붙여있었다.

"여기 온 아빠들 다 렌즈를 하도 보니까, 이제는 카메라를 대충 만질 줄 알아요. 세월호 가족들은 이런 것도 배워야 해."

윤민 아빠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님이 왔으니 제대로 저녁 준비를 해볼까?"라며 천막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바람 들이치는 비닐 천막에서 버틴 7개월

이곳 텐트는 총 3동, 그 중 튼튼한 막사 두 동은 최근에 성미산학교 학생들과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지어졌고, 그 이전까진 이 비닐 천막만 있었다. 카메라가 놓인 입구만 엉성한 게 아니었다. 천막 안쪽 천, 모기장이 얼기설기 붙어 있었고, 가느다란 철제 기둥은 이것들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었다. 천막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듯, 곳곳에 셀로판지 테이프가 걸려있었다. 아이스박스, 가스레인지, 각종 식자재들 등은 텐트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지난해 9월, 유가족들은 여기에 텐트를 치고 직접 전기도 끌어왔다. 바람 통하고, 비 들이치고, 눈 흘러내리는 이곳에서 벌써 7개월여를 지냈다.

"지금은 새 천막이 생겨서 다행이지. 가족들 힘들까 봐 마음 써주시는 분들 덕분에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냄비에 쌀과 양파, 콩나물 등을 주섬주섬 넣은 뒤 산을 내려가는 길, 윤민 아빠는 "특히 고마운 분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윤민 아빠는 그분에게 신세를 지러 가는 길이다. 그의 발걸음이 동네를 향했다.

그는 "이 집"이라고 하더니, 마당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고 쌀을 씻었다.

"이 집 아저씨가 바다에 떠내려가던 지성이를 건져줬어요. 그것만 해도 너무나 고마운데, 이후로도 유가족들 신경을 정말 많이 써줘요. 설거지하고 짐도 갖다 놓으라고 마당 내 주고, 창고도 열어줘요. 이런 분들이 복을 받아야 할 텐데…"

마당에서 나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는지, 집 안에서 할머니가 나왔다. 윤민 아빠에게 가볍게 눈짓으로 인사한 그는 도와줄 게 없느냐고 했다. 콩나물 씻고 넣을 위생봉투 한 장만 달라 부탁했더니, 금세 봉투 몇 장을 들고 나왔다.

"또 올게요."
"응, 그랴."

윤민 아빠는 "마음 같아선 그 아저씨를 소개해주고 인터뷰도 주선해주고 싶은데, 오히려 안 좋은 일을 당할까 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돕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

"수법이 뻔하잖아요. 사람들이 외면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거지."


2부

동네 슈퍼마켓에서 생수 몇 병이라도 사갈 생각이었는데, 오산이었다. 서른 가구 남짓 사는 동거차도에는 변변한 가게 하나, 음식점 하나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도 별 도리가 없다. 뭍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와야 한다. 동거차도에 오는 유가족들은 일주일 치 음식과 여벌 옷 등이 든 박스를 지게에 이고 지고 산꼭대기까지 나른다. 맨몸으로 쉬엄쉬엄 오르기도 녹록지 않은 산비탈 길을, 윤민 아빠 또한 몇 번이고 다녔다.

마을에서 쌀과 채소를 씻은 뒤 산 꼭대기 천막으로 향하는 길, 중턱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윤민 아빠가 말했다.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니까? 여기 오면 등산해야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도보 순례해야지, 안 그래요?"

산 정상에 오르자마자 바람이 몸을 덮쳤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헐렁한 천막이 철골을 때리는 소리도 요란했다. 이렇게 심한 바람은 처음이라며 윤민 아빠도 혀를 내둘렀다.

"오늘은 작업도 글렀응게 맛있는 물이나 마시쥬."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소연 아빠가 '맛있는 물'을 찾았다. 술이었다.

"오케이, 안주는 좀만 기다려요."

윤민 아빠는 공식 '셰프'였다. 밥 안치고 채소 다듬는 손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뚝딱뚝딱 칼질 몇 번에 샤브샤브 재료가 차려졌다. 뜻밖의 호사였다.

"운 좋은 줄 알아요. 다른 반 아저씨들 만났으면 스팸에 햇반, 컵라면이 끝이야. 그런데 몇 번 그렇게 해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잘 먹어야지 이 짓(감시)도 하겠더라고."

식탁 대용 종이박스를 넓게 깔고, 가스 불 위에 냄비를 올렸다. 보글보글 육수가 끓자, 아빠들은 아낌없이 쇠고기를 투하했다. 섬을 나가려면 아직 나흘이나 더 남았는데 이렇게 다 써도 되냐 물으니, 오늘 내로 먹어치워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꽁꽁 언 식재료라도 아이스박스에 있으면 3일이면 다 녹는다는 것이었다.

"나한텐 친구고 애인이었던 소연이를 잃었으니…"

만찬에 술까지 곁들이니 아빠들 얼굴이 불콰해졌다. 고기 몇 첨을 후루룩 넘기던 소연 아빠가 비어있는 취재진의 밥그릇을 보며 말했다.

"아이구 우리 기자 선생님은 왜 이렇게 안 먹는대유? 우리 소연이는 고기 엄청 좋아해서 겁나게 많이 먹었어유. 밥도 두 공기씩 먹었어. 자다가도 '고기, 고기' 했다니께. 그래서 내가 겁나게 사줬구먼유. 나는 우리 소연이한테는 한 개도 안 아까웠시유. 만날 옷도 이쁜 놈, 다른 놈 입힐라고 겁나게 사줬구만유. 나한테는 우리 소연이밖에 없었당게요."

"에이그. 우리 형님 또 소연이 얘기 시작하셨네."

웃으며 소연 아빠를 타박하던 예슬 아빠의 눈에 어느새 안타까운 빛이 돌았다.

"형님이 4살 때부터 소연이를 혼자 키웠거든. 그러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어. 아주 알아주는 딸 바보라니까."

윤민이네는 세 자매, 예슬이네는 두 자매, 그리고 소연이네는 소연이 혼자였다.

"엄마도 없고, 형제도 없어서 소연이한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내가 워낙 우리 소연이를 좋아하니께, 우리 소연이도 그걸 알아서 나한테 참 잘해줬어유. 내가 재혼할라고 하니까 울 정도였으니까. 나한텐 친구고 애인이었지. 그런 애를 잃었으니, 내가 죽고 싶지 않았겠어유? 술 없었으면 나는 진즉에 죽었시유."

소연 아빠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예슬 아빠가 다독이며 말했다.

"형님, 근데 하늘에서 소연이가 형님 재혼하는 거 지금도 반대할까? 아닐거야, 아마."

"우리 유가족, 착한 게 아니라 참는 겁니다"

예슬이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워낙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던 예슬이. 그러나 예슬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예슬 아빠가 눈을 감고 입술을 감쳐 물었다. 무언의 신호였다. 더는 묻지 않았다.

이게 딸 아이의 부재를 견디는 아빠들 각자의 방식이었다. 소연 아빠는 술 한잔에 생전 소연이 이야기를 하나 두 개 꺼내 놓는 것으로, 예슬 아빠는 가슴에 묻어두는 것으로, 다들 그렇게 아직도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쩜 그렇게 잘 버티냐고, 착하냐고들 하죠? 우린요. 정말 그냥 참고 있는 거예요. 미치겠는데, 나 하나 잘못된 행동 하면 가족들한테 다 피해가 가니까, 참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해요."

예슬 아빠가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윤민 아버지도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 다 삶에 미련 없는 사람들이에요. 단원고 부모 250명, 못된 사람 미운 사람 한 명씩 데리고 여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있어. 언젠간 폭발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봐요. 그런데 기다리는 거야. 왜? 우리가 풀어야 할 일을 우리 자식 세대한테 넘기기 싫거든.

윤민이 언니 윤아가 그래요. '엄마 아빠들이 진상규명 못 해도, 나중에 우리 세대가 풀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라고. 그런데 나는 싫어요. 우리 아이들한테까지 고통 넘겨주고 싶지 않거든."

"우리 얘기 딱 10%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천막 밖으로 나오니, 지게며, 의자며 바람에 나동그라진 지 오래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데다 안개가 껴 바다인지 산인지조차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몽롱한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정통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야 했다. 낮은 포복으로 침낭이 있는 막사까지 갔다. 아직 막사 두 동의 불이 환했다.

"왜 두 군데 다 불을 안 끄는지 알겠어요?"

예슬 아빠가 질문을 던졌다. 무섭기 때문일까? 속으로만 대답했다.

"전시 효과예요. 바지선에서도 우리를 보라고. 이렇게 환히 불을 켜두고 너희를 감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지."

혹시라도 새벽 작업이 있을까 봐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그러나 제대로 잠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람에 천막이 퍼덕거리는 소음이 새벽 내 귀를 때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맞은 다음 날 아침, 아빠들이 손님맞이에 분주해졌다. 세월호 특조위의 방문이 예정된 탓이었다. 4.16 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인 동수 아빠 정성욱 씨와 진상규명분과장 준형 아빠 장훈 씨도 특조위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특조위는 이날 오전 바지선에 올라 상하이샐비지 측의 인양 작업 과정을 지켜 볼 계획이었으나, 풍랑으로 인해 무산됐다. 권영빈 상임위원은 "2주기를 맞아 바지선에서 직접 인양 상황을 파악하고 국민과 공유하려고 했는데 안타깝다"며 "재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특조위 일행과 함께 이곳을 떠날 시간. "식사값 안 내고 벌써 가느냐"며 윤민 아빠가 첫 인사 때처럼 개구쟁이같은 웃음을 띠었다.

"식사값, 다른 거 없어요. 딱 10%만. 우리가 하는 이야기 10%만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어. 그거면 우린 더 바랄 게 없어."

바람은 여전히 광폭하게 휘몰아치고, 바다 또한 일렁이고 있었다. 진실은 저기 어디쯤에 있는 걸까. 모든 진실의 10%만이라도 알 수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2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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