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장면이 2014년 4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임박설이 나올 때 나왔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북한을 압박해 핵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중국 역할론'을 강조했다. 그러자 추이톈카이(崔天凱) 주미 중국대사는 한 마디로 응수했다.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동상이몽과 동문서답
북한이 '수소폭탄' 이라고 주장한 4차 핵실험 이후에도 이런 광경은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핵실험 직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중국이 원하는 특별한 대북 접근법이 있었고 중국이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존중했으나 이 방식이 작동하지 않았다"며 중국의 강력한 대북 압박과 제재를 요구했다.
그러자 중국 외교부는 "한반도 핵문제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중국이 매듭을 만든 것도 아니며 중국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도 아니다"며 불쾌감을 피력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3원칙(한반도 비핵화, 평화와 안정 유지, 대화를 통한 해결)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이건 '결일불과'(缺一不可,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도 '핵 문제에 대한 중국 책임론은 생억지'란 제목의 사설에서 "문제의 원인은 미국에 있다"고 반박했다.
지난 27일에 있었던 미중 외교 장관의 기자회견에서도 이러한 입장 차이는 거듭 확인되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5시간 동안의 마라톤 협상을 마치고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이 자리에서 케리는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북한을 옥죄야 한다"며 "미국은 중국의 특별한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왕이는 "제재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며, "북핵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선을 그었다. 북핵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두 나라의 인식이 오히려 분기(分岐)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케리는 "평양이 문을 열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면 경제, 에너지, 식량 등에 대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전형적인 동문서답이다. 북한은 줄곧 "핵 문제는 경제적 흥정물이 아니다"라고 못 박아왔다. 중국 역시 핵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왔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 미국이다. 이걸 모를 리 없는 케리는 또다시 하나마나한 얘기만 늘어놓은 셈이다. 미국이 북핵 해결의 문을 열 수 있는 평화협정 체결에 관심이 없다는 점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중 핑퐁 게임의 배경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중간의 갈등 구조는 다차원적이다. 우선 미국은 중국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는 지렛대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있다고 여긴다. 대표적으로 중국이 원유 공급을 중단하면 북한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중국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국의 안보 이익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겠다는 으름장도 놓는다. 중국이 우려하는 미국 주도의 동맹 강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군사력 강화, 미사일 방어체제(MD) 본격 추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울러 중국이 북핵을 방관하면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지도국이 될 수 없다고도 경고한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론도 매섭다. 우선 북핵 문제는 북미간의 적대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특히 미국이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지 않아 북핵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본다. 중국이 어렵게 북한을 설득해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이끌어냈는데도, 대화를 거부한 쪽은 미국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은 미국이 북핵 해결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그 책임을 중국에게 떠넘기고, 북핵 위협을 이유로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박차를 가한다고 본다. 원유 공급 중단 등 강력한 대북 제재 역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켜 역효과만 낸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익숙한 패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 책임론과 역할론을 부각시켜 '전략적 인내'의 실패를 은폐하면서 재균형 전략에 힘을 쏟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 규탄 대열에는 합류하면서도 냉각기를 거쳐 북중 관계를 관리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이 재균형 전략을 강화할수록 순망치한(脣亡齒寒)으로서의 북한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중간의 전략적 틈새를 이용해 북한은 핵 억제력을 계속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
'유체이탈'한 한국
이처럼 핵문제를 둘러싼 미중간의 동상이몽이 커지고 북한이 그 틈을 이용해 핵 억제력을 강화하고 있다면, 가장 큰 경각심을 가져야 할 당사자는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이 구도에서 제3자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유체이탈'형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면, 미국한테는 '김정은을 벌벌 떨게 할 수 있는 전략 무기를 보내달라'고 조르고, 중국한테는 '북한을 혼내 달라'고 압박한다. 정작 한국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일종의 '게임 체인저'로 규정한다. "동북아 안보지형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고 "북핵 문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 제시가 일체 없다. 오히려 국방부와 국정원은 4차 북핵 실험이 수소폭탄 실험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이전 단계인 증폭 원자탄 실험이라고 하더라도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3차 핵실험보다 폭발력이 약하다는 분석 결과까지 내놓고 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게임 체인저'로 규정하는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박 대통령의 말대로 4차 핵실험이 '게임 체인저'라면, 그에 걸맞은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헛발질만 계속하면서 '실패한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일만 터지면 미국과 중국을 조르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박근혜 정부가 북핵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 자체가 의문스럽다.
나는 앞선 글에서 북핵'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고 있다. 북핵을 해결하려면 북미간의 적대관계와 한반도 정전체제로 대표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사안에는 관심이 없고 '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통일이 북핵 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이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그 백미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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